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오든 – “장례식 블루스” (Funeral Blues)

Tuesday, June 29th, 2010

사소한 글을 하나 적고 몇 가지를 살피는 참에, 어느 연예인의 부고와 영상 하나가 겹쳐 들어왔다. 젊은 죽음이니 더욱 안타깝다. 기쁨과 사랑을 함께 주고 받았던 가까운 이들에게 큰 슬픔과 아픔으로 남을 것이다. 겹쳐진 영상에 담긴 시를 다시 찾아 읽고는 번역하여 여기에 옮긴다. 망자에게는 평화의 안식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장례식 블루스

W.H. 오든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도 끊어 버려라.
개에게도 뼈다귀를 던져 주어 짖지 않도록 하여라.
피아노를 멈추고 드럼도 덮어라
관을 내 놓고, 슬퍼하는 이들을 들여라.

비행기들이 머리 위를 신음하듯 돌게 하여
하늘에 부고를 쓰게 하라. 그가 죽었다고.
비둘기들의 하얀 목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교통 경관들은 검은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 나의 남쪽, 나의 동쪽, 나의 서쪽이었느니,
내가 일하는 나날과 나의 일요일 휴식,
나의 한낮, 나의 한밤, 나의 말, 나의 노래였느니,
사랑이 영원할 줄 생각했으나, 내가 틀렸네.

별들도 지금은 바라지 않나니, 모두 치워 버려라
달을 가리고, 해도 없애 버려라
바다를 쏟아버리고, 숲을 밀어 버려라.
이제 그 어떤 것도 덕이 될 수 없느니.

--

W. H. Auden, “Funeral Blues” (1937/1940) 부분

교회와 사제직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Monday, June 28th, 2010

지난달부터 성직 서품이 곳곳에서 있다. 새로운 사제들이 나오고, 부제들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서품 전례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겼을 테다. 예년과는 달리 몸이 참석할 수 없으니, 멀리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합하여 축복한다.

어떤 이는 성직자들 안에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해온다. 한 개인의 지향과 영성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신자요, 사목자이겠으나, 특정한 전통의 공동체(성공회) 안에 녹아들어 그 책임을 지는 ‘사제’인지는 모르겠다는 고민 어린 비평이다. 어느 틈엔가 어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빌미로, 사제 개인들은 공동체의 전통 안에서 받은 사제직의 실천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곤 한다는 불만이다. 시쳇말로, ‘몸은 이 교단에 두어 옷까지 걸쳐 입었는데, 사고와 행동은 전혀 딴 동네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본다. 사제직 ‘본연’에 대한 끝없는 반성은 필수적이다. 규정된 기능과 행동만을 요구하는 교회 조직의 권위주의가 세를 부릴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런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 저항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만연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특정 전통의 공동체 안으로 서품받은 일을 잊거나, 애써 모른 체하려는 게 보인다는 걱정이 일기도 한다. 대체로 ‘본질주의’는 핑계의 한 방법이다. 사정이 걱정하는 그대로라면, ‘평신도’ 사목자로 남되, 그 특정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로는 자처하지는 말 일이다. 어쨌든, 그 의미의 ‘본연’과 그 특정한 공동체 전통의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매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사제직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평신도로 식별하여 살았던, 스트링펠로우에게서 몇 마디를 인용하여 되새긴다. 이는 교회와 사제직에 대한 ‘본연’의 고민일 테니, 다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이를 씨줄 삼아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성직자와 교회는 각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드러내야 하는 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는 교회 전통 안에서 경험하고 논의하며 정리한 내용들과, 서로 다른 맥락과 현장의 경험과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화를 부추겨 계속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서가 기술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교류와 격동, 갈등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대신해서 살아간다.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낯선 이요, 이방인이다. 사회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세상의 사람들과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져서 그 사회에 거스르는 행동을 피하는 도피주의의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은 성사적 예배로 모여서,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몸의 구성원들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사제직에 서품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그 사제직과 사목 활동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을 세상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임(congregation)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그 몸의 구성원에게 펼치는 사목 활동이다. 그 관계의 양상은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교회,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교회의 극도로 복잡한 생명 활동을 향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여, 그들이 세상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게 쓰도록 돕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고해 성사의 활동이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임무와 증언을 듣고, 그 몸의 구성원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뤄가야 할 다른 모든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사목 활동은 교회의 전통, 즉 성령 강림 사건 이래 펼쳐진 선교 사명과 그 일관성을 보살피며 지켜나가는 활동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과 거룩함에 투신하는 것이다.

William Stringfellow. A Private and Public Faith, 1962.

쇼리 주교, 영국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설교

Wednesday, June 16th, 2010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가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 미사에서 전한 설교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쇼리 주교의 방문과 설교, 성찬례 집전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논쟁들이 있다고 하나, 기회가 닿으면 그 논란의 지경을 살피겠고, 우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교문 및 설교 녹음(영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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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후 2주일
2사무 11:26-12:10 / 갈라 2:15-끝 / 루가 7:36-8:3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The Most Revd Katharine Jefferts Schori
Presiding Bishop of The Episcopal Church

저는 악명 높은 곳에서 왔습니다.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적인 네바다에서 교구장 주교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에 적용하는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을 알코올중독자나 약물중독자들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 있을 때, 꽤 널리 돌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이른바 마담이라는 포주와 그 고용인들에게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따뜻한 환대를 통해 밤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들러 쉬도록 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의 저녁 식사 참석자처럼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가 들인거야?’ 그래서 그 여성들은 그 저녁 식탁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성공회 어느 부류는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꼭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물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요. 이런 식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응답하고, 예배에 쓰이는 여러 책을 적절하게 잘 알아서 찾아야 해. 앞문은 절대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늘 앉는 자기 자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팔을 펴서 누구나 환영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압니다.

제게는 연세 지긋한 친구 한 분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대학 채플린으로 일하시던 매우 기발한 신부님이십니다. 한번은 이 분이 미국 횡단 여행을 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캠핑해야 해서 매일 씻지는 못했죠. 그런데 성직 셔츠를 입고 교회에 가면 다른 대접을 받더라는 거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로드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님은 임기 중 마지막 안식년의 일부를 노숙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여성 주교인 이 분은 자기 교구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자고, 주일에는 그 위층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노숙인인 자신을 환영해 잘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줄 바로 옆에 앉은 냄새 나는 노숙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거나, 기꺼이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불청객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타자’를 두려워하도록 할까요? 우리의 오랜 유전자 기억에는 낯선 이를 만나면 곧장 각성 상태로 이끄는 어떤 장치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존 장치입니다. 낯선 이를 경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죄를 두고 냉큼 심판하려는 비약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경쟁하려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이쿠, 고맙게도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죄 많은 여자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시몬의 집을 배회하던 그 여인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여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그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저런 저런, 저 여자 이제 향유를 발라주고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 보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작자들인 줄 알겠네, 알겠어 할 것 아냐? 참 내.”

저들이 과도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덮어씌우는 경멸은 아직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응답이 바로 그 여인의 용서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축하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걸 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 대한 용서의 증거가 이미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꾹꾹 눌러 담고도 넘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머리카락과 나르드 향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서 우리 자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우리 주변 사람들 속에서 그 두려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다른 식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거리의 여인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용서받은 여인은 탕자의 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오누이들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껍데기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 가족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껍데기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그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로 우리와 마음 깊이 ‘고향으로 환대’하는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나가도록 하는 일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릅쓸 모든 위험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로 성인께서 갈라디아 서신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자신이 율법에서 지시하는 세부 사항을 지키는 것이 마치 베니어합판의 여러 층을 쌓아 붙이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쌓여가는 층들이 합판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층들은 인간 안에서 벗겨져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투명함과 맞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층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리로 이끕니다. 바울로 성인은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사람 안에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속 깊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망을 되새기고, 그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자비심입니다. 바로, 사랑에 우리를 여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몰인정한 주인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식사 잔치는 훨씬 더 흥미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이들을 저버린다면 자비심의 실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요, 그 여인의 눈물이 흘러 넘친 것처럼, 그들도 흘러 넘칠 가능성입니다. 껍데기가 벗겨나가도록 놔두는 일은 아주 모험 어린 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그 껍질 밑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동적인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이 저녁 잔치를 시몬에 남겨 두시고, 다른 곳을 방문하러 떠나십니다. 방탕한 이를 향한 사랑과 방탕한 이를 향한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그분의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분의 식탁 동료는, 그 열두 명과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이었습니다. 흠… 굳세고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셋은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그들은 그 공동체를 돕고 먹였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깊이 받아들여지고 깊은 사랑을 알게 되어 치유와 용서를 얻은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찍어 내려는 자기 방어적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눈물을 감추거나 값비싼 향유를 숨겨두는 일이 사랑을 펼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마련된 자리로 이끌었으며, 이로써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염려마저 치유했습니다. 이 식탁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눈물과 떠돌이의 입맞춤, 그리고 고향의 맛 난 냄새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시렵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로이 나가십시오. 평화에 기대어 낯선 세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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