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Sunday, March 8th, 2015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출애 20:1~17, 요한 2:13~22)1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출애 20:2).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험하는 하느님께는 늘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붙은 이름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람과 깊은 인연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서 사람 일에 관여하고 관계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입니다. 이 역사와 사람에 관여하며 올바르게 관계하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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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본문인 십계명의 내용과 구조가 이채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을 일으킨 하느님을 확인한 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질서와 명령이 뒤따릅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편의와 계산에 따라 사람이 멋대로 정한 ‘다른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1계). ‘우상’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가치와 무게를 두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계).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멋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3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뒤 여섯 계명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질서,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깊이 존중합니다. 부모공경(5계)과 더불어 생명파괴와 사랑의 신뢰 관계를 배신하지 않고(6계, 7계), 부당한 재물 수익(8계)과 모함(9계)을 생활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소유의 탐욕을 향한 경고(10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런 욕심으로 숱하게 깨지는 인간사를 볼 때 마음 깊이 새길 계명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 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고 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하느님이라는 첫 시작의 표현과도 맞닿습니다. 쉬지 못하고 강요된 일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어 쉬게 하십니다. 네 번째 계명은 쉼을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습니다. 노예를 탈출시켜 쉼을 마련해 준 일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멈추어 쉬지 않으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귀 기울일 시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쉼’의 공간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여유를 다시 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물론이려니와 부모형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녀도 올바로 살필 수 없습니다.

쉼과 거룩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생각을 하느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놓고 쉬는 일이 거룩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쉼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고 마음의 불안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삶이 어려워집니다. 멈추고 쉬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은 이웃을 느린 시선으로 살피지 않으면, 우리 삶은 건강하거나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노여운 것은 떼어놓고 멈추어 기도하는 공간과 시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분주함과 손익계산이 신앙인을 옥죄면 복음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해 개인의 축복(‘유대인의 기적’)과 합리적 처세술(‘그리스인의 지혜’)에만 골몰하면, 세상 사람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일’이라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멈추어 쉬면서 자신을 덜어내어 역사의 하느님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마음과 생활을 따로 떼어 역사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세상의 생명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가 다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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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8일치 – 수정(↩)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Sunday, February 22nd, 2015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마르 1:9~15)1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선언과 함께 이마에 재를 받으며 사순절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절기는 40일 동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인생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성찰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신앙을 되새기며 걷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경험, 갈릴래아 선교는 사순절 여정의 흐름과 본뜻을 알려주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에 초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는 과거를 씻어내고 청산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아울러 세례의 좀 더 깊은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세워주신다는 은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굳게 닫혀 무서울 것 같은 하늘을 ‘가르고’ 비둘기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려왔다는 장면의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은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성공과 성취, 안녕을 보장하리라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례의 성령은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를 힘겨워 흔들리기 쉬운 광야로 이끌어갑니다. 그 광야는 무서워 피하고 싶은 곳이며, 외롭고 갖은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세례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은 축복의 보장이 아니라 여전히 광야 경험의 연속이기 일쑤입니다.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실까요?

광야는 우리가 저마다 지닌 내면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이를 보듬어 다스리지 않고서는 우리 신앙의 도약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온갖 어둠과 두려움, 여러 유혹이 넘실대는 광야의 추운 어둠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그 눈물은 이제 우리 마음의 어지러운 눈을 씻어내는 세례의 물이 되어 세상을 새롭고 청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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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둠은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세상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대면하고 만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고통과 어려움의 눈물을 흘려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요, 그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서로 발견하며 연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겪는 광야 경험은 수고스럽고 고통스럽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얻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전도와 선교도 어둡고 추운 광야에서 흘린 눈물 머금은 시선과 용기에서 비롯합니다. 아름다운 친구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순간에 등장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외침과 고난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는 유혹과 위협이 계속되는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의 선교를 감당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와 광야와 전도가 이어지는 장면은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먼저 이루고 알려주는 듯합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광야의 눈물과 용기와 연대로 이제 부활을 향한 발걸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순절 신앙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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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22일치 – 수정(↩)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Sunday, February 15th, 2015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마르 1:40~45)1

오늘 구약성서와 복음서 본문에 나온 ‘나병’의 실체가 현대인이 아는 ‘한센병’과 같은 병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이 불편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한 피부병이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한센병이든 심한 피부병이든 이런 병을 매우 무서워하며 그런 병자를 차별하고 모욕했던 역사와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삶을 더욱 비참하게 했던 병을 두려움과 차별의 눈으로 ‘하늘의 형벌’[天刑]이라 부르며 그 병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과 수도자, 성직자가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과 그의 동료 수녀님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한국 성공회도 일찍이 남양주 마석에 한센병 음성인의 마을인 ‘성생원’을 마련하여 이분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고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차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삶이 신앙인 것을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신앙인의 삶과 증언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닮아가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나병 환자’의 고통과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마르코 복음서의 호흡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만큼은 느리고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옮을까 무서워 손대기 주저하는 병든 몸에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갖다 대시며’ 치유하신 행동을 기술합니다. 마음의 측은함과 두려움을 넘는 몸의 친밀하고 세심한 행동이 함께 어우러져 치유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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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치유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치유는 한 사람이 사회에서 처한 지위와 현실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정결법’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던 사람의 지위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라고 하신 까닭입니다. 한 사람의 치유는 몸과 마음, 공동체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여러 사회 정치 문제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면모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치유를 위한 측은지심과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한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우리 신앙인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주시는 깊은 당부처럼, 신앙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우리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후기: 이 짧은 글을 쓰며, 나는 한하운 시인(1920~1975)의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1949년)을 떠올렸다. ‘전라도’와 ‘소록도’가 우리 사회에 대물림되는 고정관념과 차별의 행태 속에서 포개졌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나병 걸린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도 겹쳤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나아만 장군이 같은 병으로 절망하는 순간,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의 노획물(패배자)인 유대인 ‘몸종’(노예) ‘소녀’(여성)로 바뀐다. 예언자 엘리사의 명령에 거만한 나아만이 여전히 권력의 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할 때, 그를 설득하는 이들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었다.

이 역설과 전복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에 면면히 흐른다. 하느님 나라는 이 전통을 사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와 ‘소록도’가 상징하는 역사와 기억의 실체 안에서 이 신앙의 역설을 알아내고 삶의 전복을 마련하며 남은 발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문화와 사회는 먼 일이 된다.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15일치 –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