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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Sunday, March 8th, 2015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출애 20:1~17, 요한 2:13~22)1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출애 20:2).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험하는 하느님께는 늘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붙은 이름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람과 깊은 인연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서 사람 일에 관여하고 관계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입니다. 이 역사와 사람에 관여하며 올바르게 관계하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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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본문인 십계명의 내용과 구조가 이채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을 일으킨 하느님을 확인한 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질서와 명령이 뒤따릅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편의와 계산에 따라 사람이 멋대로 정한 ‘다른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1계). ‘우상’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가치와 무게를 두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계).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멋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3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뒤 여섯 계명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질서,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깊이 존중합니다. 부모공경(5계)과 더불어 생명파괴와 사랑의 신뢰 관계를 배신하지 않고(6계, 7계), 부당한 재물 수익(8계)과 모함(9계)을 생활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소유의 탐욕을 향한 경고(10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런 욕심으로 숱하게 깨지는 인간사를 볼 때 마음 깊이 새길 계명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 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고 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하느님이라는 첫 시작의 표현과도 맞닿습니다. 쉬지 못하고 강요된 일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어 쉬게 하십니다. 네 번째 계명은 쉼을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습니다. 노예를 탈출시켜 쉼을 마련해 준 일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멈추어 쉬지 않으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귀 기울일 시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쉼’의 공간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여유를 다시 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물론이려니와 부모형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녀도 올바로 살필 수 없습니다.

쉼과 거룩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생각을 하느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놓고 쉬는 일이 거룩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쉼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고 마음의 불안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삶이 어려워집니다. 멈추고 쉬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은 이웃을 느린 시선으로 살피지 않으면, 우리 삶은 건강하거나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노여운 것은 떼어놓고 멈추어 기도하는 공간과 시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분주함과 손익계산이 신앙인을 옥죄면 복음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해 개인의 축복(‘유대인의 기적’)과 합리적 처세술(‘그리스인의 지혜’)에만 골몰하면, 세상 사람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일’이라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멈추어 쉬면서 자신을 덜어내어 역사의 하느님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마음과 생활을 따로 떼어 역사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세상의 생명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가 다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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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8일치 – 수정 []

이 잔을 마시겠느냐? – 신앙과 권력관계

Wednesday, March 4th, 2015

예레 18:18~20 / 시편 31:4~5, 14~18 / 마태 20:17~28

2015년 3월 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구원, 나의 바위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치맛바람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가족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오늘 복음 본문에는 제자 곁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간청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가족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가한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걱정돼서 아예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받으실 수난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열 두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비장미를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째 예고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장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께 뭔가를 청합니다. 그 어머니는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음은 알겠는데, 예수님으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죽게 되리라고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자, 이를 뜯어말리며 예수은님을 비난한 베드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큰 노여움이었습니다. 당신의 수제자를 두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장면이 사뭇 다릅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심정이 다 그러하리라고 이해하신 탓일까요? 어머니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 제자 형제를 어머니 앞에서 혼내지도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새롭습니다. 그 어머니가 무안해 할까 염려하셨는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나지막이 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 제자 형제들은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예, 마실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듣는 여러분이 다 당황스럽죠? 답답해서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시지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이해하시려는 듯이 여전히 나지막하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혼내셨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그래,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철없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은 자신을 빼놓고 다른 제자가 무슨 자리를 청탁하고, 예수님이 그 청을 들어주신다고 오해했는지, 그 제자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고뇌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자단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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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권과 자리에 관한 욕심과 오해가 맞물리자,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 내용과 뜻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관심과 생각과 기대에 골몰하면, 자기 눈과 귀가 금세 닫혀 버립니다. 제 눈과 귀가 닫힌 것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생각만 주장하곤 합니다. 신앙이든 주장이든, 자신의 경험과 고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옆에서 고쳐주며 도와주려고 해도 자기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는 누구보다도 잘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이니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깊어지고 시기와 질투만 커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의 수가 인구 사 분의 일이 되는 나라입니다. 사회든 조직이든 제대로 된 20%가 남은 80%를 이끌어간다는 어느 법칙을 생각하면, 한국 사회는 이미 25%가 넘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지닌 변화의 힘을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바른 목표를 이뤄나가는 ‘공동선’의 감각, ‘공공성’의 지표는 다른 여느 나라에 비해 매우 낮기만 합니다.

정치인이나 다른 종교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아들에게 한자리 주십사 하고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던 제자들 어머니의 마음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보노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이해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받은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여전히 철없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요, 마실 수 있고 말고요. 그 높은 자리 하나 얻는데, 쇳물이라도 못 마시겠어요?” 이런 태도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생각하여 열심을 내는 확신을 신앙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세상 여느 사람의 개인적인 소망과 성취 욕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복 받으리라 믿거나’ ‘축복의 약속을 믿거나’ ‘어떤 교리를 믿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약속을 믿고 ‘몸을 던져서 걷고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어떤 종교든 사이비가 됩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신앙은 미신이 됩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믿음과 따름이 분리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리와 안위에만 관심을 두는 한, 이런 종교생활은 사이비이고 미신입니다. 귀 막고 눈 가리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잔을 마시며 따르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눠 마시기를 원하는 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잔은 권력(power)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과 실천의 잔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권력과 힘을 가져다주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권력은 세상에서 경험한 권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권력, 남을 부리는 권력입니다.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군림하고,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 권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거저 받은 상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공로로, 자신의 덕행으로 스스로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그 힘과 자리의 행태를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자들처럼 자기는 누리고 다른 이들은 누르고, 자신은 꼼수를 쓰고 남에게는 고약한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진정한 힘(power)은 ‘나’의 부족함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하느님의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주신 힘과 자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힘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려고, 잔을 들어 다른 이들의 목을 축여주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힘, 하느님께서 새롭게 여시는 권력관계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우리와 나눠 마시려는 잔의 실체는 우리 자신의 아픔과 세상의 어둠입니다. 그것은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입니다. 어떤 종교적 깊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일상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그 아픔을 너무 쉽게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너무 쉽게 잊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그것들을 느끼는 통로로 삼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우리가 제출한 취업 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거절당하곤 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바라고 그것을 축하할 때, 우리 가운데는 실패하고 숨죽이며 눈물을 삼키는 가족, 친구, 이웃들이 많습니다. 멋진 세상을 즐기자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퉁이만 돌아도 온갖 정신적인 낙담과 경제적인 절망, 온갖 사회적 정치적 절망감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마실 잔은 바로 이들의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왜 우리가 굳이 그런 잔을 마셔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며 따르는 목적은 우리 삶 전체가 어쩌면 거절과 실패와 절망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의 공통점인 죽음과 소멸을 다시 발견하고, 그 운명의 슬픔을 나누고 있는 옆 사람과 이웃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 학자인 월터 브루그먼이 자신의 시 “재를 바르며”에서 읊었던 우리 운명에 새겨진 ‘재의 수요일’의 뜻이 새롭습니다.

“…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

이 운명을 깊이 되새기면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께서 마셨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잔을 나누어 마셔야 합니다.

이 성찬례의 자리에 초대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이 잔을 마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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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Nolde, Last Supper, 1909)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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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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