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첫’ 소녀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

Saturday, April 2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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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녀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GFS (Girl’s Friendly Society) 동행사제)

꽤 야릇한 편지글 제목을 뽑았지만, 쓰기까지 여러모로 주저했어요. 꼭 한 해 전 우물가 소식지에 써달라 하여 쓴 글을 읽어보니 너무 많은 소망과 청을 GFS 회원들에게 던진 터라, 더는 적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게다가 올해 한국 GFS 지도사제를 맡으라는 명을 받은 후에 느낀 부담이 적지 않았고, 그동안 GFS 가 걸어온 길의 수고와 땀이 고마우면서도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으니까요.

“여기에 제가 무슨 말을 더 보탤까요?” “곁에서 이야기하시듯 써 주세요.” 글쓰기가 안 된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예의 밝은 웃음으로 건네는 격려의 말씀을 회장님과 회원들께서 들려주시더군요. 좀 멀리서 관망하며 뻔한 소리나 하는 일은 접고, 가까이서 뵙는 이에게 드리는 편지라도 써볼 량 마음을 다잡기로 했어요.

얼마 전 문학 관련 글을 쓰시는 교우 한 분이 자신의 글에 김혜순 시인의 “첫”이라는 시 한토막을 옮겨다 놓았더군요. 시 읽기를 좋아했던 시절이 아스라해져 버린 제 처지에 아주 반갑게 다가왔어요. 그 반가움에 시인의 어둡고도 깊은 뜻은 헤아리지 않고 ‘첫’이라는 말이 열어주는 추억과 생각에 저 자신을 멋대로 맡겨 읽었답니다.

“…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김혜순, “첫” 부분)

여기서 저는 GFS 와 관련하여 세 개의 “첫”을 생각했어요. 51년 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에서 작은 성공회의 더 작은 여성들이 시작한 한국 GFS 의 첫 마음과 다짐은 어땠을까요? 6년 전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탈북여성들의 삶을 도우려는 우물가 프로젝트의 첫 꿈과 각오는 어땠을까요? 그리고 한국의 활동 50년의 땀을 넘어서 100년을 향한 첫 희망은 무엇일까요?

GFS 의 ‘첫’ 마음을 시인의 언어 속에서 발견합니다. 세상 속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여성들에게 “엄마 젖”을 나누며, 서로 사랑으로 “뭉클뭉클” 한몸이 되고, 서로 울고 웃고 떠드는 사귐의 마음이지요.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처지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서로 짐을 나누어 지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며 걸은 세월이었어요. 그 ‘첫’ 걸음이 우리 땅에서만 50년을 넘어 이제는 원숙한 중년의 삶과 지혜를 얻었고요. 서로 짐을 나누어 질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지워진 멍에를 벗기는 일에도 애를 썼고, 쓰러진 이들을 보살피고 일으켜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지요. 이 거친 길은 자칫 우리 중년의 삶을 피곤하게 하여 자기끼리만 보살피는 생활로 이끌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세월의 쇠락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 되고 말 수도 있어요. 이때 우리는 ‘첫’ 마음에 담아서 ‘젖’을 물렸던 아픔과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간절한 아쉬움으로 세상 속 많은 여성과 “뭉클뭉클”하고 서로 “간지러움”을 나누는 삶을 회복했으면 합니다.

우물가 프로젝트의 ‘첫’ 각오는 참으로 감사하고 감동스러웠지요. 우리 역사에 새겨진 분담의 아픔, 여전히 이어지는 대결과 긴장, 그리고 그 안에서 특별히 고통받는 여성들은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눈감지 않고, 우리 ‘소녀 친구들’은 탈북 여성을 돕기 위해 우물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요. 분열과 아픔의 옛 역사를 매정한 마음으로 칼로 끊어내고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열려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어요. 여성들의 불안한 갈망을 평화롭고 기쁜 희망으로 바꾸는 그 소중한 발걸음은 이제 걸음마를 떼고 달음질쳐야 할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어린이로 치면 학교 갈 나이인가요? 좀 더 배우고 대화하고 사귀며, 더 큰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더 많이 품는 일로 커나갔으면 해요. 아직 어리고 젊은 ‘소녀 친구들’을 더 얻어서, 원숙하고 너그러운 지혜의 ‘소녀 친구들’이 품어주고 응원해주었으면 해요.

저 개인으로서는 GFS와 첫 인연이 지도사제라는 발령입니다. 귀하고 복된 일이에요.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꽤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꼭 짐을 나눠 주세요. 그 ‘첫’ 시작은 ‘지도사제’라는 말이 아니라 ‘동행사제’로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동행’은 깊고 아름다운 ‘친구’가 되는 길이니까요. 발령 후에 첫인사로 모인 ‘소녀 친구들’에게 물었어요. 지금까지 한국 ‘소녀 친구들’의 역사에서 전국 ‘지도사제’ 가운데 여성 사제가 있었느냐고요. 없었답니다. 그러니 다음에는 꼭 ‘첫’ 여성 동행 사제를 이 아름다운 모임에 모셔주시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여성 사제들이야말로 가장 멋지게 동행할 ‘소녀 친구’이니까요. 그 ‘첫’ 동행사제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여러 아픔의 기억과 희망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그 ‘첫’을 여는 순간, 이제 우리는 ‘첫’ 생각에 담긴 어린 처지를 잘라내고, 오히려 환하고 젊고 원숙한 삶을 열어가며 더 많은 ‘소녀 친구들’과 기쁨의 짐을 나누게 될 테니까요.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마음과 각오를 되새기고, 끊어낼 것은 끊어내고, 다시 시작할 일의 ‘첫 시작’을 과감하게 펼쳐갔으면 합니다. ‘첫’ 마음의 축복을 담아 ‘소녀 친구들’에게 깊은 동행의 인사를 드립니다.

  1. 성공회 전국 GFS 탈북여성지원 프로젝트 ‘우물가’ 소식지 2016년 봄 []

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Sunday, April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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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요한 21:1~19)1

그리스도교 신앙은 낯선 나그네가 던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펼쳐집니다. 낯익은 것을 떠나 새롭고 낯선 일에 마음을 열고 새 사람을 만나는 일로 교회는 성장합니다. 낯선 사람이 피워놓고 기다리는 모닥불에 지치고 젖은 자기 몸을 맡길 때, 그동안 믿고 누렸던 과거에서 벗어나 어색하고 불편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밥상에 초대받아 함께 음식을 마련하고 나눌 때, 우리 삶은 새로운 기운을 회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아침 밥상의 풍경이 주일에 모여 나누는 우리 성찬례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옵니다. 밤새 그물질했으나 허탕입니다. 삶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고 실패가 따릅니다. 실패에 따른 낙담과 배신에 따른 죄책감이 압도하면 익숙한 일도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그물 내릴 곳을 알려주자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자신의 한계와 실패를 인정할 때, 그동안 자신이 세운 목표와 욕심으로 가렸던 눈의 비늘을 뗐을 때, 오히려 새로운 시선과 깨달음을 얻습니다.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실마리는 그동안 자기 생각과 고집에 눈이 멀어 살피지 못했던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쁜 삶 탓에, 너무 익숙해서 허투루 대하고 잊고 사는 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낯익어서 낯설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기쁨 속에서든 절망의 아픔 속에서든 여전히 곁에서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낯익어 낯선 얼굴들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모닥불을 피워놓으십니다. 부끄러움의 바다에 뛰어들어 젖은 채로 떨지 말고, 과거를 불태우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손수 아침 밥상을 차리시면서도,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시며 그 밥상을 우리와 함께 만들고 완성하시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빵과 생선을 손수 ‘집어주시는’ 주님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의 손길이요, 우리가 밖을 향해 내밀어야 할 사랑의 손길입니다.

이 환대와 나눔의 밥상에서, 이제 예수님은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온전하게 일으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사랑 확인은 과거 세 번의 부인이 남겨놓은 죄책감을 완전히 없앱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는 ‘마음이 슬퍼지도록’ 애틋한 상태일 때라야 가능합니다. 또한, 자신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과 세상에 사랑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을 다시 세우고, 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끌어안도록 전도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다른 이들과 화해하며, 낯설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여 함께 밥상을 차려 봉헌하며 나누는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의 나눔이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며 선교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0일 부활 3주일 주보 []

더 깊은 곳으로 – 신앙의 사도직

Sunday, February 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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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곳으로 – 신앙의 사도직 (루가 5:1~11)1

“깊은 데로 가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평생 어부로 살았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어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 신앙생활의 의미와 방향을 보여줍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서 다시 도전하고 두려움 없이 사람을 만날 때, 신앙과 선교의 사도직이 펼쳐집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잡은 고기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만, 세상일이 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땀과 눈물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 더 많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은 절망감과 배신감의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 감정이 커서 다른 이의 조언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실패의 감정이 이끄는 자기 폐쇄의 유혹을 넘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 새로운 사건이 펼쳐집니다.

“깊은 데로 가라.” 예수님의 초대는 명백한 해결책이나 분명한 위로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이끄는 것처럼 들립니다. 더 깊은 데로, 더 멀리, 더 위험한 도전을 할 때, 자기 안위와 폐쇄의 그늘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바닥은 아직 꿈틀거리는 자기 본위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밑바닥입니다. 자기 중심성은 가볍고 표면적인 삶의 태도를 만듭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출렁거리기 쉽습니다.

깊은 곳은 위험할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깊이와 새로운 삶의 차원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절망이든 행복이든 그 깊은 곳에 닻을 내릴 때 우리 삶은 어떤 어려움에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깊은 곳에서 삶의 가장 큰 절망과 슬픔의 끝에 다다른 많은 사람을 선물로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과 손잡아 연대하여 바닥을 치고 떠오를 힘을 얻습니다.

신앙의 깊은 모험은 종교에 흔하게 퍼진 격려의 덕담이나 수사가 아름다운 잠언을 넘어섭니다. 우리 신앙의 배움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가 함께 대화하며 심화합니다. 신앙인은 어떤 선생의 가르침에 그저 감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신앙의 모험과 체험과 배움으로 두려움 없이 다른 낯선 이들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는 신앙인의 사도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실로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됩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2월 7일 연중 5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