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 – 생명의 상승과 확장

Friday, May 15th, 2015

승천 – 생명의 상승과 확장 (루가 24:44~5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승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입니다. 그러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오해하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행동이 엇나갈뿐더러,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롱받기에 십상입니다.

승천은 한 처음 천지창조로 펼쳐진 하느님의 활동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면서 일어난 신앙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면,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승천은 인간의 잘못으로 부서져 내려앉은 창조세계가 새롭게 회복되어 상승하고 확장하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님 한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우리 모든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에 일어났으며 계속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참 좋다’고 하신 창조세계가 인간의 욕심과 교만으로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예언자들을 당신의 손길로 쓰시며 갈라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세계를 끌어안아 올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 세계의 침울한 운명이 드러났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 세계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부활로 새로운 삶이 펼쳐졌으니 이를 즐기면 그만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창조세계의 주인공이 우리 인간이기를 바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저 바라보며 기대는 일만으로 우리는 참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명령하는 주인과 굽신거리는 종의 관계는 참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 몸으로 살 때라야 우리는 동등한 제자, 하느님과 벗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손쉽게 기대지 말고 우리가 함께 모여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죽음의 현장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와 도망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대로 그 현장에서 ‘서로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되풀이하여 보여주신 사랑의 본질입니다. 제자인 우리 또한 함께 서로 머물러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야 합니다. 이는 침몰하는 배 안에 ‘가만있으라’는 거짓된 약속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상처 입은 삶을 서로 초대하며 보살피는 일에, 서로 생명을 되살려 회복하고 확장하는 일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오월에 담긴 상처와 희생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하느님의 사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사명이 남았습니다. 승천이라는 작별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채워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보지 않고, 우리 주위에서 사람을 모아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땅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오르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리어 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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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17일치 주보(↩)

기름과 눈물의 환시 –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

Wednesday, May 6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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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1:5~10 / 시편 92 / 마태 20:20~23
2015년 5월 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오늘을 생소한 설명이 붙은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로 지킵니다. 이 축일 이름만으로는 오늘 축일을 오해하거나 혼동하기 쉽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사도 요한 성인은 12월 27일에 기념하는 복음사가 사도 요한 성인과 같은 분입니다. 교회력에는 한 성인의 축일이 여럿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물론이려니와 세례자 요한 성인이나 바울로 성인이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특별한 신앙의 사건이 있을 때, 그에 얽힌 성인의 신앙을 기념하려는 뜻입니다.

“라틴 문 앞”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는 로마 제국의 관문인 로마 입구 “라틴 문”(Porta Latina)이라 부르던 성문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름이 끓는 가마가 있었고, 거기에 요한 성인을 넣어 죽이려는 참이었습니다. 결국, 군인들은 성 요한을 기름이 끓는 가마에 집어 넣고, 끓는 기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어 성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성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은 전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려고, 오늘 성인의 축일이 한 번 더 마련됐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라틴 문 앞에서 고난받은 사도 요한 축일’이라고 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앙인들은 그가 유배지인 파트모스 섬에 갇혔고, 거기서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요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도 요한은 성서에 등장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과 전설이 혼합하여 생겼습니다.

요한은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첫 제자단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어떤 교부는 요한복음서를 쓴 사람이 바로 이 요한 사도라고 했고,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바로 이 요한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분이 요한 복음서를 썼고, 내친김에 요한 1서와 2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도 합니다.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입니다만, 이런 주장의 객관적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이름을 통해서 여러 사건과 의미를 손쉽게 하나로 엮어 보려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뜻이 중요합니다.

후대의 교부들이나 신앙인들이 요한 성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성서에 나온 이야기와 교부들이 전해준 전설을 통해서 요한 사도의 삶을 우리 신앙의 태도에 비추어 볼 뿐입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부름 받은 요한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며, 2천 년 후 똑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을 되새겨 봅니다.

첫 단계 –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던 어부였습니다. 못 배우고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던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제자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일으켜 세우실 때, 요한은 다른 두 명의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빛을 내며 변화한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게쎄마네 동산에서 괴로운 기도를 하실 때 함께 기도해 달라고 초대받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핵심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매일 아침 성찬례와 나오시는 여러분이나, 우리 교회를 이끄는 여러 지도자처럼 중요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단계 – 요한은 이처럼 제자단의 핵심적인 위치를 지니고 권력과 자리를 바라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보듯이, 어머니까지 나서서 요한에게 한 몫을 떼어달라고, 한자리 얻게 해달라고 부탁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나 이런 청탁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신앙의 내력과 친분이 있으니 이렇게 요구할 법합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핵심 제자였고, 이 교회를 오래 지켰고, 가문과 신앙의 내력이 길고 하니, 당연히 한자리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엿보입니다. 사람은 종종 이처럼 자기 신앙의 열심과 내력을 내세워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주장하고는 합니다.

이런 점에서라면 교회도 세속의 정치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자리싸움과 권력 싸움으로 진흙탕이 된 한국 교회의 추태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성공회는 여기서 자유로울까요? 신앙의 부르심은 순식간에 권력 추구와 다툼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첫 소명과 부르심을 늘 되새기면서 이러한 권력의 유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권력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낯두껍고 뻔뻔한 사람일 뿐입니다. “너희는 이 고통의 잔을 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실 때, 그 고통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 들 수 있습니다” 하며 대답했던 제자들의 뻔뻔함을 우리는 늘 되새겨야 합니다. 이처럼 권력을 바라고 자리를 얻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 우리 교회의 현실에 던지는 뜻은 무엇일까요?

세번 째 단계 – 어떤 변화의 사건을 통하여 요한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 성인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요한만은 성모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참혹한 현장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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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부활한 빈 무덤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렸습니다. 첫 부르심으로 핵심 제자단이 되어 으스대던 모습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 잘 되면 자리하나 주세요’ 하는 마음을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드러내던 그 뻔뻔함이 무엇인지 다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힘을 드러내는 기적의 현장에 등장해서 으스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실 고난의 깊이를 함께 느껴달라는 초대는 잊고, 잠에 빠져들어 자신이 권력을 갖는 꿈만 꾸었던 제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이가 힘을 보고 들떠서 몰려다닐 때가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도망쳤을 때, 그 고통을 목격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남몰래 홀로 감당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바로 여기서 ‘라틴 문’ 앞 끓는 기름 솥에서도 살아난 기적 이야기의 뜻이 풀립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요한을 죽이려고 끓는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그 기름은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성령의 기름, 작은 그리스도로 새롭게 부음 받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를 죽이는 기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해 진리를 들고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를 갖게 하는 기름이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요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핵심 제자단이라는 서열의식과 대대로 신앙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때, 두려워서 모두 도망친 십자가 밑에서 가녀리게 떨며 우는 여인들을 내 어머니, 내 형제자매로 삼아 보살필 때, 요한 성인은 다시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져 빈 무덤만 남았을 때 요한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자신 안에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있듯이, 예수님 안에 제자 요한이, 요한 안에 예수님이 이미 자리하여 살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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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몸에 모셨던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혔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환시(幻視)마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갇혀 있었기에 요한이 지닌 상상력은 사람을 옭아매는 현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억압의 현실을 넘어서는 신앙의 희망을 더욱 깊이 갈망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은 환시 속에서 현실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무서운 힘과 권력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요한은 새로운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괴롭히고 짓밟은 힘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과 계획 안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깊은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의 자리나 힘도, 작은 사람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눈물과 함께하며 이 슬픔을 보살피는 일에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나누시려는 잔은 바로 이러한 슬픔과 눈물의 잔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의 권위와 자리를 포기하고서 그 눈물의 잔을 진실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겠지요?

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

Saturday, April 4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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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 성공회신학 / 서울 주교좌 성당)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요한의 이 아름다운 환시는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인 구원 사건을 축하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라면 성목요일의 세족례와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 사건, 성토요일의 무덤의 침묵, 마침내 부활밤의 부활사건을 연이어 통째로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 거룩한 삼일 동안 인간의 새 창조와 구원이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부활 전례의 핵심입니다. 모든 주일은 부활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주 매시간 부활한 생명으로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천지 창조는 ‘보시기에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점에서 창조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첫 성사입니다. 그러나 인간 아담은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을 잃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와 인간이 서로 누리는 관계도 뒤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처럼 ‘깨진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상태를 ‘죄’라고 부릅니다.

죄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신 하느님께서는 몸소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산고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배를 찢는 아픔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열었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과정에 담긴 사랑과 아픔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일이 바로 전례의 기본입니다. 성삼일은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성 목요일은 새로운 “명령”의 시간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며 세상 안에서, 특히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모본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동안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던 모든 음식 기적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참 생명을 살아갈 인간의 음식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먹을 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주는 공포는 사람의 호흡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간을 멈추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무죄한 고난과 죽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한, 역사는 더 진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힘은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장엄기도’를 드리는 까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연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 토요일은 예수님의 부재로 어두운 침묵이 이어지는 고독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서는 이 무덤 속 어둠의 시간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펼치셨다고 증언합니다. 삶의 어둠과 고독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세운 성안에 갇혀 지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그 어둠 속에서 발견하여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때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부활밤은 새로운 창조가 열리는 시간입니다. ‘새불 축복식’은 어둠의 과거를 살라버리는 놀라운 힘과 더불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고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빛을 선사합니다. 이 불의 연단을 넘어선 우리는 새롭게 구워져서 아름답게 빛나는 도자기와 같습니다. 이 불은 우리 신앙의 열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뜨거움으로 하느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모든 힘에 도전하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삽니다. 부활 오십일 째 되는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교회야말로 부활의 몸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점을 간과하면 ‘몸의 부활’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교회와 신학, 신앙마저도 뒤틀리기 쉽습니다.

부활 성삼일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 응축된 시간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따르는 우리는 작은 부활일인 주일 성찬례를 계속 거행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며 그 몸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합니다. 이 만남과 경험과 참여의 성찬례가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이때라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그 부활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1. 성공회 신문 2015년 4월 4일치 부활절 특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