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주일 잡감 – [주교] 성직 소명 체크 리스트

Saturday, May 14th, 2011

몇 년 전 천주교 신부 친구가 웃자고 들려준 말이다. 신학교 졸업 설교를 하던 학장 신부님께서 아주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여러분을 내보내는 제 마음이 두렵도록 떨리고 아픕니다.” 신학생(부제/사제)들은 마침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장)는 말씀을 복음으로 들은 터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 뒤, 학장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이리를 양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고 아픕니다.”

언제나, 특히 서품 기념일이 있는 5월이면 이야기가 떠오른다. 게다가 한국은 오늘 부활 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과 ‘성소 주일’로 지킨다(주일 복음 본문 요한 10:1~10).

성소 주일에 생각하는 ‘성소’란 무엇인가? 성소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이 나누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요, 선교 명령일 테다. 그 가운데 ‘성직 성소’가 하나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이지, 질적으로 다른 성소가 아니다.

5월이면, 이 착한 목자 주일, 성소 주일과 더불어, 성직 서품이 있다. 오랜 식별 과정과 기간의 중요한 마디점이다. 모든 성소 식별이 그렇듯, ‘성직 성소 식별’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성직 서품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그 계속되는 식별에 성직을 걸어야 한다.

이 식별이 늘 말썽거리란다. 우리는 어떻게 성직 열망자를 식별하여 신학교에 보내는가? 신학교의 성직 ‘양성’ 과정에는 어떤 식별 과정이 적용되는가? 졸업 후 다시 전임 전도사 생활 1년 반을 거쳐 성직의 첫 관문인 부제 성직, 그리고 다시 2년 후 사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식별의 과정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헤아려 보고 있는가? 이 성소 식별은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품으신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일 테다. 이 식별을 도와주는 성소위원회은 어떻게 운영되며, 성소위원들 자신은 어떤 식별의 훈련을 통해서 이 성소자 면접에 응하는가?

성직 성소의 식별은 부제품과 사제품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멀게는 십수 년 짧게는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주교를 뽑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선거가 되어 버렸다. 주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에 해당하는 성소 식별 과정이 존재하는가? 없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식별이어야 하고, 적절한 식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지도자를 식별하는 일에 그 교회의 미래가 달렸다.

이 과정에서 성소자 스스로 묻고, 그 식별을 돕도록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성직 서품받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개인 식별에 있을 이이든, 서품 기념일을 맞는 이이든, 주교직에 있는 이이든,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블로그 이곳저곳에 적었으니, 오늘은 다른 이의 말도 들어본다.

주교 선출을 맞아, 영국 성공회의 은퇴한 사제가 던지는 질문은 주교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성직후보자, 그리고 신자들이 늘 되새겨야 할 말이다.

주교 선출 위원회의 면접위원들은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첫째, [주교] 후보자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려왔는가? 과거의 고통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살펴보지 못한 고통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힘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보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을 잘 보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둘째, 후보자의 전반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그가 만드는 분위기와 환경은 어떤 것인가? 그가 가진 희망과 평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꽃을 피우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가 발설하거나 풍기는 비판 속에서 사람들이 말라 죽는가? 뽑혀야 할 사람은 예수 이야기를 멋지게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를 판단하려는 ‘영’은 종교적 권위의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늘 유혹이다. 이 판단하려는 영은 훼손된 영혼에 사로잡혀, 덕을 세우기보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셋째, 후보자가 면담하는 동안, 그 면접위원들에게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는 고향에 대한 독특한 열망에 관여한다. 사람은 그 내적인 열망의 불꽃이 있으나 사는 동안 이것이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주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복하도록 돕는 주교가 필요하다.

넷째, 그의 꿈(vision)은 무엇인가? 진실한 꿈은 다음 세 가지를 수행한다. 사태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의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연대하도록 연결해 준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꿈이 솟아난다. 사람들은 다만 그 지도자와 더불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것이다.

다섯째, 후보자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생각, 곧 무너질 내용, 전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멋지게 표현한 것일 뿐임을 지각하는가? 진실은 어떤 공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오직 그가 슬쩍 비추는 웃음과 인사, 표정 속에서 드러난다. 좋은 후보자는 말에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그는 여러 틈과 사이에서 삶이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이가 주교관을 써야 한다.

원문: 사이먼 파크, http://goo.gl/mXW74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송경용 신부 (서울교구, 걷는 교회, 나눔과 미래)

일치 – 신적인 긴박성과 인내심 사이에서

Tuesday, April 26th, 2011

복음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들라면, 주저 없이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의 고별사를 들겠다(요한 13장~16장). 뒤따르는 예수의 청원 기도는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의 핵심이다(17장).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란 무엇인가? 그 선언을 교회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라치면 예수님의 일치 청원 기도 같은 간절한 깊이는 쉽게 사라지곤 한다.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동안 일치를 추구했으나, 늘 자신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맞섰다. 로마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교회는 정통 신조를 진리인 듯 내세우며 그에 합의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가시적 일치를 필요 없으며 영적이며 내적인 진리를 개인적으로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개신교에는 편만하다.

세계 성공회는 여성 성직 문제, 동성애자 성직 문제를 두고 분열을 거듭한다. 지난 20세기 스스로 선두에 섰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의 노력과 성과를 무색케 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진리’를 손아귀에 잡은 것 마냥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저마다 진리의 ‘파편’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성공회 전통의 겸손함도 엿보기 어렵다.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다급하게 정죄하느라 바쁘다.

지역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가? 교구의 전례 행사는 그 본뜻에서 성직자들과 신자들, 즉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성 목요일 성유축복미사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사제 서약 갱신”도 그 서약의 되새김으로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위에 대한 ‘순종’을 위한 행사로 비치는 동안에 그 일치의 뜻도, 원래 예식의 뜻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뒤에는 어떤 불신이 자리하고 있을 텐데, 희미해지는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모종의 으름장이 뒤따른다면, 그 조직의 앞날이 걱정스러울 테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억압적 권력의 행사는 대체로 ‘일치’라는 이름 아래서 진행되었다. 예수님 고별사와 청원 기도에 담긴 일치의 근본인 사랑이 희미해지고 조직과 특권을 위한 다급한 일치가 앞서면서 그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일치를 빌미삼아 통제가 자리 잡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례도 그 본래 넓은 뜻을 잃고 교회 조직의 언어와 행동을 획일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참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토막을 발견한다. 그 자신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교권의 최고 위치에 있으며,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에 획을 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치는 ‘신적인 긴박성과 신적인 인내심’ 사이에 자리 잡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마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치.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치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알도록 기도하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와 진리와 거룩함.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일치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교 일치는 신학적 얼버무림이나 무관심에 근거할 수 없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일치는 진리의 회복과 더불어 가야 하고, 우리 삶을 다시금 거룩하게 하면서 가야 한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긴급한 일이다. 그 어느 것 하나를 먼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거기엔 신적인 긴박한 요구가 있고, 신적인 인내가 있다.

in Introducing the Christian Faith, SCM,1964. 76.

전통의 의미 – 이브 콩가르 O.P.

Monday, March 28th, 2011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종교개혁이라는 사고 틀 안에서만 ‘전통’을 본다. 이때 전통은 16세기 당시 서방교회가 물려받은 중세의 관습과 동일시되기 일쑤다. 그로부터 5백 년이 흘렀지만 이런 틀거리는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아마도 스스로 종교개혁의 적자라고 생각했던 청교도의 열광이 미국을 거치며 더욱 배타적으로 강화되고 한국의 식민지적 선교 환경과 그 유산 안에서 더욱 말라비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보수파는 그렇다 치고라도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5백 년 동안 서방교회의 유산 아래서 천주교와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몇몇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만 되뇌고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이른바 교회 일치 대화가 무르익으며 서방교회 내의 유산은 물론, 그동안 살피지도 않았던 동방교회의 여러 전통에서도 배우며 신학과 신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게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의 혁명적 사건을 인정하더라도, 당연히 그 한계도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교개혁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20세기의 여러 신학적 반성과 운동은 ‘16세기 서구 맥락과 틀’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가운데 다시 떠오르는 주제는 ‘전통’에 대한 이해였다.

전통에 대한 이해는 역사와 삶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신앙의 연속과 단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역동성이 상실되는 순간 전통과 전통주의가 나뉜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야로슬로프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예고 없던 트윗 대화 (@prayandwork & @viamedia) 끝에 이 전통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폴 틸리히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공교회)는 서기 300년경에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교회의) 첫 몇 세기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톨릭적(이중적 의미) 양상들은 아주 초기에 이미 강력했다. 이는 성공회의 ‘중도’(via media)라는 것도 교회들의 분열에는 이상적인 해결책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작동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이른바 첫 5세기에 마련된 합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의 원칙들과 합의와는 다르다… 첫 5세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한 교리, 권위의 체계, 성사에 대한 이론 등이다. (영역본에서 재번역. 괄호는 옮긴이)

이 부분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온 (가톨릭) 전통을 무시한 채로, (프로테스탄트) 원칙만으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이 설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반대도 말이 된다. 그 참에 20세기 천주교 내의 신학적 개혁, 특히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프랑스 신학자요 도미니칸 사제인 이브 콩가르(1904-1995)의 글을 되새긴다. 그에 대한 우리말 번역 작업은 인색하다.

그의 역작 [전통과 전통들]의 요약판이요 대중판으로 불리는 [전통의 의미](영역본)의 서문을 옮겨 놓는다.

이브 콩가르 O.P. [전통의 의미] 서문

성공회 친구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1956년 성공회와 정교회의 신학 대화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전통과 전통이 성서와 맺는 관계에 대한 토론이 있었는데, 러시아어 통역자는 이 전통이라는 교회 전문 용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통을 그냥 “옛날 관습”이라고 번역하더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 아마도 이 짧은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러시아어 통역자와 비슷하게 전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전통이 별 비판 없이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존중받고 받아들여진 관습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늘 그대로인 것일 뿐만 아니라 “늘 그렇게 행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전통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 사회에서 전통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위험해 보이는 새로운 시도를 막는 장치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제안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전통은 변화를 막기 위해 쓰이는 낱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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