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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Wednesday,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

갓 댐 어게인? – 라이트 목사와 오바마 의원

Wednesday, April 30th, 2008

라이트 목사(the Rev. Jeremiah Wright)와 오바마가 다시 뉴스에 떠오르며, 그 둘의 관계는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설교 시간에 “갓 댐 어메리카!”를 외치는 목사를 “영적 멘토로 두고 있다”는 오바마를 향한 파상공세가 계속 이어진 탓이다.

문제의 발단은 몇몇 흰 여우들의 짓이었다. 미국 대선에서 미국 정치의 “백인” 정통성이 흔들릴 것이라 우려하는 이 못된 것들이 오바마의 상승세를 꺽어보려고 2003년에 행한 라이트 목사의 설교 한 토막을 갖고 쉬지 않고 TV에 틀어댔고, 오바마는 그와 조금의 거리를 두었다. (관련글)

그러다 며칠 전 라이트 목사는 미국 기자 클럽 회견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라이트 목사 자신이나, 오바마를 향한 것이 아니라, 흑인 교회와 흑인 전통에 대한 공격이라고 맞받아쳤다. 언론이 다시 뉴스로 가공하는 것은 라이트 목사가 미국 정부가 AIDS를 흑인에게 퍼뜨렸다는 음모이론을 설교에서 언급했으며, 20여년 전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던 미국 이슬람 지도자 파라칸(Louis Farrakhan)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오바마 진영의 반응은 민첩했고 지난 번처럼 얼버무리지 않았다. 언론에서 이런 선정적인 이미지들이 확산되고 적대감들고 일어서는 판에, 자신의 얼굴과 겹쳐지는 라이트 목사를 단호히 잘라내겠다는 눈치다. 이를 발표하는 오바마의 얼굴을 굳어 있었다. 자신은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DNA 자체가 분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면서, 라이트 목사가 자신을 모르고 있었으며, 자신도 라이트 목사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까지 했다.

이게 오바마를 위기에서 구해줄까? 오히려 그는 라이트 목사가 말한대로 스스로 “정치인”임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되레 그에게 “희망”을 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접게 만들 것 같다.

오바마는 덫에 걸렸다. 미국의 안방 뉴스를 점령한 흰둥이 언론들이 짐짓 고상한 매너를 들먹이며 라이트 목사를 공격하지만, 이들의 내면을 움직이는 건 그저 ‘깜둥이'(니그로)들이 나서는 게 꼴보기 싫은 거다. 오바마는 정치 공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증오를 용인한 것이다.

오바마가 틀렸다.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를 알고,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를 모른다.

라이트 목사는 종교인으로서 권력을 대하는 자신과,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대하는 오바마를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정치인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았다. 또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가 당선되면 그에게도 도전을 할 것이라고 비쳤다. 그의 비판과 실천은 일관성이 있다.

언론은 다시 라이트 목사의 기자 클럽 질의응답을 반복적으로 비추고, 오바마의 굳은 얼굴을 포개 놓는다. 그리고 “오바마의 해명이 백인 유권자들을 달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보도를 마친다. 백인들을 달래는 게 오바마 정치의 목표인가?

최소한 라이트 목사는 현실의 정치 공학에 순진한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너머(beyond)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흑인 교회와 그 해방신학의 전통과 영성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하고 나가면 오바마가 아니라, 오바마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고질적인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백인 헤게모니, 그리고 두려움에 근거한 정치(이게 바로 라이트 목사가 미국을 테러리즘의 국가로 지칭하는 이유다)를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판단이다.

라이트 목사는 질문에 대해서 “그 설교 전체를 다 들어봤냐?” “너 그 책 읽어봤냐?” “너 흑인 해방 신학에 대해서 아느냐?”고 오히려 묻는다. 맥락을 애써 무시고 멋대로 골라내서 읽어서 꼬투리잡아 공격하려는 수작이 허튼 소리라고 맞받아친다. 물론 “나, 신학교에서 라틴어도 공부했어”하고 대답하는 닭대가리도 있지만.

라이트 목사의 일관된 신학과 실천, 그리고 백인 헤게모니에 대한 그 비판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려면 빌 모이어스(Bill Moyers)와 행한 최근 인터뷰를 보면 된다. 그 인터뷰는 균형 잡혀 있고,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따른 그의 일관적인 신학과 사목 활동을 잘 드러낸다. 미국의 (흑인) 해방신학의 전통에 대한 탁월하게 정리된 강의 한편을 생생하게 듣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강의 이상의 힘이 있다. 중간에 섞인 그의 설교는 내내 나를 눈물 짓게 했다.

I have a friend who every time you greet him, every time you ask him how you doing, he answers, just trying to make it man, just trying to make it.

인터뷰 내용을 거칠게 듣고 읽히는 대로 요약하면 이렇다.

  • 목사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시민 인권 운동을 통해서 그동안 접한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이 있는 걸 알았다.
  • 성직 소명에 대한 식별을 하다가 공부를 그만두고 입대해서 6년 간 군대 생활을 했다.
  • 시카고 신학교에서 “백인” 교수인 마틴 마티 (Martin Marty, 주: 루터교 목사이자 미국 종교 사회학자)로부터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 마티 교수는 내가 부임한 교회 교인들에 깊이 내재한 어떤 “수치심”을 이겨나가도록 이끌라고 격려했다. 그것은 흑인 역사를 통해 각인된 수치심이었다. 흑인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니그로”라는 수치심.
  • 서구의 우월주의에 입각한 선교의 역사를 비판한다. 그 백인 우월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짓눌려 살았다.
  • 하느님께서 흑인 공동체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세상 전체를 사랑하신다. 우리 교회는 그런 하느님을 따른다.
  • 흑인 공동체로 모인 우리는 성서의 말씀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려 한다.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 흑인 해방신학은 성서 전체에 걸쳐 나와 있는 주제이다. 그것은 억압받는 자의 시선에서 읽는 성서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잘못할 때조차 축복하시는 분은 아니다.
  • ‘갓 댐 어메리카!”를 두고 꼬투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설교 전체를 보지 않고, 맥락에서 떼어내어 계속 방영하는 언론의 잘못된 행태이다. 잘못된 정부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는 면에서,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 이 점에서 언론이 나를 포함한 비판적인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렇게 당했다.
  • 미국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고 교육 받는 것이 문제이다. 역사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해석학이라는 어떤 사물을 보는 창이 있다. 사람을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보고 성서를 읽는 것이다. 흑인 해방 신학은 노예선 갑판이 아니라, 갑판 아래 있는 흑인 노예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 하느님은 승리자를 위한 분이 아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느님은 노예제와 살인과 폭력과 보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성서는 다분히 그렇게 읽힐 만한 내용이 많다. 시편 137편만 보아도 ‘갓난 아기를 죽이라’는 보복이 담겨 있다.
  • 2001년 9/11 직후 설교를 두고 미국 정부를 테러리즘의 나라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보복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는 무엇이든 테러리즘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테러리즘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을 폭격하여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테러리즘을 실천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 전체 설교 가운데 몇 마디를 뽑아내 공격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다. 이건 어떤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어 내려는 행동이다.
  • 언론에서 설교가 문제시되면서 그를 비롯한 우리 교회가 협박을 받았다. 폭탄으로 날려버리겠다는…
  • 흑인 전통은 음악과 함께 한다. 블루스는 상처를 희망으로 바꾸어주는 흑인의 영적 전통이다. 고통과 가난은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성스러운 블루스에 담아낸다.
  • 사람은 악을 선택해도, 하느님은 선을 선택한다. 구약성서 요셉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깨진 관계를 회복시켰다.
  • 바락 오바마는 정치가이고, 나는 목사이다. 우리의 청중은 전혀 다르다. 그가 나에 대해서 반응한 것은 언론이 꼬투리 잡은 꼭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여전히 오바마를 ‘모슬림’으로 이해한다. 언론때문이다. 언론은 바락 “후세인” 오바마로 부르고, 종종 “오사마”라고도 불러 사람들을 현혹한다.

흑인 해방 신학에 관한 추천 도서 2권

  • 제임스 H. 콘 [억눌린 자의 하느님] (이화여대 출판부)
  • 제임스 H. 콘 [흑인 영가와 블루스] (한국신학연구소)

Update: NYTimes 최근 논란과 관련한 흑인 해방신학 개관

산마루에 서서 – 마틴 루터 킹

Friday, April 4th, 2008

위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세속 달력과는 달리, 교회력(Church Calendar), 혹은 전례력(Liturgical Calendar)은 성인이 죽은 날을 축일로 지킨다. 그 죽음은 하늘 나라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곧 부활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는 1968년 4월 4일 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그 생애 마지막 연설을 하고 돌아와, 작은 모텔 발코니 앞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 만 서른 아홉의 나이였다. 그리고 40년 전 오늘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미 그는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성인은 자기 삶의 끝을 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의 운명을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운명과 포갰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들을 탈출시킨 뒤, 40년 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높은 산에 올라 그 약속된 땅을 바라보던 모세였다. 모세처럼 그는 산 꼭대기에 올라왔지만, 그 약속된 땅을 바라보고도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의 끝을 아는 사람이다. 모세처럼 그는 소임을 다했다.

그가 지상에서 산 생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약속된 땅”에 들어섰는가?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그 상징적인 징표가 될 수 있을까? 그가 산마루에서 바라보던 그 약속된 땅은 아직 안개에 묻혀 있다.

그가 죽어 새롭게 태어난 해의 막바지에 세상에 나와 그 생애 만큼 살았으나, 그가 올라섰던 산에서 몇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내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 보며, 나는 작은 다짐의 기도만 올리고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의 손을 쓰시어 당신의 백성을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시고, 종내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교회가 당신이 보내신 예언자 마틴 루터 킹의 모본을 따라, 주님의 사랑의 이름으로 억압에 저항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자유의 복음을 지켜나가게 하소서.”

(미국성공회 Lesser Feasts and Fasts 본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