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Sunday, February 22nd, 2015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마르 1:9~15)1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선언과 함께 이마에 재를 받으며 사순절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절기는 40일 동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인생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성찰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신앙을 되새기며 걷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경험, 갈릴래아 선교는 사순절 여정의 흐름과 본뜻을 알려주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에 초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는 과거를 씻어내고 청산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아울러 세례의 좀 더 깊은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세워주신다는 은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굳게 닫혀 무서울 것 같은 하늘을 ‘가르고’ 비둘기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려왔다는 장면의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은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성공과 성취, 안녕을 보장하리라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례의 성령은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를 힘겨워 흔들리기 쉬운 광야로 이끌어갑니다. 그 광야는 무서워 피하고 싶은 곳이며, 외롭고 갖은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세례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은 축복의 보장이 아니라 여전히 광야 경험의 연속이기 일쑤입니다.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실까요?

광야는 우리가 저마다 지닌 내면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이를 보듬어 다스리지 않고서는 우리 신앙의 도약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온갖 어둠과 두려움, 여러 유혹이 넘실대는 광야의 추운 어둠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그 눈물은 이제 우리 마음의 어지러운 눈을 씻어내는 세례의 물이 되어 세상을 새롭고 청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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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둠은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세상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대면하고 만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고통과 어려움의 눈물을 흘려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요, 그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서로 발견하며 연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겪는 광야 경험은 수고스럽고 고통스럽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얻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전도와 선교도 어둡고 추운 광야에서 흘린 눈물 머금은 시선과 용기에서 비롯합니다. 아름다운 친구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순간에 등장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외침과 고난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는 유혹과 위협이 계속되는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의 선교를 감당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와 광야와 전도가 이어지는 장면은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먼저 이루고 알려주는 듯합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광야의 눈물과 용기와 연대로 이제 부활을 향한 발걸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순절 신앙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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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22일치 – 수정(↩)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Sunday, February 15th, 2015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마르 1:40~45)1

오늘 구약성서와 복음서 본문에 나온 ‘나병’의 실체가 현대인이 아는 ‘한센병’과 같은 병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이 불편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한 피부병이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한센병이든 심한 피부병이든 이런 병을 매우 무서워하며 그런 병자를 차별하고 모욕했던 역사와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삶을 더욱 비참하게 했던 병을 두려움과 차별의 눈으로 ‘하늘의 형벌’[天刑]이라 부르며 그 병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과 수도자, 성직자가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과 그의 동료 수녀님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한국 성공회도 일찍이 남양주 마석에 한센병 음성인의 마을인 ‘성생원’을 마련하여 이분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고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차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삶이 신앙인 것을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신앙인의 삶과 증언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닮아가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나병 환자’의 고통과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마르코 복음서의 호흡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만큼은 느리고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옮을까 무서워 손대기 주저하는 병든 몸에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갖다 대시며’ 치유하신 행동을 기술합니다. 마음의 측은함과 두려움을 넘는 몸의 친밀하고 세심한 행동이 함께 어우러져 치유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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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치유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치유는 한 사람이 사회에서 처한 지위와 현실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정결법’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던 사람의 지위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라고 하신 까닭입니다. 한 사람의 치유는 몸과 마음, 공동체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여러 사회 정치 문제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면모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치유를 위한 측은지심과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한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우리 신앙인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주시는 깊은 당부처럼, 신앙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우리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후기: 이 짧은 글을 쓰며, 나는 한하운 시인(1920~1975)의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1949년)을 떠올렸다. ‘전라도’와 ‘소록도’가 우리 사회에 대물림되는 고정관념과 차별의 행태 속에서 포개졌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나병 걸린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도 겹쳤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나아만 장군이 같은 병으로 절망하는 순간,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의 노획물(패배자)인 유대인 ‘몸종’(노예) ‘소녀’(여성)로 바뀐다. 예언자 엘리사의 명령에 거만한 나아만이 여전히 권력의 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할 때, 그를 설득하는 이들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었다.

이 역설과 전복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에 면면히 흐른다. 하느님 나라는 이 전통을 사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와 ‘소록도’가 상징하는 역사와 기억의 실체 안에서 이 신앙의 역설을 알아내고 삶의 전복을 마련하며 남은 발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문화와 사회는 먼 일이 된다.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15일치 – 수정(↩)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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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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