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며 대화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Wednesday, January 28th, 2015

히브 10:11~18 / 시편 110:1~4 / 마르 4:1~2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2015년 1월 2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있고 입장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이미 있거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왜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이 생기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의문과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또는 더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궁색한 대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은 답이라기보다는 당장 겪는 시련과 고통에 어떤 위안을 주고 진정 효과를 내려는 진통제와 같은 위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가 치료 약은 아니라면서 처방조차 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문제의 원인과 답을 계속 찾고 그 치료책은 찾아야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을 살필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여러 종교가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종교의 유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여전히 중요한 일은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우리 삶을 멈추지 않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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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늘 복음 말씀은 매일 아침 성찬례에 참여하시는 열심을 지닌 신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태도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와 그 비유에 관한 풀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아 놓고 전하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왔다가 곧바로 말라 죽었고,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자고 씨를 뿌렸는데,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잃어버리는 씨도 많고 실패도 거듭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과 선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작으나마 좋은 땅에서 자라나 잃어버린 다른 씨앗을 보상하고도 남을 수확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 넘쳐나는 수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이제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기 하지 않겠다는 희망이 간절합니다.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겠다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 절망 끝에 나오는 희망의 수확으로 자기만 먹고살지 않고, 풍족하게 나누며 살겠다는 꿈이 다부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많은 분은 어쩌면 원래 비유 이야기인 첫째 부분보다, 하나의 해석인 둘째 부분에 더 익숙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풀어주신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 풀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쓴 마르코와 그 동료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전도와 선교활동의 어려움을 되새기면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땅의 여러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뜻을 붙여 풀어내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의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씨는 복음이고, 여러 가지 조건의 땅은 사람들의 신앙 태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신자가 되었지만 박해나 고생이 생길라치면 곧바로 포기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되 현실의 여러 걱정거리와 재물 욕심과 유혹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듬고 굳세게 하여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태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의 원뜻을 늘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온갖 고생과 절망의 상황이 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희망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확으로 많은 사람을 풍족히 먹이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꿈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뜻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지, 흔들리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해야 어려움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처지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다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일을 통해서 신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고 되돌아보게 하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바로 그런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특히 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가장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12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성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널리 퍼져나가던 설교 수도회 도미니코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머리를 흉하게 깎고 절제와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절제로 바로잡아 기운을 비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했습니다.

귀족이었던 가족은 토마스 수사를 잡아다가 집에 가둬놓고 수도회 생활 포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감옥을 탈출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쾰른과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를 넘나드는 굴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가 없는 교회는 그 기초가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부패와 타락이 스며듭니다. 토마스는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를 시기하며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러 번 교회 당국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당호하고 보호하며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토마스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제대로 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하며,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환히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축일은 성인 태어난 날도 아니요, 세상을 떠난 날도 아닙니다. 바로 <신학대전>이 처음 출간된 날입니다.

서방 교회 신학 전체를 주름잡던 그는 실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묻습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 토마스는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해 교회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뤄낸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교회 공의회에 참여하는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가 경험한 신비 체험을 적었습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이 쓴 것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맛보겠지요. 신앙이 흔들릴 일도 많고, 유혹과 시련이 많겠지요. 그때마다 새롭게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합니다. 온갖 시련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은 끝내 결실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여 반성하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쇄신해 나가는 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영급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감하게 자신 전체를 던지며 살아가다가, 삶 한가운데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수고를 잠시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의 말을 잘 따랐다. 너의 삶으로 나에 관해서 참 잘 썼다.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아무도 우리는 토마스 성인을 따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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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Crivelli, 토마스 아퀴나스, 15세기)

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Saturday,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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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 –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Sunday, October 5th, 2014

출애 20:1~4,7~20 / 시편 19 / 필립 3:4b~14 / 마태 21:33~46
2014년 10월 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해가 짧아지고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이 선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시간을 저마다 달리하여 꽃피우는 시간을 걷습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을 걷기도 하고, 열매가 여무는 장년의 시간을 보내기끝도 하며, 그 열매의 쓴맛과 단맛을 느끼는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무는 해의 아름다운 빛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황혼을 비추기도 합니다. 이 세월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이겨내서 여기까지 온 분도 계시고,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민을 안고 교차하며 걷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걸음걸이가 어떤 것이든, 성서는 우리가 걷는 모든 행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처럼, 그 나라는 쉬지 않고 달음질쳐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잘 따라서 약속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분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당연한 확신은 이제 예수님 때문에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도덕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성서를 정직하게 읽으려는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다른 비유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와 많은 설교자는 이 비유에 누군가를 하나씩 대입하면서 해석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소작인들은 유대인이며, 주인이 보낸 종들은 예언자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때에 이르러 유대인들을 버리고 도조를 잘 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소작인이니 주인에게 도조를 잘 내는 사람이 되자는 말로 설교의 교훈이 끝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세월이 흐르면서 엉뚱하게 적용되곤 했습니다. 이 대입법에 따르다 보니, 소작인인 유대인들은 주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교회는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들씌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주의, 유대인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1900여 년 동안 발전한 이 반유대주의 결과는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가 벌인 유대인 학살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겪었던 현대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서,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사람을 내쫓고 장벽을 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향해 총을 쏘고 민간인들에게도 폭탄을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복수를 하는 형국입니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성서 이야기에 누구를 끼워 넣어서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비난하는 일에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의 뜻과 이후의 역사에 비추어서 다시 봐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비유를 교리에 따라 대입하지 말고 좀 더 확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넓이를 조금이라도 헤아리면서 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이요, 우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어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탱탱한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널리 선사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입니다. 이 포도원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포도원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이를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며 누리려던 포도원이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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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손쉬운 대입법을 피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 안에 의식 무의식으로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춰봐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치고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여기서 영성이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그 신앙과 영적인 식별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이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지난 9월 30일 뉴욕 타임스에 쓴 칼럼을 나누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들”(Our Invisible Rich)입니다. 핵심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시민들에게 주요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일반 노동자보다 얼마나 높은지를 물어보는 설문 조사를 한 적 있다. 미국 응답자는 대체로 대기업 임원이 그 회사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더 많이 벌 거로 추정했다. 이런 추측은 1960년대에는 대략 실제 현실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격차는 급증해서 오늘날 고위 임원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회사 평균 노동자의 300배 정도이다. 40년 전인 1975년 미국 상위 1% 부자가 미국 전체 자산 총합의 2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40%로 늘었다. 그리고 이 늘어난 자산 대부분은 상위 0.1%에게 돌아갔다. 미국인은 우리 세상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벌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며, 부의 집중도를 과소평가한다.”

경제학자만이 세계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구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성직자들이 가장 영향을 받은 구약학자로 입을 모으는 월터 브루그만 교수는 최근 행한 “구약과 설교”라는 강연에서 현 세계를 이렇게 통렬하게 진단했습니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전체주의 안에서 살아간다. 특히 내가 사는 미국은 시장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군사적인 힘을 동원하여, 자신들만 예외적으로 세계를 지키는 경찰이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화를 가장하여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화와 전체주의는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대에 선 설교자는 이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언자의 외침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회중석에 앉은 신자들은 이 현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안녕은 예언자적 설교와 건강한 신앙에 서야 한다. 이것이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지탱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뛰어난 경제학자와 원숙한 신학자가 지적하는 세계의 경제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곧바로 배척과 폭력, 살인과 전쟁이라는 세계 정치의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사회이고,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염두에 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에덴동산인 포도원을 생명의 기쁨을 선사하는 포도원으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세계의 여러 개신교회는 이번 주일을 세계 성찬례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킵니다. 우리 성공회와는 달리, 성찬례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개신교계에서 이 날만이라도 성찬례를 지켜보자는 생각에서 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찬을 나누는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동등하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나누면서 한 식구가 되는 세계 공동체인 것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소유만을 늘리려다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경제와 정치 질서에 대항하여, 작고 부족한 한 몸, 한 잔을 함께 나누는 일로 일치하자는 깊은 소망입니다.

얼마 전 은퇴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은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합니다. 대신 우리는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화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간 교회로 모여 복음을 읽고, 우리 삶을 봉헌하여 변화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창조 세상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이 안에서 참된 소작인의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작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려다가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소작인의 포도원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을 서로 받아들여 서로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서로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길입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우리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맛보는 성찬의 잔치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