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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

Thursday, June 26th, 2014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0-42).

종종 편안하게 기대어 안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종교 경전에서 멋진 한 두 구절을 만나 마음을 위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거기다가 약속된 상까지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이런 사람 마음에 관하여 몹시도 단호한 선언을 던집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말씀 자체인 예수님의 삶과 그 도전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허투루 듣기 어렵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당부하시며, 그 선교 활동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를 염려하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그 당부와 염려와 격려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예언자와 옳은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그에 따른 보상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 신앙은 예수님을 환대하고,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환대하는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름 아니라, 예언자와 정의로운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환대하는 행동이 신앙이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과 교회가 참된 신앙의 공동체인지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현실의 교회 안에 예언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정의로운 사람이 발을 붙이고 있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환대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예언자로 살아가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작은 사람으로 겸손히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언자는 못 배웠거나 천한 신분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을 가진 사람들, 특히 종교와 정치의 여러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용기 있게 쓴소리를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대하기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교회는 썩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혼자서 이루는 옮음과 정의는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는 늘 공동체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공평한 대접과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를 에둘러서 정의를 말할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건물의 초석이 어긋나면 아무리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도 곧 위태로운 처지에 빠집니다. 교회는 이런 정의와 올바른 절차를 지키고 훈련하며, 교회 밖의 사회를 정의롭게 물들여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때라야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이방인, 재력과 지위가 딸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 대접에 고마워할 정도로 관심과 배려와 환대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찾으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친 신앙의 나그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환대하고 쉼터가 될 때라야, 교회는 참된 희망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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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이콘 – 삼위일체 –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우리 교회 안에서 이들을 환대하고 있나요? 이들은 우리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 괜히 풍파를 일으키는 얼치기라는 핀잔을 받고 있나요? 우리는 이처럼 예언자이고 정의롭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도대체 하느님에게서 어떤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1. 성공회신문 6월 28일치 []

경계의 파수꾼 –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Tuesday, June 24th, 2014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이사 40:1~11 / 시편 85:7~13 / 사도 13:14~26 / 루가 1:57~66,80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들 가운데 탄생 축일을 정하여 지키는 분은 성모 마리아(9월 8일)와 세례자 요한, 딱 두 분입니다. 정교회 성당에는 제대를 둘러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라는 성화벽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대 혹은 예수님의 이콘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양쪽 곁을 지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성서의 기록과 교회 전통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와 늘 비교하여 역사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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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겼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남성 제사장이었던 즈가리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요한의 수태고지를 믿지 못합니다. 그 탓에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났습니다. 젊은 여성이고 시골 아가씨였던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예수의 수태고지를 믿습니다. 마리아는 그 유명한 마리아 송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비교에서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제사장과 시골 무지렁이, 그리고 믿지 않음과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대와 성과 지위와 행동의 전환이 뚜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만두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기대하라고 외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을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신과 함께 이미 와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고 부르시며, 당신 자신과 하나가 된 ‘작은 그리스도’로 여기시고,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모본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 전통을 완성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정교회 전통에서는 9월 23일을 세례자 요한 수태고지로 지킵니다. 추분 때라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수태고지 3월 25일은 춘분 때라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의 선포’를 넘어서서 ‘말씀의 실천’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고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여러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중의 배신으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분은 이런 삶을 미리 알았을까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성모왕문, 5월 31일),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기뻐 뛰놀았습니다. 역사의 공명이 이 두 분에게서 시작되었고, 한 분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기꺼이 옛 역사를 마감하며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분은 그 희생을 이어받아 죽음과 부활로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런 비교는 두 분의 우열을 가리려는 일이 아닙니다.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할 때라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옛 시대가 자연스럽게 가고 새 시대가 자동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임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그다음에 오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자기 몸을 열었다면,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웠습니다.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 기쁘게 뛰놀았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 역사의 전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두고 신학자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는 시대와 시간의 경계를 헤아리는 세례자 요한인가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우리가 서 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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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나바 사도 – 위로와 격려의 벗

Wednesday, June 11th, 2014

2014년 6월 12일 수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욥기 29:11~16 / 시편 112 / 사도 11:19~30 / 요한 15:12~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6~37).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키는 사도 바르나바 성인에 관한 성서의 첫번째 기록입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다시 말해서, 나라를 잃고 나서 세계 각지에 퍼져서 다른 나라 문화와 언어권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대체로 ‘바르나바’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제사장직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쳐서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도왔습니다.

그의 이름을 풀이하면 흥미롭습니다. 우선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더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요셉’이라는 이름은 ‘요세스’로도 쓰였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바르나바’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사람은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 이름값은 사실 자신이 얻은 지위나 재산으로 얻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도 부모님께서 소망을 담아 주신 이름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겠고, 그렇게 사는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이름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불리며 좋은 기억을 남기는 삶이라는 뜻이겠지요.

제 이름 ‘낙현’은, 아버님께서 돌림자인 ‘물 락’(洛) 자에 ‘밝은 현’(炫)을 붙여 주셔서, 제 이름을 뜻은 ‘밝은 물’이 되었습니다. 밝게 살지 못하고 어둡게 사시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아마도 당신의 운명을 짐작하시고 아들이나마 밝게, 그리고 남에게 좋은 물이 되어 살라는 소망을 담아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에 누를 끼치지 살지 않나 종종 돌아보곤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이름 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요셉’처럼 그는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더해주는 삶’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는 바울로를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추천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바울로를 두려워 했습니다. 이때 바르나바는 바울로의 회심 사건을 소개하고 그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더해’ 주었습니다. 후에 하느님께서는 바울로와 더불어 바르나바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선교가 더 넓게 퍼지도록 ‘더해진’ 일이었습니다.

바르나바의 그의 이름 ‘요세스’처럼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로와 선교 여행의 단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어린 동료 요한 마르코가 미덥지 않아 그를 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바울로와 잠시 결별하고 내쳐진 요한 마르코를 자기 동료로 삼고 선교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의 실수를 너그럽게 헤아려 주었습니다. 마르코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후에 바울로는 마르코를 다시 인정하며 칭찬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선교 활동에서 다시 협력한 것은 물론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바르나바’로 불렸습니다. 성서는 그의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 번역합니다. 그의 이름은 여러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 특히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을 위로했던 선교 활동과 잘 어울립니다. 그는 낙심한 동료를 위로하고 함께해 주었습니다. 실은 ‘위로의 아들’보다 더 좋은 번역은 ‘격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로를 격려하며 사도들에게 소개했고, 요한 마르코를 격려해서 새로운 기회를 주었으며, 안티오키아에 있는 젊은 신앙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격려는 특정 소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목과 선교 활동은 격려의 사목이요, 격려의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도움을 주어 성공한 다른 사람의 성취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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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의 친구 메나스 이콘, 5세기, 콥틱)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벗’이라 부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마저도 ‘친구’라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로써는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고 하느님께서 주신을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벗, 예수와 친구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었고 선배였지만, 당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정보를 앞세워 다른 이들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습니다. 터 놓고 나누었습니다.

세상은 선생이나 어른이라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으로 사람을 부리려 합니다. 세상은 경력이나 신분이라는 우위를 얻으면 그것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자신을 내세우려 합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나누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세상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성취한 내용을 서열이니 직위니 나이니 하는 것으로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차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동료와 나누는 것도 차단하고 경력을 내세워 선을 긋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마저 ‘벗’이요 ‘친구’라 칭하며 동등하게 대하셨는데도, 선배랍시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답시고, 서열이 높답시고 반말로 하대합니다. 그걸 뭐라 하면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 ‘친근한 말’이라고 억지 변명을 일삼습니다. 서열에 물들어 무의식을 파고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깨닫지 못한 처사입니다. 예수님마저도 당신의 어린 ‘벗’들과 모든 것을 나눴는데도,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는데도” ‘너희는 모르는 게 있어,’ ‘그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일’이라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막습니다. 그 신앙과 영성의 경륜과 깊이가 의심 가는 대목입니다.

신앙인은 벗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잘못을 용기 있게 지적하되 용서하고, 더 좋은 것으로 ‘더해주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모든 이들을 동등한 벗으로 삼아 자신을 열어 대화하고 도전받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우리를 벗으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인들의 관계를 친구 사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르나바는 그 뜻을 잊지 않고 더해주고 용서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벗으로 살았습니다. 신앙인이라 자처한다면, 우리 각자가 처한 조직과 단체와 사회 안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이름값을 하며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