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은총 – 안과 밖을 함께 응시하는 일

Wednesday, January 14th, 2015

히브 2:14~18 / 시편 105:1~9 / 마르 1:29~39

2015년 1월 1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마르코 복음처럼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3년 정도 기간으로 그리는 다른 복음서의 구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지 없이 깨집니다. 예수님은, 시쳇말로, ‘짧고 굵게’ 모든 일을 1년 만에 끝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한가하게 예수님의 태어난 경위나 족보를 들먹일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자의 요한이 곧장 나타나 예수님을 예견하고, 그분께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첫 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고, 어부를 불러서 제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길을 서둘러 가십니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분입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분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빠른 발걸음과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장면 전환이 느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사건과 행동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여럿 등장합니다. 살펴보면, 호흡이 길어지는 곳에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르침 와중에 악령을 쫓아내서 사람을 정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여행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을 쓰다듬고 고쳐주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 예수님은 멈춰 서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깨진 곳에 예수님은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서는 큰소리로 꾸짖어 혼내시는가 하면, 몸이 아픈 곳에서는 조용히 곁으로 가서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는 길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짧은 생애의 긴박한 선교 사명 속에서도 그분의 눈과 귀와 감각은 늘 다른 사람과 그들의 처지를 향하여 세심하게 열려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의 방향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민감한 사람은 신경질적이며 자기방어적이기 쉽습니다. 자기만을 향하여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누군가 손만 대면 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그 처지에 민감한 사람은 그 사람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구석을 찾도록 이끕니다.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나 자신’도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이 정말로 아픈 곳이 어딘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동과 시선이 늘 두 겹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들어가서도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가르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찾는 공부와 대화 속에는 악령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령을 꾸짖어 내쫓았다는 점이 눈에 도드라집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쩌면 이는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생각과 고민을 함께 검증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며 종종 논쟁하는 일을 멈추면 악령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잡념이 악령이 되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설교 방송을 듣지 마시고 기도서를 읽으십시오. 솜사탕 같은 묵상집이나 예화집을 읽지 마시고 역사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면 좋은 선생이나 성직자를 찾아가 깊은 질문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령이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쉬러 들어가셔서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쉼과 치유는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쉼이 없으면 병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다른 사건입니다. 쉼이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손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쉰다는 일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박한 일에 눈감고 내팽개쳐 두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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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쉬어도 쉬지 않고 쉽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면서 쉬고, 온갖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쉽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급박한 부탁으로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방해받았다는 듯이 귀찮아하면서 쉽니다. 이것은 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 마음으로 소비하는 쾌락’입니다.

쉰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느리게 관찰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아내의 손놀림을 살피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선이 붙은 남편의 등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좁은 방에 들어가 수학책 영어책에 머리를 박고 말라가는 자녀를 잠시 불러내어 허튼 농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쉼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필요한 바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일이 쉼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치유도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의 치유를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자면,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에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당으로 모여서 성찬례로 새벽을 여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 이 새벽 미사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입니다. 예수님께도 그 빠른 길을 걷느라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 생각하기 쉬운 아까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잘 아셨고, 그 어둠 속에서 참 인간이셨던 당신이 지닌 어둠을 대면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어둠이든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든지,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조언과 겹치는 말입니다.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이것이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이 목표를 향해서 긴박하고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함에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이 비틀어지고 몸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 불완전함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완전성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대로 ‘피와 살’이 되셨습니다. 두 겹의 의미가 돋보입니다. ‘피와 살’은 불완전성과 한계, 유혹에 노출된 약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고통은 ‘피와 살’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살’이 되어서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피와 살’로 만든 이 성찬의 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 슬픔과 눈물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의 상처와 깨진 곳을 둘러보는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깨진 곳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구원이 빛, 치유의 빛, 너른 환대의 빛이 스며듭니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아직 소리 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어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바로 거기로.”

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Wednesday,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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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따르고 환대하는 삶 – 성 안드레아 사도와 니콜라스 페라

Monday, December 1st, 2014

이사 52:7~10 / 시편 19:1~6 / 로마 10:12~18 / 마태 4:18~22
2014년 12월 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월요일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축일로 지키는 성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연결되는 지점에 성 안드레아 사도가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옛 시대의 끝이 새 시대의 시작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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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아 사도는 열 두 명의 사도 명단에서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핵심 사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 사도로 등장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지만,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활발해진 이후에, 안드레아의 활약이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그는 유럽의 북부 끝인 스키티아까지 올라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고, 지금의 동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 안드레아 사도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존경 받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당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대교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세계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선교사로 계속 활동하려고, 동료에게 주교직을 물려주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도시 파트라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X 모양의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서 처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로 X 자 모양은 성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자면, 안드레아의 별명은 “따르는 사람”이었을 법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의 장면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요한복음서의 설명이 더 그럴듯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상의 회개를 외치며 새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본을 따라서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지목하자, 안드레아는 요한 선생의 명을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외침과 생활에 자신을 던져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또한 이러한 삶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 베드로를 불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선생을 따르는 사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선생님을 내세우며, 초대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맡겨서 그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과 행태에 던지는 도전이 참으로 큽니다.

연원을 알 수 없지만, 교회는 11월 30일을 성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는 대림절로 교회의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 때문에,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은 한 해의 성인 축일 가운데 첫 번 째 성인 축일이기도 합니다. 따르고 환대하라는 교회의 사명과 삶이 교회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뜻을 되새겨 주려는 의도였을까요?

원래 11월 30일, 어제 지켰어야 할 축일을 오늘 12월 1일에 지키는 까닭은 축일이 대림주일과 겹쳐서 하루 미뤄서 지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12월 1일은 니콜라스 페라(Nicholas Ferrar: 1592~1637)라는 분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페라는 영국 성공회 초기 수도자입니다.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성공회 역사에서 니콜라스 페라는 매우 중요한 분이어서 그의 축일을 지키는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는 헨리 8세 이후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수도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첫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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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는 중세 교회의 재산 많고 권력이 찬란했던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제 성직을 받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과 함께 수도회 전통의 회칙에 따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교회를 다시 세워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웃의 건강과 복지를 살피는 사목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 생활에 충실했고, 성서의 이야기와 삶의 교훈을 그림으로 그려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수도회에 대한 호감이 거의 사라졌고,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금식과 절제 생활을 꺼리는 현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페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수도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수도원 생활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을 되살리는 사례였고, 2백 년 후인 19세기 영국과 세계 성공회 전역에서 다시 수도회가 부흥하는 영적인 자산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영미 문학계에서 최고 시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성공회 신자 T.S.엘리엇은 “리틀 기딩”(Little Gidding)이라는 긴 시를 남겼습니다. 이후에 그 유명한 <사중주>로 편찬된 시집의 마지막 네 번째 장입니다. 이 “리틀 기딩”은 바로 니콜라스 페라가 내려가 수도원을 세웠던 마을이요, 그 수도원 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시인 엘리엇은 “리틀 기딩”을 방문하고 이런 구절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12월은 교회 시간(교회력)의 시작 달이지만, 세상 시간(세속력)의 마지막 달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끝내는 시간에 겹쳐 우리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세상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따르기 시작하며 다른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초대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감과 시작이 겹치는 삶, 새로운 따름과 환대의 시작이 여러분에게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니콜라스 페라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끝내고 작은 시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과 영성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보살폈던 것처럼, 이 12월이 여러분에게 새롭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며, 이웃을 발견하고 보살피는 시간이길 빕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