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두려움 없는 의문과 대화의 길

Sunday, April 29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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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두려움 없는 의문과 대화의 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주일 낮 어느 골방 풍경 – 신앙 즉문즉답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시간입니다. 방금 드린 낯선 예배에 관한 궁금증이든, 종종 낯설고 기이한 교회라 불리는 성공회와 평소에 품었던 교리 문제이든, 아니면 요즘 돌아가는 사회와 정치 문제이든 함께 도전하며 머리 맞대고 정직하게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성찬례가 끝나면 어김없이 자유로운 질문과 답변의 시간이 열립니다. 스무 분이 넘게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 층 골방에 모입니다. 처음 방문한 이든 새로운 교회를 찾아 헤매든 이든 오래 출석하는 이든 누구나 환영합니다.

수년 전에 시작한 ‘신앙 즉문즉답’ 시간은 머뭇거리는 입가에 담은 웃음으로 신앙의 질문을 엽니다. 즉문즉답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변은 없습니다. 아니, 질문 없는 답변이나 가르침은 무기력합니다. 의심이 없으면 믿음은 없습니다. 아니, 의심 없는 믿음과 확신은 위험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일에서 신앙이 시작된다는 말은 뻔뻔한 으름장일 뿐입니다. 따지지 말고 그냥 따라야 길이 열린다는 말은 낯 두꺼운 사기입니다. 으름장과 사기가 종교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가르침과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신뢰는 길을 잃습니다. 길 잃은 사람이 많으면 이들을 유혹하는 거짓 술사들이 더 판을 칩니다. 이 악순환을 멈추는 방법은 정직하게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일입니다. 문답은 신앙의 길에 동행하는 첫걸음입니다.

# 교리문답 – 신앙의 산파술

질문과 답변의 대화법은 역사가 깁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법, 혹은 문답법으로 제자들을 자극하여 좀 더 정교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르쳤습니다. 그 탓에 스승이 먼저 질문을 던져 생각을 자극하고 대화를 이어가곤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선불교 전통은 화두를 던져서 깨달음을 향한 길을 탐구하게 했습니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뻔한 대답이라도 할라치면 방망이로 맞는 일이 잦았다고 전합니다. 문답은 진리를 찾는 길에서 늘 새로운 생각과 배움을 주고는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이런 문답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요약하여 가르치는 일에서 문답이 많이 쓰였습니다. 대체로 세례성사나 견진성사를 준비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려는 이들의 필수 코스였습니다. 조금 다른 점도 눈에 띕니다. 질문하고 답변하는 사람이 선생과 학생으로 굳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학생의 질문에 선생의 답변이 있을 수 있고, 선생의 질문에 학생이 답변할 수 있습니다. 대화로 배우는 일이 신앙 교육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대화 없이는 바른 신앙을 배우거나 따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회의 핵심 전통입니다.

종종 이런 대화의 신앙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가르침의 수단인 교리가 목적이 된 탓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시대와 문화 안에서 소통하여 설득하고 전달하려고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늘 변하고 발전해야 하는 교리가 변하지 않는 진리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이때마다 반성과 개혁이 뒤따랐습니다. 서방교회 종교개혁 기에 교파마다 앞다퉈 ‘교리문답서’ catechism 를 내놓은 이유입니다. 뒤틀리고 오해한 교리를 바로잡고 간략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고백과 교회의 신앙을 정리하여 증언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역시 금과옥조 변치 않는 자기 교단의 정체성이 되어 굳을 대로 굳기를 거듭했습니다. 다행히 교리의 한계를 아는 신앙인들과 교회들은 이를 거듭 개정하여 펴내고 새로운 시대에 신앙의 고민을 두고 씨름했습니다. 대한성공회 <기도서> 2004년 판에 새롭게 수록된 <신앙의 개요>가 그 한 사례입니다. 다만, 과거처럼 ‘정답’을 주지 않고 ‘답변’을 두어 대화와 연구로 더 나아가도록 격려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질문과 답변 – 신앙의 메아리

흔히 ‘교리문답’으로 번역되는 말은 그리스어 ‘카테케인’ katēchein 에서 나왔습니다. ‘말로 소리를 내 가르친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메아리를 뜻하는 ‘에케’ ēchē 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실은 서로 메아리쳐 가르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로 신앙의 가르침은 전달되고 널리 울리며 멀리 메아리칩니다. 신앙은 이 메아리를 따라가며 그 부딪는 산과 벽, 집과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 책의 원래 부제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탐구’ Exploring Christian Faith 로 달았으니 참 잘한 일입니다.

신앙의 메아리가 시작되고 울려 퍼진 변화의 과정과 그에 얽힌 사건과 사람을 만나는 일로만 우리는 진리의 파편 하나를 겨우 손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잠시 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며 냄새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다양한 감각의 체험은 의문을 갖고 탐구의 여정을 떠나는 일로만 가능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성공회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을 함께 찾는 여정을 떠나보자고 초대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이 책 역시 ‘정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메아리를 듣고 느끼는 방법을 안내하여 ‘생각하는 신앙’을 훈련하고, 자기 밖의 이들에 관하여 ‘사려 깊은 신앙’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응원합니다.

# 성공회에 관한 평범한 질문과 위험한 답변

성공회는 한국 사회에서 작고 낯선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입니다. 작고 낯선 것을 매우 꺼리고 인색하게 대하는 우리 문화 안에서 ‘성공회에 관한 질문과 답변’은 얼핏 흥미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의 <신앙 즉문즉답>에서 답변하는 제 경험에 따르면, 질문하는 사람은 대체로 무의식의 복합감정 안에서 묻습니다. 한편에서는 질문 자체에 자신의 주장을 담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과 너무 달라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교회를 떠날 이유가 충분한 셈입니다. 한편,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처지도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한 근거와 설명의 도움을 받아서 기존의 생각에서 헤어나 새로운 탐험에 몸을 던져보겠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말합니다. “신앙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확신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하느님과 이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분투하며, 진리를 식별”하는 사람들입니다(46쪽).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태도, 특히 성공회 전통을 잘 설명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보면 인생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오히려 아름답고 복됩니다.

“우리는 심지어 견뎌내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할 때조차, 그 순간에도 하느님이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약속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확신이 흔들릴 때도 하느님께서 당신 품 안에 안아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47쪽).

이 아름다움을 축하하는 자세로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하고 곤란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려 합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성공회 신자가 될 수 있느냐?”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 “천국과 지옥은 있느냐? 있다면 어떤 곳이냐?” 이런 솔직한 질문에 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답변을 제공하려 합니다. 질문의 주제에 따라, 때로는 역사의 상황을, 때로는 최근 과학적 발견의 새로운 사실을, 때로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해석의 다양성과 주된 뜻을 풀어줍니다. 그 답변은 ‘이렇게 말해도 될까?’ 하는 염려도 자아내지만 세심하고 논리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럽지 않으며 질문 자체를 비웃는 일도 없습니다.

종교 안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러 질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혼과 재혼 문제, 임신 중절 문제, 전쟁과 사회 참여에 관한 문제는 여느 종교와 사회 모두 씨름하고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한편, 성공회 신앙과 전통 자체에 관한 답변도 간명하게 제공합니다. 역사의 상황을 모르면 단견과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역사의 명암에서 자유로운 사회와 인간은 없습니다. 그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서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실존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성공회는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실존을 가장 정직하게 성찰하는 신앙 공동체라고 자부합니다.

실존적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선한 사람이 악으로 고통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47쪽). ’신정론’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에서 아직 선명한 대답을 내놓은 종교는 없습니다. 아니, 선명한 대답을 한다면 오히려 사기이거나 사이비 종교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공회의 저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 고통의 현실에 관하여 충분히 깊고 넓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빠른 답변에는 머뭇거려야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조심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새겨진 새로운 현실과 세계를 확인하고 바라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악과 고통을 허락하셨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비극과 요구에도 관여하셨고 온전히 참여하신다고 그리스도교인들은 믿습니다.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성 금요일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주일이 따라옵니다. 이로써 우리는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부활은 찾아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언제나 길은 있습니다”(49쪽).

한편으로는 현실의 변화가 없는 답답한 답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 안에서 서로 위로하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성공회 신자는 답변들 자체에 눈을 고정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하여 눈을 돌립니다. 그들과 함께합니다. 이야말로 위험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신적인 행동입니다.

# 기도서 – 예배가 신앙이다!

성공회는 교리서의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교회’입니다. 성공회는 고대 교회의 격언인 ‘기도의 법이 신학의 법’ lex orandi, lex credendi 이라는 신앙 전통에 굳게 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신자들이 함께 나누는 예배와 기도 경험을 신앙의 선언인 신학과 교리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논쟁 속에서 서로 배척하고 심지어 정죄하고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성공회는 이러한 극단의 역사를 겪으며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예배를 중심으로 주관적 감정으로 멋대로 흔들리는 신앙을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성공회는 ‘공동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 에 담긴 세심한 신학의 균형으로, 또한 전통과 현대가 어울려 만드는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 큰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공동체 기도와 예배에 관한 성공회의 강조는 또 다른 희망을 열어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려던 삶과 희망처럼, 교회는 세상 속에서 구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특히 전례 liturgy 는 교회가 가르치고 믿는 신앙의 내용, 곧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일상의 삶 속에서 훈련하고 실천하는 틀입니다. 공동체 전례 안에서 누리는 기억과 찬미와 감사와 나눔은 신앙인이 따를 ‘삶의 법’ lex vivendi 입니다. 공동체의 기도인 전례에 근거한 신앙의 이해와 삶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신앙인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그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계속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성서)과 교회의 가르침(교리)은 전례 속에서라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성공회 – 역사 안의 공동체

인간의 실존을 역사 안에서만 바로 이해할 수 있듯이, 성공회의 전통도 역사 안에서만 바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 성공회’의 저자가 ‘미국’ 성공회 신자를 독자로 생각하여 쓴 책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상황에서 조금 동떨어진 내용도 있습니다. 이 책의 우리말 편집인들과 감수인이 그 간격을 좁히려 저자들의 허락을 받아 여기저기 손을 대고 몇 부분은 수정하고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의 상황을 너무 일반화하면 성공회 전통에 오히려 어긋납니다. 성공회는 잉글랜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수단, 남아프리카, 콩고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 안에서 자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열매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어느 열매가 그릇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세계와 하느님의 생명을 어떻게 보살피며 지켜나가느냐에 자신을 맡기고 판단합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전통에 사로 잡히거나 전통을 쉽게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현대의 문화에 힘없이 유혹되거나, 무조건 반대하며 거절하지 않으려 합니다. 미국의 경험을 다 지우거나 크게 바꾸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황 안에서 성공회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가고 어떻게 변화를 마련했는지 우리 독자들이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역사와 현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순결한 교회를 이상화하고 실체 없는 교회를 공상하는 이단 종파들이 초기 그리스도교를 괴롭혔습니다. 교회를 ‘성사’sacrament 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교회를 구체적인 현실과 실체 안에 깃든 은총으로 이해할 때 교회와 신앙이 바로 섭니다. 성공회가 신앙과 권위의 식별 기준으로 닦아온 성서・전통・이성의 삼중 관계는 ‘성사인 교회’를 우리 삶과 역사 안에서 지탱하려는 노력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성’을 좁게 이해하여 과학 자체, 합리적 추론, 또는 개인의 자유로운 주장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이성 자체를 신앙의 대척점에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회의 이성은 교회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인 지성과 감성을 서로 신뢰하며 대화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안에서 역사와 삶을 더 깊고 균형 있게 이해하고, 현실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견디는 신앙의 힘입니다. 이점에서도 문답으로 대화하는 이성의 신앙은 개인이 정답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익혀서 역사와 현실 안에 있는 교회의 선을 함께 최대로 끌어올리려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건강한 신앙의 척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서로 정직하고 서로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려 깊은 성공회 신자들이면 늘 고백하듯이, 성공회의 길은 종종 힘들고 위태롭게 보입니다. 실제로 성공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분투, 힘든 신앙의 길이 그리스도교회을 지탱하고 더욱 건강하게 만듭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종교를 둘러보면 이러한 건강한 전통의 신앙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로

이 책은 굳이 요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은 짧고 분명하며, 답변은 사려 깊고 신중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차례를 펴서 자신이 궁금한 질문을 찾아 그 답변을 천천히 대화하듯 읽기 바랍니다. 혼자 읽어도 좋지만, 작은 모임에서 함께 나누면 그 대화와 배움이 더욱 커집니다. 이 책이 제시한 ‘생각해봅시다’하는 질문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질문을 만들어서 토론한다면, 독자가 이 책의 또 다른 저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제 다른 사람이 지시하거나 전달하기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 함께하는 공동체의 신앙이 출발합니다.

<신앙 즉문즉답>의 짧은 시간이 끝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성공회 신앙의 여정에 동행해서 기쁩니다. 환영합니다.”

  1. <질문과 답변 – 성공회 신앙 안내> Episcopal Questions, Episcopal Answers: Exploring Christian Faith (비아, 2018) 에 실린 해설 글이다. (↩)

[전례력 연재] 예복 유감 – 개성과 일치 사이에서

Saturday, April 2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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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복 유감 – 개성과 일치 사이에서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19세기 작가 스탕달의 <적과 흑>은 격변하던 사회의 권력 대결, 신분 상승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책 제목은 당시 사회 지배 세력의 복장 색깔이다. 적색은 귀족과 군인, 새로운 욕망과 열정의 상징이다. 흑색은 성직자, 오래된 절제와 지성의 상징이다. 이밖에도 더 많은 뜻이 숨어 있지만, 복장 색깔은 집단의 특성과 통일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교회는 좋지 못했던 시대를 걷어내고, 원래 좋은 뜻을 되살리는 일도 해야 한다. 전례 예복도 마찬가지다.

교회 전통은 색깔에 신앙의 의미를 담았다(본지 지난 호 ‘전례 색깔’ 글). 13세기에는 성직자의 평상복을 통일했다. 가난하고 혼란한 시대에 성직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알아보고 요청하라는 배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위와 권력을 겉으로 드러내는 용도로 더 쓰였다. 성직자 안에서도 색깔로 지위를 구별했고, 전례 안의 기능을 드러내는 뜻이 세상의 지위를 으스대는 계급장이 됐다. 이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은 전례복을 간소화하거나 없앴다. 그 후 천주교회도 성직자의 화려한 평상 옷차림을 금했다.

성공회는 오랜 전통을 되새겼다. 평상복은 사목 기능에, 예복은 전례에 충실하도록 했다. 성직자는 평상복인 검은 캐석을 입고, 사목 예식 때마다 그 위에 중백의를 덧입었다. 여기에 ‘말씀의 권위와 사목’을 강조하는 검은 스카프를 목에 걸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성공회 예복 착용이다. 19세기 말, 전통 회복 운동이 진행되면서 전례색에 따른 제의가 다시 도입됐고, 색깔 영대가 검은 스카프를 대체하며 정착했다. 세계성공회의 예복 착용은 16세기 직후 전통과 20세기에 널리 퍼진 복고 전통이 있다고 해도 좋다. 처음에는 두 전통이 강하게 대립했지만, 지금은 전례의 성격과 봉사의 임무에 따라 적절하게 섞어 사용한다. 성공회다운 해결이다.

대한성공회는 복고 운동의 영향이 깊지만, 두 전통을 잘 혼용했다. 성찬례에서는 제의를 입고, 그 외 사목예식이나 전례 참여에서는 캐석 중백의 영대를 입었다. 그런데 최근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천주교의 간편 예복이 성공회에도 파고들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캐석과 장백의를 합친 ‘캐석-앨브’라는 일체형 예복이 널리 퍼졌다. 모양으로는 장백의와 닮아서 그 위에 제의를 입기에도 좋다. 문제는 이러면서 성공회 전통의 ‘캐석과 중백의’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 아쉬운 점은 전례가 만드는 일치감과 미적인 전통의 상실이다. 전례 안에서 예복은 그 일관성으로 전례 공동체의 일치를 드러낸다. 그런데 다양한 디자인과 서로 다르게 보이는 백색의 색조, 입는 형태 등의 불일치가 눈에 더 띈다. 다양한 개성이라기보다는 어수선한 느낌이다. 성공회 전통의 캐석과 중백의가 보여주는 검소하고 단아한 아름다움과 일치감은 희미해졌다. 굳이 다양성을 강조하려면 영대에 표현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도 일관성과 절제미가 있어야 한다.

수정한 기도서의 전례 지침을 풀어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적용했으면 한다(괄호 안은 선택 사항).

* 성찬례 집전

1) 전통 적용: 캐석+장백의 (혹은 일체형 예복) +띠+영대+제의

2) 상황 적용: 일체형 예복 + (띠) + 영대 + (제의)

* 기타 성사 집전:

1) 전통 적용: 캐석+중백의+영대

2) 상황 적용: 일체형 예복 + 영대

* 성직자단 참여 전례와 성직자 순행: 캐석(흑) + 중백의 + 영대

  1. 성공회신문 2018년 4월 28일 치 (↩)

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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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아멘.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이 시간 이 공간에 당도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이고 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시작했던 길이었습니다. 극기와 절제, 기도와 봉사로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끝에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우리 발을 씻겨주시는 은총을 경험하고,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양식으로 베푸시는 마지막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셨던 한 청년이 정치와 종교 권력의 시기와 모함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장면을 멀리서,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때로는 비겁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절망 속에서 말입니다.

세상이 승리와 성공을 자축하며 자만감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의 영은 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해 침묵의 무덤에 갇힌 모든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성 토요일은 어두운 침묵과 희망 부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된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밤을 목격했던 세 여인처럼, 우리는 역사 안에서 부활을 새롭게 목격했던 성공회 신자 세 명의 음성을 만나려 합니다. 그들이 남긴 증언 속에서 부활밤에 담긴 아픈 상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희망과 치유를 나누려 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20세기 영미 시단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이라 불렸던 T.S. 엘리엇을 만납니다. 그는 연작시집 <황무지>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무슨 일 때문에 시인에게 4월은 그토록 잔인한 달이었을까요? 시인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생각했습니다. 병사만 9백만 명, 민간인 1천 9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 탓에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4월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너무도 깊고 아픈 상처가 어린 시간입니다. 4월 3일, 4월 19일, 그리고 여전히 가슴 저며오는 4월 16일. 신앙인은 우리 삶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은 고된 삶의 여정과 동행 속에서 얻은 상처 위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과 나눔, 희생 사랑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두 번째 인물은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 신부입니다.

“그 누구도 섬처럼 떨어진 사람은 없나니,
인간은 하나인 전체요, 한 사람은 그 대륙의 한 부분일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17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던 존 던(John Donne) 신부의 설교 한 대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제목이 되어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스페인 민중은 물론, 헤밍웨이 자신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던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군사 쿠데타 세력과 싸웠습니다. 소설가는 모든 사람이 불의에 저항하는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의 전쟁 경험에서 존 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삶에 이뤄야 할 사랑과 정의와 자유는 어느 사람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동떨어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돕고 연대하여 이뤄내야 해야 할 하느님의 일입니다.

존 던 신부 자신은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통을 통해 들여다보고 깊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과 그 생명은 뿔뿔이 흩어진 개체가 아닙니다. 그 한 인간 자체로 온 창조 세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입니다. 역사와 현실의 교회는 뿔뿔히 흩어진 생명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례에 초대하여 먹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을 축복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전례와 성사를 그 행동으로 삼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둠을 깨뜨리며 울려 퍼진 부활의 종소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의 세례를 받아 여기에 모인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라고. 한 몸인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놓인 존재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정의와 자유를 함께 축하하며 누려야 한다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시작이었던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활의 증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입니다. <생쥐와 인간>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인벡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신앙인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놀라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모르며,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인공 톰 조드는 권력에 쫓기는 몸이 되어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이제 너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냐?”
어머니의 애타는 물음에, 톰 조드는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엄마, 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어떤 사람을 때리는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거기서 나를 찾으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예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남녀의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의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오늘 여러분은 무덤가를 찾은 세 여인과 더불어,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바라보았던 세 명의 성공회 신자와 함께 부활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는 기억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호흡에 담긴 하느님의 숨결을 믿고, 그들과 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절망이 어둠처럼 지배하는 시간에도, 진실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세월을 견디며 세상의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세례받는 이들과 함께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악은 사라지고 죄가 씻어졌으며, 죄인에게는 용서를, 우는 이에게는 기쁨이 펼쳐지는 밤, 교만과 미움을 쫓고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주는 밤”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8년 3월 31일 부활밤 전례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