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솔직히

Sunday, November 1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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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성공회신학)

사람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책이 있습니다. 자못 진지하게 삶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무렵의 책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는 합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오랜 생각을 접고, 우선 종교와 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다짐한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습니다. 하라는 입시 공부는 안 하고 교과서 뒤에 몰래 펼쳐서 여러 신학책을 읽고는 했습니다. 아직 철모르던 때에 어느 분이 소개해 주신 책 하나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에게 솔직히> Honest to God (1963년). 그 제목이 마음에 깊이 걸렸습니다. 현실의 교회가 하느님께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저 자신도 물었습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가?’ 책의 저자 존 로빈슨(1919-1983년)은 자신이 겪는 신앙의 의문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흔들리는 신앙의 터전을 어떻게 하면 쇄신할까 고민했습니다. 그가 저명한 성서학자이고 성공회 주교님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신학자와 주교가 이렇게 터놓고 고민해도 되나?’

로빈슨 주교님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씨름한 신학자들을 초대하여 대화합니다. 이 시대에도 하느님을 ‘저 하늘 위나, 이 세상 밖에서’ 찾을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노인의 얼굴을 한 채 심판관을 자처하는’ 신을 상상하는 관습이 옳은 일인지 묻습니다. 그는 성서학자인 불트만을 따라 성서를 새로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나눕니다. 조직신학자인 틸리히를 읽으며 하느님을 인간 존재의 힘이라고 새롭게 이해합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순교했던 본회퍼를 되새기며 세속사회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신앙이 가능한지 성찰합니다.

주교님은 변화한 세상에서 신앙의 의미를 정직하게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직함때문에 교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찌 주교가 이런 망발을 하느냐?’는 험한 말도 나왔습니다. 친구들도 너무 나갔다고 핀잔했습니다. 신자들은 의심 없이 물려받은 신앙을 흔드는 이야기가 불편했습니다. 여러 공격을 받아 외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려 했던 이들과 교회 밖에 있던 이들은 이 책이 던진 질문으로 하느님과 신앙, 그리고 시대에 관하여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갔습니다.

30여 년 전 그 책을 제게 쥐여 주었던 분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신앙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자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솔직하고 깊은 신앙 안에서 자유와 기쁨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가을 낙엽처럼 헤매는 이들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은 다시 누군가에게 줘서 이제는 제 손에 없습니다. 그도 저와 같은 축복을 누렸으리라 믿습니다.

신에게 솔직히. 그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마음이 뜨겁고 떨립니다. 신앙을 버릴까 하던 방황을 거쳐, 로빈슨 주교님과 함께 성공회 전통 안에서 정직한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고민과 정직한 배움 안에서 쉬지 않고 흔들리는 신앙이 참 아름답습니다.

  1.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복음닷컴> 2018년 11월 18일 치 (↩)

[전례력 연재] 성도의 상통 – 추석의 신학

Saturday, September 22n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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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상통 – 추석의 신학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공회 기도서>(2004년)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설 명절과 추석 명절을 ‘주요 축일’로 정하고, 주일과 겹칠 때는 주일보다 우선하여 지키게 했다는 점이다. 축일 지정의 전통에도 맞고 우리 문화 존중의 태도를 잘 표현한 일이다(기도서 27쪽). 그런데 명절을 축일로 지키는 일에 관해서 여러모로 살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도의 상통’ 교리를 명절 예배의 근거로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조상 추모 예식을 조정하여 실천해야 한다.

<기도서>는 추모 예식의 신학 근거를 ‘성도의 상통’ 교리라고 분명하게 밝힌다(806쪽). ‘성도의 상통’은 이 세상을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끊이지 않는 교제를 말하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구분이 없다. 교회는 역사의 모든 신앙인을 ‘성도’(saints)라고 부른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 공간이고 예배는 그 시간이다. 하늘과 땅에서 같은 성도로 서로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아름다운 신앙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별세자 추모를 교회에 모여서 했다. 순교자를 기억하고 먼저 떠나간 가족, 동료 신앙인을 추모하는 일은 공동체의 의무였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공동체의 추모 예배는 가족 중심의 사적인 ‘연(煉)미사’로 변했다. 말 그대로, 연옥의 영혼을 위하 드리는 미사라는 뜻이다. 원래는 사목적인 위로와 희망을 담았던 ‘연옥’ 교리가 변질하여, 별세자의 영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부패가 횡행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연미사’ 뿐만 아니라 ‘별세자를 위한 기도’를 없애고, 추모 예식의 의미를 깍아내렸던 이유다. 성공회는 중세의 잘못을 반복하지도 않고, 종교개혁자들의 속 좁은 태도를 따라 하지도 않았다. 늘 ‘성도의 상통’ 신학으로 중심을 잡았다.

한국에서는 왜 교회 안에서 추모 예식을 드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상 제사와 미신을 없앤다는 이유로 교회의 예법에 따라 교회로 모여 드리게 했다고 추측한다. 제사 관습을 멈추게 하고, 미사와 예배 안에서 신앙 교육 효과를 얻는 방법이었겠다. 이제 선교사 시대를 벗어난 교회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우리 관습의 본래 뜻을 함께 헤아려서 새로운 길을 터야 한다.

가족 전체가 신앙인이라면 명절 예배를 성당에 모여서 드리면 좋겠다. 특히, 설과 추석 명절에는 제대 앞에 소박한 음식상을 차리고, 우리 전통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한다. 신자들의 기도 부분에서 여러 성인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성인 호칭 기도에 이어, 별세한 이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다. 기도 후에 신자들은 제대를 향하여 모두 정중히 목례하고, 평화의 인사를 함께 나눈 뒤, 성찬의 전례로 이어가도록 한다.

가족 안에서 종교가 서로 달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명절 예식을 두고 다른 종교 관습 때문에 갈라지는 일을 피해야 한다. 갈등을 중재하는 일이 신앙인의 도리이다. 이때는 성당보다는, 가정에서 드리면 좋겠다. 우리 전통의 음식상을 소박하게 차리고, 절을 할 수도 있다. 신위를 놓지 않고, 초혼(강신) 없이, 순서에 따라 말없이 행동으로만 예를 표한다. ‘성도의 상통’ 신학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뒤에 가까운 조상에 관한 기억을 나누는 순서를 갖고, 기도서에 있는 추모 예식 전체나 일부분으로 마칠 수 있다.

예식 준비와 실행에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절 횟수는 두 번으로 하되, 남녀 구별은 두지 않는다. 음식상은 ‘제사상’이 아니라, 예가 끝나면 상을 곧바로 옮겨서 가족 전체가 먹을 수 있는 상차림으로 한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가중되는 명절 풍습을 신앙인이 먼저 바꿔야 한다. 복잡한 제사상 관습은 오랜 전통이 아니라 조선 말 신분 질서가 어지러워지면서, 저마다 ‘양반 제사상’을 흉내내어 정착했다. 그 노역은 조선의 ‘종’들에서 근대의 ‘여성’으로 넘어왔다. 이를 끊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9월 22일 치 (↩)

[전례력 연재] 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Saturday, September 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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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축일 – 9월 13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박해 중에도 교세가 늘긴 했지만 순교를 각오하던 처지에서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는 종교로 변한 것이다. 그 파장은 컸다. 지루했던 신학 논쟁을 정치 권력이 나서서 정리했다. 필요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점차 세속 정치를 닮아갔다. 로마 정치의 위계질서와 권력 문화가 교회에도 들어왔다. 주교는 신앙의 교사, 사목자, 순교자라는 소명을 벗고, 점차 사회와 종교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피의 순교 시대가 끝난 349년에 태어났다. 홀로 된 어머니의 깊은 신앙 아래서 자란 그는 지식과 교양의 중심지 안티오키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지식인의 유행은 수도원에 한동안 들어가 호젓한 생활을 즐기며 겸양과 교양을 젠체하는 것이었다. 요한도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 생활과 공부를 자처하여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고 오히려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요한은 성 바실(330-373년)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사제 서품받기를 주저하는 이유를 나누었다. 사제직에 관한 그의 고민과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칭찬을 즐기지 않으며 자신의 성취[사제직]를 바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칭찬을 즐긴다면 그는 받기 원할 것이고, 그가 받기 원한다면, 나중에는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요한은 이런 고민을 안고서 뒤늦게 사제가 됐다. 이후 그는 뛰어난 설교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모스)이라고 불렀다. 그의 설교는 지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당시에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이 유행하여 성서의 가르침을 자기 멋대로 내면화하고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은 성서와 복음이 던지는 도전을 생활의 근거와 명석한 논리, 그리고 뛰어난 연설 기법에 담아냈다. 그의 설교에는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를 지켜내야 할 신앙인의 책임이 반복됐다. 마르고 작은 키, 큰 머리에 움푹 패인 눈을 한 그가 외칠 때 사람들은 예언자를 떠올렸다.

예언자 같은 주교가 쉽지 않지만, 그는 주교가 됐다. 398년, 군인들이 그를 납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주교로 성품한 것이다. 정치 관료들이 꾸민 이 일을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주교로서 전례 개혁에 공을 들였다. 그의 성찬기도를 근거로 한 ‘요한 크리스소톰의 전례’는 지금도 동방 전례의 표준으로 쓰인다.

그는 당시 주교들과는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멀리하고 정치인들과 벌이는 사교 모임에도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처세술이 부족하다고 동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고 그의 솔직한 설교와 의견으로 적도 많이 생겼다. 이미 만연한 성직매매, 신자와 성직자 모두 연루된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 수많은 신자, 성직자 가운데 구원받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천 명 가운데 백 명도 안 될 겁니다.” 그는 황실의 향락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떠나 407년 9월 14일 흑해의 동부 해안 코마나에서 이생의 죽음을 맞았다.

438년 1월 28일,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서방교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9월 14일에 축일을 지키다가, 7세기에 십자가 축일이 지정되자 13일로 옮겨 지킨다. 동방교회는 그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날을 축일로 지킨다. 그는 이 생의 유배를 신앙의 순례로 삼아, 죽은 후에도 여러 곳을 옮기며 교회 신앙의 가르침과 본을 보여 주었다. 성인을 ‘교부’라 칭하는 이유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9월 8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