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양식 – 우물가의 여인처럼

Sunday, March 1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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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양식 – 우물가의 여인처럼 (요한 4:5-42)

하느님은 생명의 물입니다. 어둠 깊은 물에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그 물은 죽음과 심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는 홍수의 물로 심판받습니다. 다시, 홍해에서 갈라진 물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의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물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차별과 분리의 벽을 넘는 만남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마련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만난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과 변화의 물을 선택합니다.

오늘 한낮에 벌어진 우물가의 만남은 지난주 어둠 속의 만남과 대조를 이룹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여인은 대낮에 자신의 신분과 처지가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권위 있는 선생입니다. 그러나 우물가에서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지치고 연약한 나그네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니고데모는 권력과 도덕의 명분을 갖춘 사람이지만, 이 여인은 과거의 삶이 복잡합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권력과 신분, 종교와 혈통입니다. 성차별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대비 점도 꼭 눈여겨봐야 합니다. 휘두르는 힘과 고통받는 연약함을 여러 맥락에서 조심스레 식별해야 합니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처음에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지의 상태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와 편견을 벗어나 배움과 깨달음으로 전진하느냐 마느냐는 신앙의 기준이 됩니다.

두 사람의 방향은 전혀 다르게 펼쳐집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지만, 여인은 깊은 대화와 배움 속에서 자기 생각을 바꿉니다. 자신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처지, 복잡하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낯선 사람과 나눌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세운 온갖 차별과 분열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 일로 여인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과거가 불분명하고 낯선 이방인 여인을 복음의 증언자로 초대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신앙인이 먹을 양식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새로운 음식의 조리법과 같습니다. 그 조리법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몸을 참된 기도와 예배의 그릇에 담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뒤섞여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로 끓을 때 새로운 음식이 마련됩니다. 교회는 이 음식을 올린 잔칫상에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행동이 우리 신앙인의 양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예수님과 생명의 물을 마시며 신앙의 양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이 우물가의 성찬례, 참되고 영적인 예배입니다.

뒤집어야 열리는 행복

Sunday, January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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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야 열리는 행복 (마태 5:1-12)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널리 드러나셨으니, 그 제자들과 신앙인들도 그늘진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삽니다. 신앙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오히려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만든 음습한 그늘이 널렸습니다. 거기에선 거짓이 곰팡이처럼 번집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며 그 가르침과 길을 따르라 하셨으나, 율법은 금세 스스로 ‘선택받은 자’라고 으스대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새 역사를 여시며 새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과거 율법을 뒤집어, 사람에게 참된 행복을 선사하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새롭게 열린 은총의 법입니다. 복음서를 가로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 다섯 묶음은 모세오경을 교체하고 뒤집습니다. 그 첫 단락 참된 행복 선언은 십계명을 넘어서며 우리 시선과 행동을 새로 열어줍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나누어야 할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펼쳐야 할 관계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명령과 조건이 가득한 계명은 압박과 통제의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해, 복음은 우리의 모질고 거친 삶 자체에서 깃든 복락의 씨앗을 발견하시며 축복합니다.

모세가 험하고 외로운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여럿이 함께 오른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락을 선언합니다. 높은 산의 지위를 독점하는 권력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올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가르칠 때, 참된 권위가 섭니다. 세상에서 작고 비천하다고 취급받는 이들을 ‘산 위’로 끌어올려 ‘곁에’ 앉히실 때, 예수님께서 여시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작동합니다. 세상 풍파로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함을 갖추고 정의를 목말라 하는 사람, 깨끗한 마음으로 자비와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을 받고 그 삶이 칭송받는 질서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예수님께서 뒤집은 질서를 깊이 마음에 새깁니다. ‘이 세상 안에서 지혜 있고 강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약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1고린 1:26-28). 바울로 성인은 말끝마다 ‘이 세상’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이 세상’에 대항하여 ‘하느님 나라’에 깃든 가치를 세우라는 요청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성인이 말한 대로, “이 세상의 사사로운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넓고 거룩한 사랑”을 분별하라는 당부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경쟁하여 얻어내고 오른 성공과 성취는 예수님이 선포하는 은총과 행복에서 거리가 멉니다.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함께 초대하고 끌어올려 곁에 앉혀 누리는 삶이 행복의 길입니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서 돌이켜야 참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비추시니, 함께 올라 누리며 빛의 길을 걸어갑시다.

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Sunday, January 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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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루가 2:15-21)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거리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 아래 고함치는 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마저도 당황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 ‘전도’ 열정을 마음으로 칭찬할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여러 종교의 포교 행태가 자칫 광신으로 그 가르침의 핵심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안에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기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부추기면, 그 종교 자체와 그 종교인마저 애꿎은 비난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민망할 지경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때, 신앙인은 우리가 믿는 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해 첫날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을 지키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그 다짐은 ‘예수-임마누엘-그리스도’의 이름 뜻을 되새기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 사건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사람이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일에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놀라운 행동이 아기 예수 안에서 펼쳐집니다.

새날을 여는 분은 이제 정치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우악스러운 외침과 강요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려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입니다. 춥고 배고픈 빈곤의 현실에 오시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 안에 머무십니다. 다르고 낯설다고 배척당하여 서성이는 이들 옆에서 걸으십니다. 진실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사랑을 회복하려는 수고와 땀을 함께 흘리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왕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동행하시며 부서진 세계에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분이 진정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동행을 걷지 않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 이들은 지배자들이거나 위선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은 우리 자신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창조 세계의 평등한 주역으로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시편 기자와 함께 새날 새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십니까?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