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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며 대화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Wednesday, January 28th, 2015

히브 10:11~18 / 시편 110:1~4 / 마르 4:1~2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2015년 1월 2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있고 입장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이미 있거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왜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이 생기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의문과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또는 더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궁색한 대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은 답이라기보다는 당장 겪는 시련과 고통에 어떤 위안을 주고 진정 효과를 내려는 진통제와 같은 위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가 치료 약은 아니라면서 처방조차 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문제의 원인과 답을 계속 찾고 그 치료책은 찾아야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을 살필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여러 종교가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종교의 유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여전히 중요한 일은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우리 삶을 멈추지 않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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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늘 복음 말씀은 매일 아침 성찬례에 참여하시는 열심을 지닌 신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태도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와 그 비유에 관한 풀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아 놓고 전하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왔다가 곧바로 말라 죽었고,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자고 씨를 뿌렸는데,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잃어버리는 씨도 많고 실패도 거듭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과 선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작으나마 좋은 땅에서 자라나 잃어버린 다른 씨앗을 보상하고도 남을 수확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 넘쳐나는 수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이제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기 하지 않겠다는 희망이 간절합니다.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겠다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 절망 끝에 나오는 희망의 수확으로 자기만 먹고살지 않고, 풍족하게 나누며 살겠다는 꿈이 다부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많은 분은 어쩌면 원래 비유 이야기인 첫째 부분보다, 하나의 해석인 둘째 부분에 더 익숙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풀어주신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 풀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쓴 마르코와 그 동료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전도와 선교활동의 어려움을 되새기면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땅의 여러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뜻을 붙여 풀어내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의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씨는 복음이고, 여러 가지 조건의 땅은 사람들의 신앙 태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신자가 되었지만 박해나 고생이 생길라치면 곧바로 포기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되 현실의 여러 걱정거리와 재물 욕심과 유혹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듬고 굳세게 하여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태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의 원뜻을 늘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온갖 고생과 절망의 상황이 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희망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확으로 많은 사람을 풍족히 먹이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꿈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뜻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지, 흔들리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해야 어려움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처지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다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일을 통해서 신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고 되돌아보게 하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바로 그런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특히 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가장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12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성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널리 퍼져나가던 설교 수도회 도미니코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머리를 흉하게 깎고 절제와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절제로 바로잡아 기운을 비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했습니다.

귀족이었던 가족은 토마스 수사를 잡아다가 집에 가둬놓고 수도회 생활 포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감옥을 탈출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쾰른과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를 넘나드는 굴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가 없는 교회는 그 기초가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부패와 타락이 스며듭니다. 토마스는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를 시기하며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러 번 교회 당국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당호하고 보호하며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토마스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제대로 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하며,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환히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축일은 성인 태어난 날도 아니요, 세상을 떠난 날도 아닙니다. 바로 <신학대전>이 처음 출간된 날입니다.

서방 교회 신학 전체를 주름잡던 그는 실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묻습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 토마스는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해 교회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뤄낸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교회 공의회에 참여하는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가 경험한 신비 체험을 적었습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이 쓴 것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맛보겠지요. 신앙이 흔들릴 일도 많고, 유혹과 시련이 많겠지요. 그때마다 새롭게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합니다. 온갖 시련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은 끝내 결실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여 반성하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쇄신해 나가는 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영급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감하게 자신 전체를 던지며 살아가다가, 삶 한가운데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수고를 잠시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의 말을 잘 따랐다. 너의 삶으로 나에 관해서 참 잘 썼다.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아무래도 우리는 토마스 성인을 따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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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Crivelli, 토마스 아퀴나스, 15세기)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Sunday, January 25th, 2015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마르 1:14~20)1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인간 밖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인간이 나서서 ‘신’을 찾는 것이 여러 종교의 특징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서서 인간을 찾습니다. 이를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 합니다. 이 부르심의 특징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방향이 다릅니다. 성서의 많은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뜻과 목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느 다른 종교와 그 방향의 달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사뭇 낯섭니다. 낯설어서 새롭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낯선 땅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 삼켜 그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겨우 밖으로 나옵니다. 그제야 요나가 가고 싶지 않던 곳에 가서 회개를 외치니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낯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을 던졌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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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도 낯선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낯설고 새롭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오고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미래나 외계에 있으리라 생각한 하늘나라가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다가왔다고 합니다. 경전의 글귀나 설법에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실은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행동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역시 낯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여느 종교가 약속하는 미래 보장이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미래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겪었던 삶도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확신하며 따랐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동료와 함께 자신을 던졌을 때라야, 우리는 오히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경험합니다.

보장성 보험의 종교가 아니라, 낯설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걷는 일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며 건네는 부르심과 동행의 초대에 우리는 지금 다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1월 25일치 []

치유의 은총 – 안과 밖을 함께 응시하는 일

Wednesday, January 14th, 2015

히브 2:14~18 / 시편 105:1~9 / 마르 1:29~39

2015년 1월 1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마르코 복음처럼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3년 정도 기간으로 그리는 다른 복음서의 구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지 없이 깨집니다. 예수님은, 시쳇말로, ‘짧고 굵게’ 모든 일을 1년 만에 끝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한가하게 예수님의 태어난 경위나 족보를 들먹일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자의 요한이 곧장 나타나 예수님을 예견하고, 그분께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첫 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고, 어부를 불러서 제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길을 서둘러 가십니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분입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분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빠른 발걸음과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장면 전환이 느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사건과 행동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여럿 등장합니다. 살펴보면, 호흡이 길어지는 곳에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르침 와중에 악령을 쫓아내서 사람을 정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여행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을 쓰다듬고 고쳐주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 예수님은 멈춰 서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깨진 곳에 예수님은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서는 큰소리로 꾸짖어 혼내시는가 하면, 몸이 아픈 곳에서는 조용히 곁으로 가서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는 길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짧은 생애의 긴박한 선교 사명 속에서도 그분의 눈과 귀와 감각은 늘 다른 사람과 그들의 처지를 향하여 세심하게 열려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의 방향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민감한 사람은 신경질적이며 자기방어적이기 쉽습니다. 자기만을 향하여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누군가 손만 대면 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그 처지에 민감한 사람은 그 사람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구석을 찾도록 이끕니다.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나 자신’도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이 정말로 아픈 곳이 어딘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동과 시선이 늘 두 겹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들어가서도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가르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찾는 공부와 대화 속에는 악령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령을 꾸짖어 내쫓았다는 점이 눈에 도드라집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쩌면 이는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생각과 고민을 함께 검증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며 종종 논쟁하는 일을 멈추면 악령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잡념이 악령이 되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설교 방송을 듣지 마시고 기도서를 읽으십시오. 솜사탕 같은 묵상집이나 예화집을 읽지 마시고 역사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면 좋은 선생이나 성직자를 찾아가 깊은 질문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령이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쉬러 들어가셔서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쉼과 치유는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쉼이 없으면 병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다른 사건입니다. 쉼이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손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쉰다는 일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박한 일에 눈감고 내팽개쳐 두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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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쉬어도 쉬지 않고 쉽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면서 쉬고, 온갖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쉽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급박한 부탁으로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방해받았다는 듯이 귀찮아하면서 쉽니다. 이것은 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 마음으로 소비하는 쾌락’입니다.

쉰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느리게 관찰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아내의 손놀림을 살피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선이 붙은 남편의 등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좁은 방에 들어가 수학책 영어책에 머리를 박고 말라가는 자녀를 잠시 불러내어 허튼 농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쉼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필요한 바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일이 쉼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치유도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의 치유를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자면,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에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당으로 모여서 성찬례로 새벽을 여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 이 새벽 미사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입니다. 예수님께도 그 빠른 길을 걷느라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 생각하기 쉬운 아까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잘 아셨고, 그 어둠 속에서 참 인간이셨던 당신이 지닌 어둠을 대면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어둠이든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든지,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조언과 겹치는 말입니다.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이것이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이 목표를 향해서 긴박하고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함에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이 비틀어지고 몸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 불완전함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완전성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대로 ‘피와 살’이 되셨습니다. 두 겹의 의미가 돋보입니다. ‘피와 살’은 불완전성과 한계, 유혹에 노출된 약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고통은 ‘피와 살’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살’이 되어서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피와 살’로 만든 이 성찬의 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 슬픔과 눈물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의 상처와 깨진 곳을 둘러보는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깨진 곳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구원이 빛, 치유의 빛, 너른 환대의 빛이 스며듭니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아직 소리 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어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바로 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