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 거룩한 삶의 찬미

Sunday, July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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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 거룩한 삶의 찬미 (루가 11:1~13)

왜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기도로 무엇을 얻는가?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은 기도를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보는가 하면, 여느 종교의 표현을 따라 ‘치성’을 드리는 일로 이해하곤 합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 본문 후반에 나온 비유 이야기를 근거로, ‘하느님께 떼쓰고 귀찮게 매달려서 소원을 이루는 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혹시 성과가 없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돌리기도 합니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세상에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고, 사람마다 서로 다른 소원이 충돌하여, 기도는 사회 혼란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이런 문제점을 제자들도 아는지라, 기도를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새롭고 낯선 기도입니다. 그동안 다른 종교들과 선생들이 가르치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 제자들과 신앙의 선배와 더불어 우리는 이 기도에 담긴 새로운 뜻을 되새기고, 우리 기도 생활의 틀로 삼아 모든 공동의 전례와 개인 기도에서 되풀이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한 마디 한 마디는 우리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어머니”라도 해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철학에서 말하는 ‘신’도 아니요, 능력의 해결사도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님’이며 우리 삶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우리말 쓰임새처럼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지, 개인이 독차지하는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서로 모두 형제자매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우리 생명을 낳으시고 보살피고 키워주시는 부모님 아래서 형제자매인 우리가 함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의 삶으로 그 거룩함이 드러납니다. 본래 거룩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말하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서 그분이 거룩해지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깨지지 않은 온전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창조대로 우리 삶을 바르고 온전하게 가꾸고 서로 보살피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바로 이 온전한 삶의 관계를 하느님의 자녀인 형제자매가 함께 누리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우리 삶과 세상에서 펼치게 하는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상은 가난을 함께 물리치고 서로 용서하며, 이기심의 유혹을 이겨나가는 삶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닿아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 삶을 파괴하는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이겨나가는 힘입니다. 이 마음의 힘으로만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으며, 자기 중심주의의 유혹이 만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라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조건을 머리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새로운 기도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은 자주 눈앞의 이익과 이기심으로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생명의 근원인 한 하느님 아래 형제자매가 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를 살겠다고 다짐할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삶의 찬미이며, 용서받고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게 누리는 행동 지침입니다.

신앙인 – 낯선 자의 이웃

Sunday, July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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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 낯선 자의 이웃 (루가 10:25~37)

“그들을 다 불살라 버릴까요?” 몇 주 전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동네에서 냉대를 받자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거절당했다 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 해서, 어느 집단을 멸절하는 일은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사람의 선입견과 종교적인 우월감은 편견과 단견으로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은 진실의 큰 바다에 자신을 열어 놓고, 필요한 때에는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행동합니다.

종교의 율법과 세상의 법률은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질서는 사람살이의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만든 보호장치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못된 몇몇 율법학자나, 세상 뉴스에 오르내리는 몇몇 탐욕스러운 법률가들과는 달리, 오늘 예수님께서 만난 ‘율법 교사’는 매우 정직합니다. ‘율법’의 근거에 충실하고, 사건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논리를 귀담아듣고, 바른 결론으로 응답합니다. 여기에 편견이나 억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심하게 다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사제와 레위 사람은 본 척도 안 하고 피해갔지만, 더러운 이방인이라고 차별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도왔습니다. 직책이 보여주듯이, 사제와 레위 사람은 종교와 관련된 일을 합니다. 종교는 법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명, 특히 ‘영원한 생명’의 일에 관여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의 영원한 생명’과 ‘현실의 사람 생명’을 서로 연결하지 않고 분리하여 취급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바쁜 발걸음은 쓰러져 아파하는 이웃을 살펴볼 눈길을 막아버리곤 합니다.

이때, 하느님은 누구나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사람의 지위와 직책, 출신과 재산을 넘어섭니다. 뜻밖의 낯선 사람, 오히려 편견의 대상이었던 사람 안에서 펼쳐지기도 합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 이름에서 이미 관습과 기득권이 물씬 풍기지만,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이름도 직책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종교와 교리, 사회와 통념으로 나누거나 판단할 수 없는 낯선 사람입니다.

오직 측은지심의 눈길과 손길만이 세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이어줍니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의 탕자를 품는 아버지의 손길, 배고픈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셨던 예수님의 눈길은 이름 없는 이들에게 배불리 먹고도 넘치는 잔치를 베풉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귀한 포도주로 쓰러진 사람의 통증을 완화하고 소독한 뒤, 비싼 기름을 발라 상처의 감염을 막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온전히 회복하려고 돈 드는 사후조처까지 마련합니다. 이 모든 자비의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손길을 타고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으로 겹칩니다. 측은지심의 시선과 행동이 하느님의 구원 행동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이 구원 행동을 몸소 펼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곳곳에서 쓰러진 이들을 깊은 연민으로 보살피는 낯설고 약한 이들의 이웃입니다.

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Sunday, July 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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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루가 10:1~11, 16~20)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이리 떼를 어린 양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구나.” 오늘 복음 말씀을 뒤틀어, 어느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 졸업식 강론에서 던지신 우스개였다고 합니다. ‘사목 현장에 나가는 이들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이렇게 자존감을 내리누르는 말이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성도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종교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이 우려와 경고가 실제로 이곳저곳에서 한탄이 되어 되돌아오는 일이 숱합니다. ‘지갑과 카드, 자동차와 인맥’을 우선순위로 두는 삶에서 벗어나, 신앙인이 먼저 찾아야 할 가치와 멈추지 말아야 할 길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길을 함께 걷겠다는 동행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쁜 발걸음으로 여행하시는 까닭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받거나 대접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사랑과 배려에 젖은 ‘옛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낯선 타인을 향해 베푸는 사랑과 배려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를 세우시려는 뜻입니다. 이 여정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두 초대하셔서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의 삶에 동행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새 예루살렘’을 우리 삶에 매일 짓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삶을 새롭고 낯선 곳에서 펼쳐나가라는 파송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수동적 환대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 환대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손님이 되어주라는 당부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안에서만 낯익고 평화로운 관습에서 벗어나, 낯설고 불안정한 삶의 처지를 돌아보며 몸소 겪습니다. 모자라고 빈궁한 처지가 되어 환대의 기쁨이 무엇인지 스스로 새롭게 경험합니다. 아울러, 낯선 이를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는 문화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누신 사랑과 용서의 환대를 가르칩니다.

이 동행과 파송의 신앙은 갈등하고 불화하는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실천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힘 있는 편에만 머물면, 힘없고 약한 사람의 아픔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익에 군침을 흘리는 ‘이리 떼’의 문화에 젖어들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걷는 길마다, 머무는 곳마다 화해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이 뒤틀린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간 동료인 ‘어린 양들’이 아파하는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여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입니다.

자기 이익과 안위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는 인간과 그 시대는 불안합니다. 삶의 외면 조건이 나아지는데도 인간의 내면이 더 힘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너나없이 ‘이리 떼’가 되면 갈등과 상처는 깊어집니다. 오직 평화와 치유를 선물하시려는 예수님의 길에 동행하고 파송 받는 신앙만이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이것이 ‘사탄을 이기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기록된 사람’으로 생활하는 기쁨입니다. 이제 복음 말씀을 다시 세워야겠습니다.

“내가 힘없는 어린 양인 너희를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낸다. 그러나 내가 동행할 터이니, 힘을 내어라. 가서 환대하고 평화를 세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