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도전받아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는 기쁨

Sunday, December 13th, 2015

도전받아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는 기쁨 (루가 3:7~18)1

기뻐하라! 대림 3주일의 별명은 ‘기쁨의 주일’입니다. 전례 전통이 깊은 교회에서는 “기뻐하라”(Gaudete)로 시작하는 입당송을 부르며 오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전례 색깔도 아예 환한 장미색으로 바꿔서 자줏빛 짙은 참회와 절제의 분위기를 잠시 잊으려 했습니다. 깊은 밤 지나 새벽이 동트듯이, 인생의 절망과 실패라는 어둠 한가운데서도 기쁨과 즐거움은 꼭 피어난다는 확신입니다. 다만, 그 밝은 빛의 기쁨을 되찾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질책을 두려워 마세요. 너그러운 마음과 행동을 펼치세요. 늘 고마워하세요.

‘기뻐하라’는 찬양과 세례자 요한의 호된 ‘욕설’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요한은 우리 신앙에 필요한 질책과 요구를 분명히 밝힙니다. 준엄한 질책을 피하고서는 참된 기쁨을 얻기 어렵다는 단호한 주장입니다. 신앙은 “닥쳐올 징벌을 피하기” 위한 보험이나 대비책이 아닙니다. 자기 안위와 안녕의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세운 기대와는 방향이 전혀 다른 복음 말씀을 듣고 번번이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첫 번째 단계는 복음의 말씀에 혼나고 도전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복음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연스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회개와 세례와 용서’의 삶을 몸으로 보이라는 당부입니다. 헐벗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 우리만 따뜻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궁핍하고 찌든 사람이 외치는 신음이 분명한데, 듣기 싫거나 귀찮다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 이상 욕심을 내거나 속여서 이익을 취하면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쁜 삶을 잠시 멈추고 우리 시선의 방향을 돌려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이들을 바라보는 일이 신앙의 행동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기쁜 삶의 조건을 “너그러운 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세상과 사람의 어떤 일을 볼 때 자신의 경험에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출렁거리는 자기감정과 정서로 호불호를 가리지 않습니다. 더 넓고 깊게 살피며, 특히 다른 사람이 지닌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너그럽게 베푸는 행동이 흘러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건네는 넉넉한 손길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어느 성인은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는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누리는 삶에 고마움은 덜하고 여전히 걱정에 휩싸인 탓에 더 얻으려고 하니 불행합니다. 무엇을 얻으려 필사적으로 펼치는 우리 팔은 짧고 움켜쥐려는 손은 작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손길은 짧고 작아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우리 손을 더욱 넉넉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어서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고 다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픔에 더 귀 기울이고 고통에 더 너그럽게 손을 펼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손길이 됩니다. 이 손길이 세상과 우리 삶에 행복과 기쁨을 가져옵니다. 기뻐하십시오. 너그러워지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우리 삶을 축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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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13일 대림 3주일 주보 []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Sunday, July 5th, 2015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마르 6:1~13)1

얕은 지식이 더 깊은 배움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좁은 신앙체험이 더욱 너그럽고 풍요로운 신앙을 종종 방해합니다. 개인의 ‘고집 센’ 믿음이 공동체의 지혜롭고 넉넉한 삶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기 성숙과 공동체 성장에 큰 걸림돌인 태도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과 복음 이야기는 ‘고집’을 털고 경청하며 자기 체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로지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과 도전에 마음과 귀와 눈을 열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불러 아집으로 귀를 막은 이들 속으로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새 기운’은 예언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숨결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변화는 자기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자신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인 성령에 기댈 때라야 겨우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똑똑하고 체험 깊은 사도 바울로의 이상한 고백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운명이요, 중요한 교리일 수 있는 문제에 관하여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게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자랑하고, 자신의 깊은 지식과 강렬한 체험이 행여 ‘교만’으로 이어질까 봐 스스로 삼갑니다.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저주’로 보일 법한 자신의 고질병을 내세워, 이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역설과 신비가 펼쳐집니다. 약하고 모자란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이 역설의 절정입니다. 오래 알고 가까운 경험이 오히려 눈을 가립니다. 예수님의 진가를 못 보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마음마저 완고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알량한 지식과 체험과 전통이 본의 아니게 치유와 구원의 훼방꾼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 사태를 바로 식별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의 행색과 활동이 큰 대비를 이룹니다. 어떤 기득권도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에 기대어 악령을 내쫓는 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서라면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분명한 선교 이념과 자긍심이 있으면, 더 좋은 대접 받으려 이집 저집 기웃거릴 일이 없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경고는 냉혹합니다.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낯두껍고 고집 센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배움에 귀를 열고 낯선 이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치유와 구원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더 깊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공간이 되어 생명의 치유와 구원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경청하는 공동체가 치유의 기적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로 대화하며 도전하는 공동체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이룹니다. 환대와 치유가 구원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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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Vivian Maier, 1926~2009)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5일 연중14주일 주보 []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Sunday, June 28th, 2015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마르 5:21~43)1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 이야기는 모두 ‘구원’ 이야기입니다. 성서 원어에서도 ‘치유’와 ‘구원’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아픈 이들을 고치신 사건에는 우리 삶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비롯한 오늘 독서에 담긴 구원의 선포는 분명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여성이 오늘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 두 여성을 이해할 때, 오늘 복음의 뜻이 풀립니다. 2천 년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의 고통 아래 살았습니다. 한 여인이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았습니다. 당시 종교의 정결법은 피를 흘리는 여성은 ‘더러우니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오염된 여인’의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아픔을 돈벌이로 이용했습니다. 회당장의 딸은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상황에 관한 고발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착취에 희생당하거나, 주어진 능력과 뜻을 펼치지 못하고 짓눌리기 일쑤입니다.

하혈병 앓던 여인은 몰래 예수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세상은 ‘두려운 남성의 체제’였기에 치유의 힘마저도 숨어서 얻어야 했습니다. 여느 ‘남성’과 달리, 작은 이들에게 세심하고 예민헀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 나오게” 했습니다. ‘나오라’는 말씀은 그의 존재 전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고통, 숨기고 싶은 자신의 연약함을 당당히 선언하며 ‘커밍아웃’(coming-out)하여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때 새로운 정체성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이제 “딸”(디가테르)이라 부르며, 온전한 “평화”(샬롬)의 삶을 분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랑하는 작은 딸’(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미 죽었으니 ‘폐를 끼칠 일 없이’ 그만두셔도 좋다는 조언을 마다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희망을 만드는 일에는 그 어떤 일도 ‘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을 무릅쓰고서라도 손을 펼쳐야 합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희망을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라”는 말씀에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을 뚫고 일어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미리 드러납니다. 억눌린 ‘작은’ 이들의 생명은 일어서야 하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지닌 이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며 걷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치유는 아프고 혼란스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감수성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에게만 예민하지 말고, 밖에서 다가드는 요청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한계와 정체성을 인정할 때, 구원이 펼쳐집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이웃과 사귀며 하느님과 신뢰를 마련할 때, 신앙이 힘을 얻습니다. 이 신앙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눌린 생명을 살리고 꽃피우는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합니다.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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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28일 연중1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