[전례력 연재] 역사의 전환 – 세례자 요한 탄생

Saturday, June 24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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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전환 – 세례자 요한 탄생 (6월 24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인들 가운데 탄생 축일을 정하여 지키는 분은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두 분이다. 정교회 성당에는 제대를 둘러싼 성화벽(이코노스타시스)이 있다. 예수의 이콘을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이콘이 양쪽 곁을 지킨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에 관련이 깊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련성을 축일 지정에도 반영했다. 4세기에 성탄절이 지정되고 6세기 초에 요한의 탄생 축일을 정했다. 성탄절에서 정확히 6개월 앞선 날짜이다. 다만, 6월 24일인 까닭은 다음 달 첫날부터 8일 전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12월과 6월은 하루 차이가 난다). 요한과 예수는 태어난 시간 차이만큼 자기 역할을 달리했고, 그 같은 날짜만큼 쌍둥이처럼 삶의 궤적을 같이 했다.

성서의 기록과 교회 전통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와 늘 비교하여 역사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첫째,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전환이다. 세례자 요한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겼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즈가리야는 늙은 남성 제사장이었다. 그는 천사가 전하는 요한 수태고지를 믿지 못했다. 그 탓에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 하게 된다. 반면, 예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난다. 마리아는 젊은 여성이고 시골뜨기다. 그는 천사가 전하는 예수의 수태고지를 믿는다. 마리아는 입을 열어 마리아 송가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이 비교에서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제사장과 시골 무지렁이, 그리고 믿지 않음과 믿음이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대와 성, 지위와 행동의 전환이 뚜렷하다.

둘째, 선구자와 주인공의 전환이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치고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라고 외친 선구자였다. 반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을 내리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뤄지는 현실을 보여주신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 부르신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벗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몸소 살아가는 주인공이시다.

셋째, 선포와 실천의 전환이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 전통을 완성했다.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분’이다. ‘말씀의 선포’를 넘어서서 ‘말씀의 실천’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환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분별한다. 정교회에서는 9월 23일을 세례자 요한 수태고지로 지킨다. 추분이라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이다. 예수 수태고지 3월 25일은 춘분이라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한다”(요한 3:30)는 말이 반영된 축일 날짜이다.

이런 비교는 두 분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역사의 전환을 말한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더 놀라운 새 시대가 펼쳐진다. 먼저 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기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역할을 끝내고 미래 세대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고집과 아집이 생겨난다.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린다. 역사의 장애물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이 아집이 만든 역사에 전환을 촉구한다.

  1. [성공회 신문] 2017년 6월 24일 치 7면 []

[전례력 연재] 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Saturday, April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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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이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이 신비하고 거룩한 불꽃 앞에 둘러선 이들이여,
이제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 은혜를 인하여 이 위대한 빛을 찬양하라”
(부활찬송 첫 부분).

부활밤 그리스도인들은 마당에 모여 새로운 불을 축복하여 어둠을 밝힌다. 새로운 불에서 빛을 밝혀 부활초에 옮겨 놓고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며 길을 따른다. 이 순례자들의 손에도 작은 촛불이 들려있다. 빛의 순례자들이 모여서 듣는 부활찬송(Exsultet)에는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죽음과 부활 속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이 펼쳐진다. 8세기부터 ‘부활찬송’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활과 구원의 신학을 보듬어 들려주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이 세상을 ‘보시기에 참 좋은 것’으로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시기, 질투와 모함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파고들면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게 마련이다. 서로 멀어지고 깨진 관계를 신앙인은 ‘타락’과 ‘죄’라 부른다. 창조의 때를 회복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시겠다고 작정하셨다. 우리에게 선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마련하고, 우리의 교만과 미움을 쫓아내셨다.

이 부활밤이 거룩하고 복된 까닭은 이 위대한 사건이 예수를 건너 우리 자신과 교회를 통해 더욱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예수의 삶을 따라 악행을 지워나가고, 서로 용서한다. 우는 이에게 기쁨을 주고, 분열의 세상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준다. 신앙인은 이렇게 빛의 순례자들이다. 부활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인 사람들이 세상의 빛으로 변화하는 축성의 시간이다.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부활-성삼일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고,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며, 부활을 경험한다. 이 거룩한 사흘 동안 일어난 우주의 결합과 화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한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마지막 삼일은 이 모든 화해와 구원의 필수요소를 제시한다.

성목요일은 세족례와 마지막 나눔의 만찬으로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금요일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절망이 서로 내어주는 희생으로만 희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한다. 성토요일은 어둠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새 생명을 건져 올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마침내 부활밤에 우리는 죽음이 우리 삶의 끝이 아니며, 새 빛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 우리의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체험한다.

새로운 생명이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산다.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은 이제 ‘주님의 날’(주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시간인 ‘제8요일’의 역사이다. 새로운 시간에 우리는 새로운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며 산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스도를 먹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이다. 아울러, 부활 오십일 째인 성령강림절은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교회’라는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 


“모든 창조물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여, 주님은 이제와 영원히 다스리시니, 우리도 세상에 이 빛을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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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목요일 – 더럽고 배고프고 발가벗겨지는 신앙

Thursday, April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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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성삼일 성 목요일 전례 강론

요한 13:1-17, 31b-35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성목요일 세족례 및 성체제정 기념 성찬례
2017년 4월 13일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인생아 기억하라, 흙에서 돌아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지난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되새겨 보면,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사순절의 발원이요 본뜻입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옛 수도자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인사하면서, 우리가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는 사실을 늘 되새겼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옛것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이 새로 태어나려고 환영해야 할 죽음입니다. 나아가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을 새롭게 살리려는 죽음입니다. ‘나와 우리’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그 기쁨으로 이제는 다른 사람까지 새롭게 살리는 일이 오늘 성 목요일의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성목요일부터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열어주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간을 다 모아 수렵하고,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운 일을 싹틔우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왔던 모든 땀과 수고의 사건이 오늘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 인생의 온갖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 우리 삶의 시간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노동과 수고의 세월 속에서 두터워진 우리의 손등 위에, 조금씩 늘어지고 피부와 깊어지는 주름살 사이에, 종종 피곤함에 말라서 갈라지고 터지며 딱딱해지고 일그러진 우리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우리 삶의 웃음과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쌓인 세월의 시간을 모두 껴안으시며, 우리를 새로운 삶의 공간과 시간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피곤하다 못하여 더럽고 뭉툭한 발을 씻어주시는 세족례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한낮의 분주한 노동과 수고, 갈등과 방황에 지치고 목마른 우리 앞에 가장 귀한 저녁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초대받은 세족과 마지막 만찬 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혁명적인 변화를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이 하던 일을 주인의 일로 바꾸셨습니다. 말로만 그리하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당신의 행동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행동의 바통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시며, 이처럼 살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겸손한 섬김을 향한 단단한 분부가 성 목요일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성목요일에 해당하는 영어 “몬디 서스데이” Maundy Thursday는 ‘분부와 명령’ mandatum 의 목요일이라는 뜻입니다.이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삶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요한 13:8).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세상을 섬기러 온 사명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며 이를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하시며 분부하십니다.

여기 눈여겨 살피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은 “이 일을 행하라”하신 말씀입니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성찬례를 두고 논쟁이 격하였고, 그 해석에 따라 서로 정죄하고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이다”하는 말에만 사로잡혀 교리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떻게 떡이나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웁니다. 자기 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기네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고 법으로 못 박아 두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말뜻을 제멋대로 듣고, 보고 들어야 할 부분은 허투루 생각한 처사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깊이 하신 말씀,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러면 성 목요일의 정신을 배신하고 맙니다.

성 목요일의 전례는 주님의 삶 마지막 단계에서 보여주신 섬김과 나눔의 행동을, 우리 신자들이 우리 삶과 생활로 옮기라는 부탁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달라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여 모인 우리는 겸손히 섬기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행동을 오늘 전례에서 몸으로 훈련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전례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 섬김과 나눔의 뜻과 삶을 몸으로 익히는 일입니다. 전례는 이 신앙을 몸에 배도록 수련하는 일입니다. 그 수련에서 마음과 행동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질 때, 이를 영성이라고 합니다. 성삼일은 전례를 통한 영성 수련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성 목요일 전례의 마지막 순서는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입니다. 제대보를 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겼던 알몸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몸이 벗겨진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광경을 목도하는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발가벗겨야 합니다. 우리 몸에도 숨겨진 아픈 상처와 세월의 흉터가 고스란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불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때라야 성 목요일의 분부를 무시하고 살았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제야 화려한 명예와 권력과 욕심으로 가린 우리 마음과 몸에서 예수님의 세족과 성찬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납니다.

이제 여러분의 발을 씻을 터이니, 그 발로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이미 온몸이 깨끗해진 여러분의 발만은 이 세상의 어둠과 더러움을 몸으로 겪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로 다시 더러워져야 합니다. 깨끗한 발을 지키는 일이 신앙이 아닙니다. 다시 씻으시고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신뢰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삶을 따르며, 흙먼지 묻고 땀냄새나고, 갈라지고 비틀리도록 우리 발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성당에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피곤한 발을 다시 어루만지시며 씻어주십니다.

이제 주님의 몸과 피를 여러분의 몸에 모실 터이니, 그 밥의 힘으로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몸을 모신 사람이니, 다시 허기지도록 온 힘을 다하여 세상에서 배고파하는 이들과 우는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들과 삶에 감사하는 이들과 더불어 우리 삶의 선물을 축하하십시오. 여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 창조세계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며, 우리는 다시 배고파하고 목말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제대로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를 먹여주시며 우리의 생기를 회복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발가벗은 몸을 기억하며,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이 입은 옷과 가진 선물과 능력으로 세상의 헐벗은 이들을 입히십시오. 그들과 더불어 풍찬노숙하여 같이 이불을 덮고 옷을 나누고, 감춰둔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 슬픔과 절망을 나누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러다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몸이 되어 다시 이 성당에 돌아오십시오. 하느님의 따뜻하고 깊은 숨결이 여러분을 기다리며 감싸 안고 하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러니 부활 성삼일을 걷는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분부하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일들을 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