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교회력의 낯선 인물 – 본회퍼와 킹 목사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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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낯선 인물 – 본회퍼와 킹 목사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2004년 <성공회 기도서>는 1965년 <공도문> 이후에 나온 첫 개정 기도서이다. 되도록 예전 기도서의 관습을 여러모로 존중하려고 애썼다. 성인 축일에 관한 부분이 대표 사례이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도 성공회가 지켜왔던 축일로 1965년 공도문에 수록한 성인들의 기념일을” 대체로 수용했다(기도서 28쪽). 큰 변화도 있다. ‘기념일’ 항목에서는 “근현대사에서 그리스도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을 교회력에 넣어 기억하게 했다.

4월의 교회력에는 낯선 ‘기념일’의 주인공 두 분이 눈에 띈다. 디트리히 본회퍼(4월 9일)와 마틴 루터 킹(4월 5일)이다. 두 분은 지난 20세기, 무기력했던 그리스도교와 위태롭던 세계에 신앙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본회퍼(1906-1945)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루터교 목사였고, 킹(1929-1968)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총탄에 쓰러진 침례교 목사였다. 두 분 다 서른아홉 해의 생을 불태우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현대 성공회는 신학과 교회의 실천에서 두 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본회퍼는 탁월한 신학자였다. 당대 독일 신학계의 석학이었던 하르낙의 수제자였으며, 변화하는 현대 사회 안에서 설득력을 잃던 그리스도교에 날카로운 반성의 칼을 들이댔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여느 종교와 다름없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전만을 빌어주는 ‘값싼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참된 제자는 십자가에서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값비싼 은총’을 구한다. 신앙인은 세상의 고통을 나누고 세상이 던지는 위험의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독일의 독재자이자 유대인 학살자였던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사전에 발각돼 옥살이하던 그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3개월 전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킹 역시 촉망받던 신학자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학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이해한 그는 일찍부터 신학과 사목의 길을 결합하여 현장 사목자로 일했다. 킹은 교회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인간을 향한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비판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예수의 선교 방법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해하고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인권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는 모든 사람이 차별과 증오를 넘어서서 인종과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고 함께 어울려 만드는 사회를 향한 꿈을 노래하며 행진했다. 출애굽의 모세처럼 마침내 다다른 가나안 땅을 건너보듯이 자신의 운명을 말했던 다음 날, 킹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본회퍼와 킹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본회퍼는 뉴욕 흑인 동네 할렘가의 경험에서 인종차별과 가난의 문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킹 역시 본회퍼처럼 앞선 신학자들이 마련한 고민에 크게 기댔다. 신학과 신앙은 역사와 사회의 변화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답해야 한다. 신학의 성찰과 현장의 경험은 서로 뗄 수 없으며,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신앙의 언어로 세상과 대화하며 관여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가 만난다.

본회퍼와 킹은 어둠이 짙었던 20세기를 용기 있게 살았다. 하느님 앞에 솔직했고, 역사 앞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전례 안에서 우리 신앙과 실천에도 새겨져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성인들을 다시 만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3월 31일 치 (↩)

[전례력 연재] 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

Saturday, February 2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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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교회 역사가 전례력(교회력)을 마련하고 구성한 목적은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구원의 역사를 축하하며,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살자는 뜻이다.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말에는 우리 삶과 시간을 그리스도의 시간과 맞춘다는 뜻이 있다.

전례력이 세상의 시간인 달력과는 살짝 비껴 나가듯이, 신앙인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르게 살아간다. 신앙인이 세상과 조금씩 불화하는 이유이다. 전례력을 바로 살아야 신앙의 삶도 바르게 된다. 새로운 시간의 길을 걷는 신앙인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은 전례력이 마련하고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눈과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낀 탓일까? ‘그리스도의 몸’이라 자처하는 교회의 현실이 여전히 어수선하고 부족하여 낭패감에 휩싸인 탓일까? 교회는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초대 교회에서 그 모본은 예수를 곁에서 따르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성모 마리아와 여성 신앙인들이었고 사도들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자기 생명을 하느님께 바친 순교자들이 뒤를 이었다. 지상의 예수를 곁에서 친밀하게 따랐던 사람처럼 그들 곁에서 이어서 따르고, 후대에 그들을 다시 이어서 따르는 ‘신앙의 릴레이’가 마련됐다. 역사의 현실 안에서 한 사람이 교회의 신앙을 지키던 삶과 번뇌, 그리고 성취를 친밀하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역사에서 발전한 ‘성인 공경’ 관습은 함께 머물고 보고 만지며 냄새를 느끼는 오감의 친밀감에 바탕을 둔 신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도 계승’ 교리는 지위의 계승이 아니라, 신앙의 모본을 정직하고 바르게 따르는 신앙의 행동이다.

전례력은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을 겹쳐서 절기와 축일을 만들며 발전했다. 그리스도의 삶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는 그리스도 절기(템포랄레 temporale)와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성인 축일(상토랄레 sanctorale)이다. 그리스도 절기는 부활-성삼일을 정점으로 사순절과 부활 50일(오순절)이 마련됐다. 이후 성탄일을 지정하자, 먼저 만들어진 절기를 본떠서 대림절과 공현절을 두었다. 성인 축일은 그들의 순교일이나 별세일을 부활의 새로운 탄생으로 여겨, 축일로 지정하여 지켰다.

전례력 지침은 그리스도 절기를 최우선으로 하여 축일을 지키는 순서를 제공한다. 그 탓에 종종 여러 성인 축일을 다른 날로 미루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교회에서 공적인 매일 전례나 기도가 뜸해지면서 평일에 든 축일을 간과하기도 한다. 기도서에 선명한 축일들이 무색한 상황이다.

교회 신앙의 모범이라고 마련한 성인 축일을 되살려야겠다. 축일을 그날에 지키는 교회라면 성인의 삶과 의미를 명백하게 설명해야 한다. 사정상 그렇지 못하다면, 평일 중 한 차례의 전례 안에서 그 주간의 성인들을 함께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 그마저 어렵다면 주보를 이용하여 소개하거나, ‘이달의 성인’을 선택하여 소개하는 교육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 기도서에 새롭게 들어간 성인들, 특히 근대의 성인들은 자료 구하기도 쉽고, 현대의 신앙인에게 더 가깝고 친밀한 신앙의 모본을 선사한다. 성인들은 우리보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24일 치 (↩)

[전례력 연재] 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

Saturday, January 13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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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의 절기와 축일에 관한 이 연재는 ‘공현절’의 의미를 다룬 글로 꼭 1년 전에 시작했다(<공현절: 세상의 빛 – 예수와 신앙인> 성공회신문 2017년 1월 21일 치). 그 글에는 이런 사족이 붙었다. “애석하게도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가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전례독서에는 공현절기의 뜻과 신학이 사순절 직전까지 드러난다. 나중에라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여 바로잡을 일이다.” 그러나 곧 배포될 2004년 기도서의 최종 수정판(2018)에서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수정판의 한계 때문이다.

전례력에는 확정된 답이 없다. 긴 역사 안에서 조금씩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더하고 빼기를 거듭하며 내용과 의미마저 변하고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할 가능성도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일치하게 하려는 노력에는 원칙이 있다.

교회의 시간을 정하는 제1원칙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성목요일부터 부활밤까지 이어진 ‘부활-성삼일’의 전례가 마련됐다. 초대 교회 맨 첫 시기에 발전한 ‘부활-성삼일’은 교회의 시간과 전례의 어머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활을 중심으로 앞에는 사순절이 준비 기간으로 붙고, 뒤에는 부활 50일 축하 시간이 확장됐다. 교회는 2세기를 넘기기 전에 이미 사순절-성주간-부활성삼일-부활50일-성령강림일의 시간을 확정했다.

여기서 나온 제2원칙은 포개기 작전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우리 삶에 포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교회의 시간에 포개어 시간 전체를 거룩하게 한다는 뜻이다. 4세기에 이르러 주님의 성탄이 주요 축일로 주목받자, 성탄 사건을 부활 사건과 동시에 강조했다. 이미 마련된 부활절기를 그대로 성탄절기에 포갰다. 사순절을 따라서 대림절을, 부활 축제를 성탄축제로, 성령강림일을 성탄인 공현절로 삼았다.

제3원칙은 시간과 의미의 확장이다. 성령강림주일로 부활50일 축제의 대단원을 축하한 뒤에 교회 전통은 성삼위일체주일을 제정했다. 구원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일치가 마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교회의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을 따라 사는 일이다. 성공회가 일찍이 전례력의 나머지 시간을 ‘성삼후’(성삼위일체 후 시기)로 표현한 까닭이다. 빼어난 통찰이다.

안타깝게도, <2004년 기도서>는 성공회의 빼어난 전통 두 가지를 지웠다. 절기로서 ‘공현절기’가 사라지고 ‘공현일’만 남았다. 공현절기의 일부였던 ‘주님의 세례 주일’이 아무 뜻 없는 ‘연중시기’의 시작이 됐다. 밋밋하기 짝이 없다. ‘성삼후’를 지켰던 <1965년 공도문>에서도 뒷걸음친 일이다. 실은, 1960년대 이후 천주교가 만든 ‘연중시기’ (또는 ‘보통시기’) 명칭을 그대로 따른 탓이다. 전례의 시간은 그저 ‘보통’이라 부를 수 없다. 모두 특별하고 뜻깊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2000년 기도서 <공동예배>는 공현절기를 살려냈다. 2월 2일의 ‘주님의 성전 봉헌 축일’까지 확장한다. 개정된 세계공동전례독서(RCL)은 교회의 전통을 되살려서 의미를 더 확장했다. 사순직전 주일을 ‘주의 변모 주일’로 삼아 공현절기의 절정을 삼게 했다. 다행히, 2018년 전례독서는 이를 따라 공현 마지막 주일(사순직전주일)에 주의 변모 사건을 읽도록 했다. 성탄의 작은 별이 주님 변모의 빛으로 우주에 널리 빛난다는 공현의 뜻을 확인한다. 이 사건은 이후 걷는 사순절 여정의 막바지에서 부활로 우리를 변하게 하실 예수 부활의 빛과 상통한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1월 13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