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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멘탈리티의 틀, 그리고 마커스 보그

Thursday, February 9th, 2012

십수 년 전, 동료와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여러 근본주의 ‘기독교’ 교단들이 성공회를 비난한다는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위 근본주의적 개신교는 아예 우리와 다른 종교라고 여기고 접근해야 해요. 실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에요.”

지금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한다. 근본주의라는 종교 안에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등의 내부 분파가 있을 뿐이다. 누구를 규정하고 구획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병증, 혹은 환부라고 분명히 진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인 탓에 다른 여러 건전한 종교들과도 친연성을 나누기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탓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려, 몇 해 전부터는 성공회 전통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는 ‘개신교 멘탈리티’의 폐해를 몇몇 분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물론 이때 ‘개신교 멘탈리티’란 영미에서 발전한 독특하고 배타적인 복음주의와 연결된다. 그 특징은 전례와 성사에 대한 무지와 거부, 전통에 대한 몰이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접근, 그리고 창조 신학과 성육신 신학을 오해한 지독한 영-육 이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런 특정 형태의 ‘개신교 멘탈리티’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종종 진보 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이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도 비슷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언젠가 적은 대로, 전례적(liturgical) 전통의 교회와 비-전례적 전통의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분은 위에서 규정한 근본주의나 개신교 멘탈리티에 대한 언급에 그대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이해와 형성, 그 실천에 대한 접근에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신앙 형성의 틀이라고 할 만하다. 이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좀 더 적극 펼쳐 나가야 할 참이다.

이 와중에, 마커스 보그의 책 한 권을 들춘다. 성공회 신자인 마커스 보그는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한 짧은 소개와 우리말로 번역된 도서 목록은 여기를 참고할 수 있다. 그 역시 성서와 전통을 보는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전개한다. 현재 통용되는 여러 신앙의 언어와 용어, 개념들이 어떤 틀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아래 이식된 한국 교회에도 적절한 참고서일 것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인듯 하니, 우선 그 고민을 그 책 서문을 통해서 나누려 옮긴다.

마커스 보그,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그 의미와 힘을 잃었는가?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서문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우리 시대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 기본 어휘의 많은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용어들이다. 구원, 구원받다, 희생, 구속자, 구속, 의로움, 회개, 자비, 죄, 용서, 중생, 재림,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서. 게다가 신조, 주님의 기도, 전례 등과 같은 용어들도 그 성서적,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심각하게 왜곡된 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첫째는 근대 세계에 등장한, 언어에 대한 문자주의이다.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슷하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어떤 일반적 틀에서 해석하는 문제다. 나는 이를 “천당과 지옥”의 틀이라고 부르는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종종 그러하듯,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약 절반(아마 더 많을 것이다)의 미국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천당과 지옥’이라는 틀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틀은 죽음 뒤의 문제, 죄, 용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믿음 등을 강조한다. 다른 절반(아마 더 적을 것이다)의 신자들은 이런 틀에 당황해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로 옮겨 간 이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성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대안이 될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길어올린 것이다.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현대적 의미와 그와는 아주 다른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거듭해서,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이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거듭해서,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좀 더 오래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들을 21세기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과 연결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풍요로움과 지혜를 구원하여 재선포하려는 것이다. 실은 이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를 구원하기”라고 붙이려 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받아야 할 말임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구원자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성서적인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다시 말해 ‘구원한다’는 말은 노예 상태, 감금 상태,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로부터 구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구원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이미 예수, 하느님,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핵심에 관한 책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사안들은 여기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전의 책에 나온 사안을 다룰 때에도, 그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각 장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장은 보통 책의 한 장 길이가 되겠지만, 한 두 쪽인 것들도 있다. 다루는 사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설명이 필요하느냐에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이랄 수도 있다. 이런 입문서는 독서법을 가르친다. 독서는 낱말을 구분하고 발음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기존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읽고 듣고,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우리 신앙의 언어를 다시 읽고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Saturday, December 24th, 2011

미국 성공회 캐서린 쇼리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이사 62:11).

예수님에 앞서 위대한 예언자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와 구원받은 받은 백성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성탄 성가를 부르며 그 열망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날의 희망과 두려움이 이 밤에 만나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랍 세계와 동유럽의 격변, 그리고 전 세계적인 점령 운동 속에서 그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의 모든 결정 과정과 창조 세계의 선물을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해하는 구원은 바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을 위한 도움과 치유가 성육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 가난하고 천한 부부 사이에 흉흉한 소문을 갖고 태어난 나약한 아기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성육신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방법만이 모든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내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구원은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성취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치유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미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선포(이사 62:6-12)는 성탄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행여 그걸 기회가 없다면, 전체를 찾아 읽어 봅시다. 그 구원이 어떠한지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셨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외국인들에게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이사 62:8-9)

이것은 순진하게 자기만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늘 고통당하고 외세에 점령당하며, 힘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로와 치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생산품을 권력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현실의 두려움을 이제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모든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오실 때, 그 사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너희를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이라 부르겠고,
이제 너희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이사 62:1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가진 열망을 선포하며 실현하십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마련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서로 맺는 관계를 똑같이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이 오십니다. 이 치유를 환영하시겠습니까?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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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ScsJn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방문 설교

Sunday, October 9th, 2011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전한 설교를 우리말로 옮겨 싣는다. 약 1만 5천여 명이 운집한 경기장에서 열린 성찬례에서 윌리암스 대주교는 짐바브웨의 폭압적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짐바브웨 하라레 교구의 모든 시설을 사적으로 가로채서 파직된 주교 쿠농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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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짐바브웨는 독재자 무가베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인적 인플레로 고통 받고 있다. 게다가 이 독재자를 옹호해 온 하라레 성공회 교구 전직 주교였던 놀버트 쿠농가는 은퇴를 거부하고 하라레 교구의 모든 교회와 교회 부속 재산을 사유화했다. 하라레 교회 성공회 신자들과 새로운 주교가 이를 정상화하려 했지만, 쿠농가는 무가베 정권을 등에 업고 예배드리는 신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거나 교회를 폐쇄했다. 아직도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미사를 드려야 한다.

그동안 성공회 여러 지도자들은 무가베 정권의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례로 영국 성공회 요크 교구의 센타무 대주교는 방송에 나와 자신의 성직 칼라를 자르면서, 무가베가 퇴진할 때까지 성직 칼라를 하지 않겠다고도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설교이지만, 윌리암스 대주교의 설교는 세계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그의 외침은 지구 반대편의 우리 땅과 교회에도 해당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 사명을 잘 기억하며 늘 되새기고 있는가? 우리 삶에 그것을 비추어 성찰하고 있는가? 그저 립서비스와 수사에 우리의 부정직을 숨기고는 있지 않은가? 혹은 사회의 정의를 위한 주장을 맥락이나 내용 없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며,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는가? 돌아볼 일이 꽤 많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하라레, 2011년 10월 9일)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이 들려준 큰 혼인 잔치 이야기는 정말로 흥겨우면서도, 가장 도발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에게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는 어느 큰 임금이 자신이 마련한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려 한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잔치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와서 먹을 만큼 음식도 넉넉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손님들이 흥겹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모두 말이죠.

이제 반응이 하나 둘 돌아옵니다. 임금이 기대한 손님들은 임금의 관대한 초대를 거절할 핑계를 찾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관심에 너무나 몰두해서 이 멋지고 공적인 축하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모든 문을 완전히 열어서 잔치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초대합니다. 고픈 배를 움켜쥔 이들도 문지방을 넘어오고,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사람도 오도록 하고, 누구나 와서 그 잔치를 즐기라고 합니다. 임금이 바라는 것은 그가 준 선물을 사람들이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받아서 기뻐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이 세계에 부어 주셨습니다. 천연자원이라는 선물, 인간의 기술이라는 선물, 인간의 사랑과 이해라는 선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선물을 써서 우리가 모두 함께 기쁨을 누리길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성숙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기뻐하고 서로에게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정의입니다. 그것은 공정함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정의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어떤 만족감을 갖는 상황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걸어 잠그려는 사람들의 방해가 없는 상태입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13)고 주님께서는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과 너그러움을 나누라는 그분의 초대에 어떤 이들이 거절하는 상황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도 쉽게 이러한 사랑을 가로막고, 다가오는 사람마저 막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여러분 얼굴 앞에서 그 문들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입네, 성공회 신자입네 하는 사람들인 것 말이죠. 그들의 탐욕과 폭력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거절하는지, 그래서 여러분이 드리려는 예배를 막고, 이 나라의 교회와 학교와 병원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선교적 증언을 훼방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이 비유 이야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그분의 잔치에 초대하시려는 의지는 강력한 것이어서 상식도 없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러한 공격들을 종내에 이기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의심으로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셨듯이, 여러분을 짓누르려는 온갖 획책이 있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보이셨던 계시처럼, 주님께서는 이제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문이요, 자비의 문이요, 그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러분의 교회 문이 닫히는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은 신앙과 인내를 가지고 열린 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초석을 둔 영적 기반이 바로 교회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열어 놓으신 문을 두고 감사하는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과 박해자들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은 너희에게도 열려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우둔한 폭력을 그만두고 돌아오라.”

하느님의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이러한 선물을 망가뜨리고 훼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향한 약속과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잘못과 죄를 인정하기 그토록 어렵단 말입니까? 도전과 비판의 목소리를 침묵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 일들이 잦습니다. 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정말로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먹이기도 넘칠 만큼 주셨습니다. 이 땅의 광물 자원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이 땅은 사람들을 먹이는 데 쓰이지 않고, 쓸모없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광물 자원이 어떻게 저주로 바뀌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싸움에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에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몇 달 전, 콩고에 갔을 때 광물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생겨난 비극적인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울부짖는 우리 창조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요? 아벨의 피가 땅 밑에서 울부짖는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준 선물을 가지고 피를 뿌리는 전쟁을 일으키는가? 어찌하여 너희가 가진 것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그것을 사리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과거에 이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식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 탐욕을 부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선임 마이클 램지 대주교님처럼 분명하게 인정한 유럽인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들의 지배가 몇 대에 걸쳐 지속된 후, “우리 유럽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프리카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불안에 떠는 지배 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원주민들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리와 존엄의 희망과 정치적 자유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이 또 다른 형태의 무법적 권력으로 대치되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요.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연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하느님은 또한 우리에게 외부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연대의 선물과 자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일어서서 정치 지도자들과 지배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들어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들어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님의 백성이 정의와 평화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를 갈망하는 그 목소리를 들어라.”

이 성찬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모든 사람의 배를 불리는 잔치입니다. 여기에는 인종도, 부족도, 정당의 구분도 없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폭력과 보복이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은총을 바라는 죄인들로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이 세계에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평등하게 마련된 하느님의 식탁에 빈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해야 할 일은 정치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창조의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와 기쁨의 공동체적 관계, 이 우주적 잔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전망 속에서라야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폭력에 반대하라고 촉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년에 선거를 앞둔 이 나라에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가진 깊은 존엄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의 안녕을 내팽개치는 일, 사람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일을 완전히 멈출 수 있습니다.

이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려 합니다. 우리는 이 유혈의 공포 속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길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막고 닫을 수 없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든 이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 지독한 우리의 대적자들에게도 그분의 평화 속에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길을 돌이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서신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지요?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한 말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런 것들로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위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폭력과 유혈의 갈등, 그리고 과열된 정치적 갈등의 수사가 만드는 거짓 전율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화해의 희망으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이기도 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도움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교회는 희망의 원천이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근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 개인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의 시선과 봉사가 그들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는 그 충일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이 나라에서는 최근에 여러분과 같은 성공회 형제와 자매들이 그 실천적인 봉사에서 더더욱 적극적인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이 사회 전체에 되새겨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한 세대를 파괴하는 HIV/에이즈의 확산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여러분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악화시키는 문제들과 이 현실을 정직하게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도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들의 가치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문제, 편견, 그리고 미신을 분쇄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벗된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 교회와 이 위대하고도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사는 이웃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하루하루 여러분은 불의와 직면하고 있으며, 바울로 성인이 말씀하신 “타락한 형제들”의 오만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배부른 자들에게서 비웃음 소리를 들었고, 교만한 자들에게서 모멸을 받았습니다”(시편 123:3-4). 그러나 알아주십시오. 여러분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와 너그러움과 끈질김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불확실성과 계속되는 공격의 위협으로 고문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세계 성공회의 모든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시어 그분 아들의 자리에 사람들을 앉게 하시고,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뤄진 하늘과 땅의 혼인을 축하하도록 하려는 그분의 뜻은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기다렸더니,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오늘 우리는 이 성찬례 안에서 그 구원과 천상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치유를 위한 하느님의 초대는 폭력과 불의의 길을 멀리 떨쳐 버리고, 우리 모임 속에서 다시 한번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울부짖어야 할 말과 더불어,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원문: http://goo.gl/2btrR
번역: 주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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