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 몸과 피로 생명을 나누는 일

Sunday, August 16th, 2015

선교 – 몸과 피로 생명을 나누는 일 (요한 6:51~58)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오해를 받으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기괴한 ‘식인’ 의식을 벌인다는 의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잔을 들고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이다” 하신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거행했는데, 그 내용이나 뜻은 살피지 않고 말만 엿듣고는 속단한 탓입니다. 상황과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말만 엿듣거나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오해가 일어나기 일쑤입니다. 성서 해석도 그렇고, 우리 신앙과 삶도 그렇습니다.

살과 피는 성서에서 ‘생명’을 뜻합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의학 상식으로도 살과 피는 생명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런 뜻에서 신앙인의 생명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몸에 담고 사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생명과 삶을 우리의 생명과 삶의 내용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습니다. 성찬례는 이 관련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우리 삶이 예수님의 삶을 닮아갈 때라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있다는 진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성찬례를 무시하면 그리스도교는 종종 세상의 여느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 활동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세상은 생명을 내어주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다른 생명 안에 주면 예수님의 생명이 옮아가서 두 생명이 모두 살아가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어주고 나누는 일은 양쪽을 다 살리는 결단이고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늘 내어주어서 다른 생명을 먹이고 치유하고 힘을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늘 살아서 움직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커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실로 성장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 자신을 덜어내어 나누어서, 영적 갈망에 배고파하는 사람을 환대하여 먹이고,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보듬어 치유하고,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을 먹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힘과 능력과 재력을 세상에 나누어야 세상이 하느님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피, 자신이 지닌 소중한 것을 내어놓고 나누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살아가며 성장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집하거나 움켜쥐는 것들은 끝내 소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열어서 나누고 손길을 펼치면 “영원한 생명”이 세상 속에서 펼쳐집니다. 성찬례의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의 몸과 피를 마셨습니다. 영성체하고 파송 선언을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몸과 피가 되라는 선교 명령을 받습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는 ‘식인’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을 내놓아 남을 살리며 함께 살아가겠다고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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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16일 연중20주일 주보 []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Sunday, August 2nd, 2015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요한 6:24~35)1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를 물으면 각양각색이지만, 자신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와 의문에 대답을 주십사 하는 소망이 많습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안녕과 성공, 가족의 건강과 축복은 당연한 일이고, 내세에도 안녕과 축복이 계속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이 갈망의 해결 방식을 되새겨 보면, 인간은 요청하고 하느님은 베풀어 주신다는 공식입니다. 구약시대 모세 때도 같았습니다. 괴롭다고 소리치니 파라오의 압제에서 건져 주었고, 배고프다가 아우성치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불평과 더 큰 것을 바라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하루 지나 썩듯이, 인간의 욕심은 마침내 황금소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일로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다릅니다. 자기가 소망하는 대로만 받은 것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실제로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 예수님을 “생명의 빵과 물”로 받아들이면 ‘영원히 계속되는’ 새로운 일이 펼쳐집니다. 불가능하다고 세상이 내치거나 버린 일을 다시 되새겨서 받아들이고, 그 일에 온 마음을 두고 온 몸을 던질 때 하느님 나라가 열린다는 장담입니다. 모세 앞에서 불타면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떨기나무 사건이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나다”라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것 속에서 하느님의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나다”하셨던 하느님의 어투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쓰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요, 착한 목자이며 포도나무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부활과 생명이다.” 어느 말씀 하나도 현실의 세상에서 통용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의지와 실천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삶 전체는 욕심과 경쟁의 어둠에 잠긴 세상에 빛을 주고 새로운 길을 냅니다. 서로 마음의 벽을 쌓은 세상에 문을 트고, 버려진 사람을 찾아내어 보살피며 달고 단 포도를 한 움큼 입에 넣어주시며 기운을 일으킵니다.

오늘 “나는 생명의 빵이다”하신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너는 무엇이냐? 너는 누구이냐”는 물음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로 세상을 비추고 보살피고 먹이셨다면, 우리 신앙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느냐는 도전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소망에 머물지 않고, 더 큰 희망과 진실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believe in). 믿음은 예수님의 삶 ‘안’에 들어와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를 몸소 보여주시려고, 영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이신 성체와 보혈이 먼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권면대로,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그분의 삶 ‘안’에 들어가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직분의 은총과 선물대로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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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2일 연중18주일 주보 []

애틋한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Wednesday, July 22nd, 2015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아가 3:1~4 / 시편 42:1~7 / 2고린 5:14~17 / 요한 20:1~2, 14~18
2015년 7월 2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2012년 9월 18일,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틱학회에는 300여 명의 학자와 기자들이 마음을 졸이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단에 올라온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요, 초대교회 연구의 권위자인 카렌 킹이었습니다. 그는 유리판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보존한 고대 기록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옛사람들은 갈댓잎을 펴 붙여서 그 위에 글을 쓰곤 했습니다. 이를 파피루스라고 합니다.

카렌 교수가 보여준 파피루스에는 놀라운 한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 아내… 그녀는 제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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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여덟 단락에 불과한 짧은 쪽지 조각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내 아내”라는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카렌 킹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어떤 복음서의 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기억하기 쉽도록 “예수의 아내 복음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도 그런 기록을 담지 않습니다. 카렌 교수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쪽지의 진위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적인 결과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위조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렌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진짜이며, 예수님과 그 주변의 여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단서가 된다고 여전히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아내 후보에 올라오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키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의 아내였을까요? 아니면 여러 전설이 추측하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이었을까요? 이런 전설과 흥미를 이용하여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를 써서 정말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휴가철에 읽을 흥미롭고 가벼운 독서를 찾으신다면 저는 <다빈치 코드>를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고뇌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추리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권합니다. 이것도 소설이고, 그 내용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잠시 생각했을 법한 고뇌를 일장춘몽의 회상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깊이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복음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교회 전통은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일곱 마귀’에 들려서 고생하던 그를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표현으로 보건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으로 짐작합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한가지가 아닙니다. ‘일곱’ 개나 됩니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서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정신의 문제든, 육체의 문제든, 이런 복잡한 의학적 증상에는 늘 ‘콤플리케이션’이나 ‘콤플렉스’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일곱 마귀’는 막달라 마리아와 우리를 괴롭히는 다양한 콤플렉스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파는 죄목으로 잡혀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여인의 사례에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참회와 헌신의 모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서의 연결고리가 희박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켰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묻힌 현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마리아는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 어둠은 그가 겪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상실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그 슬픈 어둠 속에서 그는 안타까운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작별의 기회마저도 사라진 절대적인 상실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 그 눈물 속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봅니다. 제자는 희미한 모습으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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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깊은 상실감 속에서 알아들었습니다. 상실의 눈물이 그의 막힌 귀를 녹이고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절망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절망감의 눈물이 이전의 눈을 씻어내려 눈물의 볼록렌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다”는 말이 오늘 본문 전후로 세 번이나 나오는 것은, 마리아가 겪었던 슬픔의 깊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깊이를 거듭해서 드러냅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상실감과 절망감, 슬픔과 고통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우리의 온갖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고 세심하고 예민하게 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안내하는 깨달음의 길입니다.

이 빈 무덤의 장면을 좀 더 세심하게 보면,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수님 무덤은 “동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오해합니다. 정말 오해일까요? 천재적인 복음사가인 요한의 기발하고도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동산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동산을 거닐던 동산지기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산책하시던 하느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빈 무덤의 부활 동산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서 태초에 만들어졌던 모습대로, 에덴동산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떨어졌던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만납니다. 새 아담과 새 하와가 서로 그리워하는 눈물 속에서 기쁨으로 재회합니다. 분명히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텐데도,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는 말에 마리아가 “예수께 돌아서서, 라뽀니하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로 돌아섰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데면데면 보이는 대로, 그냥 얼핏슬핏 교회에 다니는 모습대로, 슬쩍 곁눈질하듯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해 깊이 돌아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서서 마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구약 아가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노래한 절창입니다. 아가서의 노래는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데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성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사랑하는 나의 임 못 보셨소?’ 물으며 지나치다가
애타게 그리던 임을 만났다네.”

그 만남은 더 깊고 큰 행동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놓칠세라 임을 붙잡고 기어이
어머니 집으로 끌고 왔다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

에로틱하고 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이 노래를 들으며 괜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노래 그대로 바로 이 방, 이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가서의 노래는 생명을 새롭게 잉태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 교회의 선교 사명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지 못하거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는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가에서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드러내 그를 만나셨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시신이라도 만져서 보내야겠다는 그 간절한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부활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 여성이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 가운데 사도,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도였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 우리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운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연인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