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나마스테 !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

Saturday, May 2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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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 (5월 31일)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루가 1:39-40).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비슷한 경험으로 아기를 가진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여서 일찍부터 기념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을 축일로 정한 일은 13세기에 들어서다. 중세 때 성모 마리아 신심이 널리 퍼지면서 성모에 관한 여러 사건을 축일로 정했다. 그 탓에 이 축일은 오직 서방교회에만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몇몇 정교회가 이 축일을 도입했다. 원래 날짜는 7월 2일이었다.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6월 24일)의 팔일부가 끝나는 시점으로 정한 것이다. 이 관습은 196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1965년 판 한국 성공회 기도서도 이 날짜에 ‘성모 왕문 성 엘리사벳’ 축일을 지켰다.

지금처럼 5월 31일로 고친 것은 1969년부터다. 성서 이야기와 시간의 흐름에 한결 걸맞기 때문이다. 임신한 마리아는 만삭의 엘리사벳을 찾아갔고(5월 31일) 석 달 정도 머물렀다. 그동안 세례자 요한의 탄생(6월 24일)을 보았겠고 산후조리도 도왔을 테다. 그렇다면 이 축일의 주제도 달라진다. 현재 본기도는 중세 전통을 따라 마리아가 받은 축복과 순종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은 아기를 가진 두 여인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몸과 삶에 나타난 당황스러운 일을 함께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도우며 보살핀다. 이때 더 깊고 큰 만남이 펼쳐진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루가 1:44).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두렵고 당황스러운 일, 그러나 신비하고 거룩한 일을 받아들여 자기 몸속에 품었다. 그 몸 안에 있는 거룩한 생명이 오히려 두 사람의 만남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축복의 인사는 태중에 있는 거룩한 아기들이 서로 알아보고 기뻐하는 만남이다.

‘나마스테’ – 인도와 네팔에서 사람이 서로 만날 때 합장하며 고개 숙여 나누는 인사말이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이 그대 안에 있는 하느님께 문안합니다’라는 뜻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가 나눈 인사는 분명 ‘나마스테’의 인사이다. 태중의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서로 알아보고 인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품은 마리아와 하느님의 약속을 품은 엘리사벳의 정중한 만남과 예의는 우리 신앙인의 사표다. 그들을 따라 우리 몸 안에 모셔 우리 안에 사시는 하느님께 인사한다. 성찬례의 영성체로 ‘그리스도’를 성체로 보혈로 우리 몸에 모시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을 모시고 품은 사람이다. 서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존경과 예의 없이 하대하거나 반말할 수 없다. 서로 예의를 차려 존중하고 격려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처럼 정중하고 거룩한 만남의 기쁨에서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난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우리 안의 교만함과 권세를 내치시는 하느님을 목격하며, 비천한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나마스테!

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Sunday, April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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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루가 24:13-35)

그들은 힘없는 마음을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이야기해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벽은 단단하고 움찔하지 않으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일들이 무너지자 세상이 싫고 사람도 싫고 자기 처지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두 제자는 꿈에 부풀어 올랐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이제 낙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듯이 걸었습니다.

인생을 헤매는 미로에서 새로운 만남이 일어납니다. 길에 동행한 어느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며 과거의 희망과 현재의 절망을 나눕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같이 읽다가 서로 위로 삼아 ‘함께 묵자’고 초대합니다. 같이 빵을 떼고, 잔을 마시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인생에 즐비한 슬픔과 절망의 미로를 헤매는 시간은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하느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정체와 행동을 알았고, 그분이 처형당했다가 살아났다는 증언도 들었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의 체험과 경륜이 길다 해도,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일이 숱합니다. ‘내가 안다, 내가 경험해 봤다’고 너무 자신하면 신앙의 성장을 멉춥니다.

예수님의 동행이 흥미롭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서를 다시 해석하여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방향을 얻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은 눈을 가리는 책더미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성찰과 기도, 열린 대화와 배움으로 마련한 신학이 없는 교회는 신앙의 길을 잃습니다.

제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붙듭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교정받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성서를 다시 가르칠 때 깊이 귀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낯선 사람의 도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곁에 두어 함께 지내고자 합니다. 이 도전과 배움에서 신앙이 열립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환대와 사귐에서 새로운 만남과 깨달음이 열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눕니다. 이 익숙한 광경은 가나의 혼인 잔치, 오천 명을 먹이신 음식 기적과 함께 성 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나눔은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친히 아침상을 마련하신 식사와도 겹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례는 이처럼 서로 기쁨을 주고, 주린 배를 채우며, 사랑과 섬김을 나누며 축하하라는 당부입니다. 절망과 실패, 수고와 땀으로 젖어 지친 이들을 초대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부활의 성찬례 안에서 낯선 이와 대화하고 배울 때 가려진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환대하여 빵을 떼어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닫히고 막힌 가슴이 찢어지고 열립니다. 이 동행의 성찬례의 사귐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이 되살아 납니다.

[전례력 연재]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Saturday, March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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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 년 경)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모수태고지(3월 25일)는 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 앞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자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전해준 사건이다(루가 1:26-38). 이 이야기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신앙인의 삶과 본질을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만, 세상의 방식과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시골 처녀의 가녀린 몸을 이용하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위에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 용기를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감싸고 동행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고 이 일에 동참하겠다고 응답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동역자로 초대받은 마리아는 이후로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을 도우며 선교에 동행한다.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끊는 슬픔을 경험하고,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처럼 신앙인의 역사가 수태고지에서 시작된다.

교회 전통은 새로운 역사의 시점을 지혜롭게 포착하여 연결했다. 교회는 원래 3월 25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날로 지켰다. 이날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고 믿은 교회는 서양력 ‘A.D.’ (Anno Domini: 주님의 해)에서 한 해의 시작을 3월 25일로 삼았다. 또한, 뜻밖의 소식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 신앙의 출발점과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종착점을 겹쳐놓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잉태하신 날, 곧 수태고지 축일로 정한 이유이다. 탄생은 죽음을 향하지만, 죽음은 인생을 완성하여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에 따라 성인 축일은 대부분 순교와 죽음의 날을 새로운 탄생의 날로 지키며 정했다.

수태고지가 3월 25일인 탓에 성탄절은 12월 25일이 되었다. 만 아홉 달 뒤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성탄절의 기원을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서 찾는 주장도 있었지만, 점차 수태고지와 십자가 사건, 성탄절을 함께 잇는 계산법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앙의 삶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훨씬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수태고지 사건에 담긴 중요성 탓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도 잇따라 발전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는 성모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오해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친밀감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신앙은 자신의 실제 몸과 마음에 낯선 생명과 두려운 사건을 열림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신앙을 ‘어머니’라는 여성의 이미지보다 잘 드러낼 말은 없다.

쉽게 이해하려면, ‘테오토코스’를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라고 풀이하면 좋겠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본이다. 수태고지 사건에서 시작한 신앙인의 여정과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가장 완벽한 제자’로 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일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이래 마리아를 숭배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고(천주교), 이에 대한 불신으로 마리아를 신앙의 생각에서 아예 지우려 한 적도 있었다(개신교). 성공회는 초대 교회 전통에 충실하게 성모 마리아를 깊이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마리아’이다. 신앙인은 생각과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불편하고도 두려운 도전을 받아들인다. 우리 몸을 내어드려 하느님의 뜻이 우리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산다. 혹시나 이런 ‘수태고지’ 사건의 신앙을 잊을까 염려하여,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먹고 마시며 우리 몸 속에 품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마리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