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Sunday, August 2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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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마태 15:21-28)

테러와 전쟁의 위기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예외가 아니어서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의 마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함께 어울려 서로 돕고 사는 일이 참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동시에, 이 같은 극단적 대결과 공격이 어디서 나오는지 헤아려서 신앙인의 태도와 행동을 바로 잡아야 할 사명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마침 오늘 복음은 테러와 전쟁의 명분이 되는 종교적 배타성, 이념적 대결과 차별주의가 예수님과 한 이방인 여인의 만남 안에서 무너지고 새로운 신뢰와 신앙으로 확장되는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여행은 익숙한 유대 땅을 훌쩍 넘어 이방인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전통에 머물러 우쭐대는 위선을 질타하신 참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자기 신앙에 눈이 멀어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남들도 잘못 이끌고 마는 세태를 크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 가나안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가나안 여인’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눈에 그는 상종하지 못할 이방인입니다. 우상 숭배자이며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여자’입니다. 현대 세계의 잣대로 보면, 종교와 이념, 지위와 성에 관련한 모든 차별이 다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하셨건만 유대인 남자들인 제자들과 예수님은 그 차별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상종 못 할 ‘이방인 여인’이 다가와 건네는 요청을 거부하는 쩨쩨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들’과 전혀 다릅니다. 한 생명을 보살피고 건지려는 간절함에는 종교의 벽이 없다고 확신하여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여인의 품 넓은 환대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모멸감을 주는 언사를 견디며, 높은 사람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깨우쳐 줍니다. 경계가 환하게 넓어집니다. 이로써 소위 ‘갑질’하려는 남자는 ‘을’의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거둡니다. 역할이 역전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현실에 도전받으며 다시 배우고 자신 생각과 행동을 고쳐나가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도전과 배움에 열려 스스로 깨지며 새롭게 깨달으시는 마당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득권과 관습에 안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자기 생각과 경험만이 잣대일 수 없다는 일갈입니다. 온갖 분리와 차별의 벽을 넘어서 오직 생명이라는 가치에 신뢰를 두어 겸손하게 자신을 맡기는 일이 신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테러와 전쟁은 종교의 탈을 쓴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순혈주의에서 비롯합니다. 자기주장과 신념만이 옳다는 이념의 노예가 된 탓입니다. 자기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안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득권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허위와 노예근성의 기득권을 훌쩍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도전으로 예수님마저 바꿔 놓았습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새로운 배움과 변화를 신뢰할 때, 예수님의 선교는 더 넓고 풍요롭게 확장합니다. 교회는 이렇게만 성장하고, 갈등과 대결의 세상에 평화와 신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Sunday, August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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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마태 14:22-33)

희망은 고난으로 단단해집니다. 신앙은 풍파로 흔들리는 삶의 진실 안에서 자라납니다. 믿음은 여리고 아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성큼 다가옵니다. 삶의 상처는 쓰라려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세상의 아픔까지 헤아리게 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신앙의 은총은 여린 상처 안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려 꿈틀거립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흔드는 상처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담한 죽음 탓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뱃속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세례로 연결되었고, 요한이 갇히자 예수님께서 세상 전면에 나서셨습니다.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이 처절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 속에서 요한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과 배고픈 이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의 처지가 마음 아팠습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눈길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펼치신 성찬례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으로 몸부림치며 성취를 향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안에서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우리를 넘실거리며 위협하는 파도는 절망과 상실의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난과 상실을 잊으려 하고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의 무게가 파도가 되어 그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에 눈을 팔 자,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신앙인인가요?

변모의 빛 – 선교를 향한 변화

Sunday, August 6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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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의 빛 – 선교를 향한 변화 (루가 9:28-36)

주님의 변모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셔서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느라 아주 바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주 홀로 떨어져 기도하는 시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서 자주 빠져나와야 새로운 신앙의 힘을 충전할 수 있습니다. 잠시 떨어져서 우리 삶을 지긋이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안주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으로 삶에 변화를 키워낼 수 있습니다. 그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교회의 선교가 세상에 펼쳐집니다.

사건은 산에서 일어납니다. 성서에서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땅의 유한한 인생이 하늘의 영원한 차원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이 경계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하게 우뚝 서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신앙인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땅의 생활을 하늘의 가치에 비추고 잇대며 살아갑니다. 자기 삶과 세상이 잘 변하지 않는 까닭은 땅의 염려에만 붙들려 골몰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고귀한 가치를 바라보며 떠나는 일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이러한 변화의 역사에 참여하라고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모세는 판에 박힌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고 깊이 느꼈을 때 가녀린 떨기나무에 깃든 하느님의 불을 만났습니다. 말주변이 없어 주눅 들었던 그가 노예의 대탈출을 이끌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하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 권력을 비판하다가 모진 고생을 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하늘의 자리에 올려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누리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과 만납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와 사회도 빛을 얻기 시작합니다.

변화를 향한 새로운 참여는 관습과 통념에서 탈출하는 모험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과 떠남’에 관해 논의합니다(31절). 이때 ‘죽음’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엑소더스’(해방의 탈출)입니다. 교회와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기득권의 관행을 그쳐야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겉에 드러난 영광만을 좇아 초막을 지어 머물려고 합니다. 안주하고 머물려고 온갖 변명과 뒷이야기마저 만듭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입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명예 주장을 그치고 하느님의 일에 귀 기울여 참여하라는 일갈입니다.

신앙인의 목표는 높은 산에서 땅과 하늘을 이으시며 빛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억압하는 어두운 땅의 관습에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모진 수고의 땀을 흘려 자유롭고 시원한 산의 높이에 올라서 하느님의 가치로 세상을 조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훈련하고 그 뜻을 품어 하산하여 교회와 세상을 바꾸는 노력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이 땅에서 빛나는 존재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향한 선교의 제자로 우뚝 서는 일입니다. 이때 주님의 비밀과 빛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