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08

캔터베리 대주교와 “샤리아” 법

Wednesday, February 13th, 2008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한 강연과 인터뷰가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슬람 샤리아(sharia) 법이 영국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도 불가피하게 보인다는 그의 견해 때문이다. 성급한 이들은 대주교직 사퇴까지 주장하고 나섰고, 처지가 곤란한 이들은 그의 발언에 거리를 두고 있으며, 조심스러운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히스테리” 반응이라며 대주교를 두둔하기도 한다. 영국에 계신 한 신부님께서 현장 소식을 전해오고, 샤리아의 나라인 파키스탄의 한 신부님이 내막이 뭐냐고 묻는 참에 한 소리 거들어 본 것이 이렇다. (“국보 제 1호”인 숭례문을 불태워 먹은 참에 먼 나라 불구경할 처지가 아니겠지만…)

1. 논란의 발단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대심원(Royal Court of Justice) 에서 법률가를 대상으로 강연과 그 뒤에 있었던 BBC 방송과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인터뷰 가운데 대주교의 짧은 한마디였다.

(질문)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샤리아 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게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대답) “불가피한 같다. 사실 상 우리 사회와 우리의 법률 하에서 샤리아 법의 어떤 내용들은 이미 인정하고 있다.”

이후 인터뷰어는 다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샤리아법이라는게 이슬람교의 불평등한 악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묻고, 이에 대해서 대주교는 다시 그 때문에 이런 강연을 했고, 이미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샤리아 법에 대한 대중화된 매우 협소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지적하고 있다고 인터뷰를 이어간다.

2. 논란의 전개

언론은 이걸 기사회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 영국에 샤리아 법 도입해야” 뭐, 이런 식으로 제목을 뽑았다. 일반 영국 시민들 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 내부와 다른 교단에서도 캔터베리 대주교에 대해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그 대표 주자들을 보면 현재 파키스탄-영국의 이중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영국 성공회의 주교인 나지르-알리 주교, 조오지 캐리 전직 캔터베리 대주교, 그리고 영국 천주교의 오코너 추기경 등이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캔터베리와 양대 교구를 이루는 요크(York)의 센타무 대주교는 현재 이에 대해서 이 논쟁에 거리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분들은 대주교직 사퇴까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꽤 여럿은 사퇴까지도 주장하는 모양이다. 재밌게도 위의 두 분 주교님은 영국성공회 내의 소위 “복음주의자들”로 구분되는 분들이고, 천주교 추기경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지르-알리 주교는 몇 주전 신문 기고 글에서 영국 내 이슬람 신자들의 확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고, 자신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출신이라서 더욱더 이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사실 이 분에 대해서는 하고픈 말이 많으나, 이 참은 아니다.)

현재 The Church Times 와 같은 영국성공회 공식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성공회의 관구 의회 내에서 이 문제로 인해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3-4% 정도이고, 3분의 2 이상은 사퇴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연 내용과 인터뷰를 거두절미하고 선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에 대한 비판적인 소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는 것 같다.

3. 이런 반응들에 대한 생각

사실 서구 사회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어떤 정형의 이미지를 설정하고 이에 대해서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보통이다. 이번 논란의 밑바닥에는 이런 전통적인 (앵글로) 백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더 복잡한 구석이 있겠다. 9.11 이후 심화된 서구 사회(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로 대변되는)와 이슬람 문명권의 대결 혹은 “문명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다. 이런 구도(framework)는 많을 것을 감추고 있고, 여전히 ‘타자’에 대한 이미지를 단순화하고 조작한다.

이런 조작된 이미지를 넘어서서 삶의 결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성찰하도록 시도가 집단적 히스테리로 공격받는 양상이다. 몇몇 주교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여기에 동조하는 것을 보니 아쉽다.

4. 다시..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앞의 말뿐이었는가? 아니면 이 말이 인터뷰 초반에 나와서 그랬을까? 하여튼 언론은 위에 인용한 말을 대대적으로 문제 삼았다. 실제로 이 말 뒤에는 내내 샤리아 법의 원래 원칙이 무엇이었는가? 그런 원칙 속에서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의 신념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으나, 그 내용은 “쏘옥” 빠졌다.

인터뷰 전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1573

한편, 인터뷰 전의 강연은 무엇이었는가? 특히 “사리아” 법에 대해서는 대주교는 어떻게 말했는가? 한편 이 인터뷰 전에 있었던 강의의 한 대목을 볼까요? 문제가 된 “샤리아” 법에 대한 대주교의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핵심이기에 옮겨 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정하는 내용과는 반대로, 우리가 이슬람 법과 영국 법을 갖고 토론할 때, 서로 대립되는 두개의 법률 체제 가운데 어정쩡하게 서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샤리아는 인간의 어떤 결정에 기대어서, 또는 투표와 선호도에 따라서 그 합법성을 갖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해야 합니다. 한편, 이것을 법으로 만들어 제정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끝나지 않은 일입니다. 샤리아 법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단일한 법체계가 아니라, 계시된 텍스트(여기서는 꾸란)에 의해서 지배되는 법철학적인 방법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모로코에서 열린 [이슬람 학회의 토론에서] 몇몇 이슬람 학자들이 제기한 바에 따르면, 단순하게 법제화된 규정으로 샤리아를 보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는 실제로 꾸란에서 제기하는 보편적인 법 정신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이미 법제화되어 실행되고 있는 샤리아 법의 폐해를 잘 인식하고 있다. 절도범의 손을 잘라버린다거나, 간통한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인다거나 하는 처벌 방식의 문제도 잘 알고 있다. 사우디나 탈레반이 그런 대표적인 나라이거나 집단들이다. 그걸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이미 오해의 여지를 차단하고 있고, 이슬람 내에서도 샤리아의 실제 적용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르치듯이,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협소한 해석으로 샤리아를 법제화하여 이를 가지고 사람을 처벌하고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강연문을 읽지 않고 이렇게 반응할까?

강연 전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1575

5. 그래서 어쨌다는거냐?

1) 정확한 내용을 파악을 하지 않고 선정적으로 전하는 언론 보도는 항상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조선일보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2) 캔터베리 대주교에 대한 비판은 인터뷰의 한토막을 가지고 확대 과장되고 있다. 특히 강연문을 읽어본 사람이 별로 없다. 기자도 읽지 않고 쓴 인상이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분명히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

3) 캔터베리 대주교는 “샤리아” 법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강연에서 거듭 언급하고, 어떤 법이든지 그 원칙을 좁게 해석해서 사람들이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보편적 원칙에 견지에서 그 적용을 다시 돌아다 볼 것을 촉구했다. 신앙의 어른로서나 학자로서나 해야 할 중요한 언급이었다. 언론과 그 이후의 비판은 여전히 좁게 해석된 “샤리아” 법에 대한 인상만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를 공격하고 있다.

4) 적어도 내 개인적인 견해로, 강연문을 읽고 인터뷰를 보고 판단하기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한 말에는 잘못이 없다.

5) 그러나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글이나 말에는 뉘앙스가 너무 깊다. 그래서 그 깊이까지 다다르려면 오래 그 글과 말을 곱씹지 않으면 오해하는 일이 빈번할 법도 하다. 신학자들이 읽어야 할 연구 서적의 수사학과 대중적인 강연의 수사학의 차이를 식별하고 이를 배려하는 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이건 특히 “영성” 신학자로서 그분의 장점이지만, 교회 “정치”인으로서 그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번에는 이 약점이 사단이었다.

그렇다면, 대중이 충분히 못알아들을 것이라면 아예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가? 또 전문적인 신학적 수사학은 늘 전문가의 몫이어야 하는가? 대중은 늘 입에 발린 그저 그런 소리만 들어야 하는가? 도전받고 충분히 생각하면 안되는가? 트집 잡히지 않게 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틈난 나면 물고 늘어지려는 하이에나를 피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다보니 이 참에는 더더욱 이런 간극을 메우고 해설해주는 친절하고 깊은 저널리스트가 아쉽다. 저널리즘은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연구하고 그걸 업으로 하지 않는가? 모본을 보여주시라. 배우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 저널리스트들이여 제발 “가교”가 되어 달라, 이간질하지 말고.

사순절기 – 어둠 안에 머물기

Friday, February 8th, 2008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고,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Dark Night Journey

대안적 신학 교육

Friday, February 8th, 2008

Ched Myers, “Alternative Theological Education Between The Seminary, The Sanctuary and The Streets”
(via http://www.wordandworld.org/articles.shtml)

신학교와 제단과 거리의 세계는 대체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다. 서로 대화하지도 않거니와, 서로에 대해 책임감이 부족하다,

이러한 고립 현상은 모든 측면에서 신학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전문적인 신학자나 성서학자들은 실천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의 연구를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더 이상 지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위 과정을 마쳐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어서 일자리를 찾아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혹은 사회 운동에 참여하리라는 생각은 별로 갖지 않는다. 한편 구제와 정의를 위한 활동에 깊이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에 기반한 활동가 혹은 사회 활동가들은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이나 정치적 성찰을 무시하기로 악명 높다. 너무나 많은 일에 치여서 너무 피곤하다. 게다가 손에 쥐어지는 자료라는 것도 너무나 얄팍하다. 한편 교회의 신자들은 – 그 교단의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 학문적인 통찰이나 사회 활동가들의 도전을 그냥 무시하고 지낸다. 대신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에 푹 빠져 산다. 이러한 고립때문에 이 세 영역(신학교, 교회, 사회 현장)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총체적인 선교는 침체된다.

…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위한 쇄신의 핵심은 이 서로 고립된 세 영역이 원래 지닌 역량을 재통합시키는 작업이다.

교회를 개인적 사회적 변화의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의 대안적 신학 교육의 전통을 네 가지 운동에서 길어 올린다.

1. 흑인 교회의 “자유 학교” 전통, 특별히 시민 인권 운동 시기에 발전된…
2. 1차 세계 대전 시기 반전 운동과 급진적 제자 운동을 통해 나타난 “지하 신학교”와 “예언자들의 학교”의 실험, 이것들이 독일 나찌 치하에서 “고백 교회” 전통을 이끌어냈다.
3. 여성 운동에서 배우는 페미니스트 페다고지와 성적 소수자를 통해서 일어난 포용적 교회 운동
4.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 배우는 기초 공동체 운동과 해방 신학

우리 상황에서는, 최소한 우리 성공회 상황 안에서는 이 문제 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 경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전통을 길어 올려 제시할 것인가? 다산의 시골 학단, 민중 신학, 민중교회와 성공회 나눔의 집, 한국의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들 – 그러나 여전히 이런 전통들의 실행을 눈여겨 보는 처지에서 이 전통들이 바르게 작동할 역동성, 그리고 끊임없이 왜곡되는 구조는 어떻게 반성해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