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R. S. 토마스 – 빈 성당

Wednesday, September 28th, 2011

빈 성당

R. S. 토마스

그들은 이 돌을 덫처럼 내려 놓았지
그를 위해, 촛불로 그를 유혹하려고
마치 어떤 큰 나방처럼 그가 어둠에서 나와
그 불꽃을 물리라 생각하며
아, 그는 자신을 불태웠으니
인간의 불꽃 앞에서 안에서
도망쳤으니, 찢겨진 이유를 남기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우리가 던진 미끼로는. 그러면, 왜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내 기도를 내려치고 있는가? 돌
심장 위에. 그 기도 가운데 하나가
불을 당겨주리라는 희망을 아직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그래서
그 밝게 비추인 벽에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더 큰 어떤 분의
그늘을 던지려는 것인가?


R.S. Thomas (1913-2000), “Empty Church”
번역: 주낙현 신부

선교를 향한 리더십과 영성

Wednesday, June 15th, 201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선교 Missio Dei 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참여하고 실천하는 행동을 ‘선교’(mission)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mission)은 선교이다. 교회의 여러 구조와 실천은, 그 위계질서를 포함하여, 이 선교 사명을 위한 일에 종속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전망 속에 신자의 삶, 사목자의 삶, 교회의 삶이 있다. 교회의 삶과 실천은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다. 그러니 사목과 전례, 교육과 영성, 이런 실천도 모두 하느님의 선교 지평에서 자리 잡아야 한다. 교회의 위계질서, 특히 리더십은 더할 나위가 없다. 교회의 선교 지향과 실천에서 지도자와 그 리더십은 너무도 중요하다.

멀리 뉴질랜드에서 글 하나가 배달된다. 가만보니 2년 전에 회의차 갔다가 만났던 신부님의 글이다.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제 3회(재속회) 회원이고 오랫동안 청소년과 청년 선교에 몸을 바친 분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뉴질랜드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청소년-청년 선교가 쉽지 않다는 것. 교구나 교회 지도자들은 변화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함께 변화하려 하지 않으니, 답보를 거듭한다 했다.

그 탓일까? 그는 리더십에 대한 체크 리스트를 제공한다. 돌아볼 점이 많다. 발설하지 못할 여러 생각이 겹친다. 다만, 이를 통해서 우리도 우리 처지에 맞는 체크 리스트를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것으로 교회 내의 지도자인 나 자신, 신자들, 그리고 여러 형태의 지도자들에게도 돌아보고 갖추라고 요구했으면 한다.

2020년의 리더십 – 지도자상

  • 무엇보다 먼저, 작금의 현실 교회에 물들지 않은 좀 더 젊은 리더십
  • 선교에 집중하며, 특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선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리더십
  • 성공회 전통을 그저 보존하려고만 들지 않는 리더십
  • 하느님께서 성공회 전통 안에서/통해서 세상에 생명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믿음이 있는 리더십
  • 깊은 기도에서 나온 리더십
  •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리더십
  •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십
  •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물든 리더십 – 하느님은 우리가 종종 사랑하기 어려운 이들마저도 사랑하신다.
  • 복음을 설교하기보다는 복음을 사는 데 관심을 둔 리더십
  • 당연히 여기지 않고, 물음을 던지는 리더십
  • 혼자서 감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리더십
  • 팀과 일하는 리더십
  • 사람들을 도와서 비전과 일이 가능하도록 돕는 리더십
  • 사람들이 처한 사목 영역에서 사람을 키우고 자료를 제공하는 리더십
  • 자기 또래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함께하려는 리더십
  • 선교는 모든 세대와 함께,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확신이 분명한 리더십

참고: 이 블로그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여기저기서 다뤘다. 성직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모든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영성적인 면에서 바라본 것들을 선별해 놓는다.

창조, 인간-몸, 물질: 윌리암스 & 슈메만

Monday, June 13th, 2011

“창조 이야기, 성육신 이야기,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누리는 친교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이야기 전체가 전하는 바는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신다. 마치 우리가 하느님이기를, 마치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 만드신 하느님의 선물에 우리가 조건 없이 응답하기를. 우리는 창조되었기에 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배우며 하느님의 깊은 사랑 안으로 들어가 성장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은 이것을 가르쳐서 그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누군가의 열망 속에 있으며, 기쁨의 존재인 것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 Rowan Williams, “Body’s Grace” (1989)

“우주에서 인간의 독특한 위치는 인간만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음식과 생명에 대해서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데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찬미(blessing)로 하느님의 축복(blessing)에 응답한다. 에덴동산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사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이름은 사물 자체의 지극한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이름 때문에,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서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은 ‘종교적’이거나 ‘제의적’인 것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길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축복하셨다. 인간을 축복하셨다. 제7일째(시간)를 축복하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선함으로 모든 것을 채우셨고, ‘참 좋은 것’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축복되고 거룩한 세상을 주신 하느님께 드릴 인간의 오직 자연스러운(초자연적이 아닌) 응답은 하느님께 축복과 찬미를 돌려 드리는 일이다. 감사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는 방법으로 우리 역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러한 감사와 예배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알고, 세상에 이름을 주고, 세상을 소유한다…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호모 아도란스’(예배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세상의 중심에 서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동, 즉 하느님에게서 받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동 속에서 세상을 일치시킨다. 그리고 성찬례를 통하여 세상을 채움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삶과 생명을 변화시킨다. 세계에서 받은 생명과 삶을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누리는 생명과 삶으로 변화시킨다. 창조된 세상은 ‘물질’이다. 이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성찬례의 재료이다.” – Alexander Schmemann, For the Life of the World.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