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전례력 연재] 성 요셉 – 보호와 퇴장의 신앙

Saturday, March 10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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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 – 보호와 퇴장의 신앙 (3월 19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복음서에 나오는 성 요셉은 역사에 잠시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성모 마리아의 배필’, ‘예수의 양 아버지’라는 별칭이 앞에 붙어야 할 정도로 존재감이 얕다. 예수를 적대하는 이들이 그분을 깍아내리며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나 슬쩍 보이는 이름이다. 성인 이름으로 신명을 정할 때도 구약성서의 ‘꿈장이 요셉’을 선호하지, 이 성인은 인기가 덜하다. 이처럼 별 볼 일 없는 성인이 전례력에 깊이 박힌 까닭은 무엇일까?

네 복음서를 다 뒤지면 요셉은 열두 번 나온다. 대체로 마태오와 루가에 있고, 요한에 이름만 한 번 내비치고, 마르코에는 아예 언급이 없다. 그것도 예수 탄생 사건에 집중돼 있다. 요셉은 젊은 마리아와 약혼했고, 마리아가 이미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했으나, 천사의 말을 따라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린 엄마와 아기의 생명을 지키려고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고향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에 돌아와 정착했다. 예수께서 열 두 살 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요셉은 자취를 감춘다.

초기 교회 전통에서도 요셉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4세기 교부 성 제롬이 잠시 언급했지만, 9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리아 신심에 곁들여 요셉의 지위가 조금씩 떠올랐다. 이때 처음 성인은 ‘주님의 양육자’라는 이름을 얻었고, 3월 19일을 축일로 지키기 시작했다. 예수 탄생 사건 안에서 요셉 성인의 의미를 풀어낸 사람은 13세기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요셉이 없었더라면 마리아는 혼외 임신으로 돌에 맞아 죽거나, 헤로데의 학살을 피하지 못했을 테다. 이런 점에서 거룩한 어머니와 아들 안에서 펼쳐질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지켜낸 성인이었다.

토마스 성인의 해석에 따라 교회는 성인에게 ‘겸손한 보호자’라는 뜻을 다양하게 덧붙였다. 16세기 종교개혁 때는 혼란한 교회의 처지를 염려하여, 19세기 근대 세속화로 위기를 맞는 교회를 보호한다는 뜻으로 ‘보편교회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5년에는 아예 ‘노동자 성 요셉’ 축일을 노동절인 5월 1일로 따로 정하여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교회가 먼저 생각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역사를 두고 대체로 천주교에서 마련한 결정이었으나 성공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동방교회는 성인 축일을 성탄 첫 주일에 지켰다. 일찍부터 성탄 사건에서 성인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노력이었을 테다. 흥미롭게도, 천주교는 17세기부터 성가정축일을 성탄과 공현 절기 사이에 지키다가, 1969년 전례력 개정 때, 성탄 후 첫 주일로 옮겼다. 동방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 만든 축일이겠다.

성서와 역사에서 보듯이, 성 요셉은 겸손한 환대와 보호, 용기 있는 퇴장의 성인이다.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힘없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품어 지켜냈다. 소임이 끝나자 주저 없이 사라졌다. 환대와 보호 속에 신앙이 움트는 자리가 생긴다. 퇴장하여 생긴 빈자리에 다시 새로운 역사가 피어난다. 교회와 신자의 사명은 성인이 마련한 환대의 공간을 넓히는 일이다. 완고하고 딱딱한 곳에서 갈라지고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틈을 넓히고, 그 사이로 빛의 공간을 품은 요셉의 영성을 사는 일이다. 그리고 삶의 막바지에 하느님께로 조용히 퇴장하는 일이다.

(도판: Fr. Edward M. Hays, The Great Saint Joseph, 20세기)

  1. 성공회 신문 2018년 3월 10일 치 []

[전례력 연재] 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

Saturday, February 2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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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교회 역사가 전례력(교회력)을 마련하고 구성한 목적은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구원의 역사를 축하하며,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살자는 뜻이다.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말에는 우리 삶과 시간을 그리스도의 시간과 맞춘다는 뜻이 있다.

전례력이 세상의 시간인 달력과는 살짝 비껴 나가듯이, 신앙인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르게 살아간다. 신앙인이 세상과 조금씩 불화하는 이유이다. 전례력을 바로 살아야 신앙의 삶도 바르게 된다. 새로운 시간의 길을 걷는 신앙인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은 전례력이 마련하고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눈과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낀 탓일까? ‘그리스도의 몸’이라 자처하는 교회의 현실이 여전히 어수선하고 부족하여 낭패감에 휩싸인 탓일까? 교회는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초대 교회에서 그 모본은 예수를 곁에서 따르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성모 마리아와 여성 신앙인들이었고 사도들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자기 생명을 하느님께 바친 순교자들이 뒤를 이었다. 지상의 예수를 곁에서 친밀하게 따랐던 사람처럼 그들 곁에서 이어서 따르고, 후대에 그들을 다시 이어서 따르는 ‘신앙의 릴레이’가 마련됐다. 역사의 현실 안에서 한 사람이 교회의 신앙을 지키던 삶과 번뇌, 그리고 성취를 친밀하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역사에서 발전한 ‘성인 공경’ 관습은 함께 머물고 보고 만지며 냄새를 느끼는 오감의 친밀감에 바탕을 둔 신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도 계승’ 교리는 지위의 계승이 아니라, 신앙의 모본을 정직하고 바르게 따르는 신앙의 행동이다.

전례력은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을 겹쳐서 절기와 축일을 만들며 발전했다. 그리스도의 삶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는 그리스도 절기(템포랄레 temporale)와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성인 축일(상토랄레 sanctorale)이다. 그리스도 절기는 부활-성삼일을 정점으로 사순절과 부활 50일(오순절)이 마련됐다. 이후 성탄일을 지정하자, 먼저 만들어진 절기를 본떠서 대림절과 공현절을 두었다. 성인 축일은 그들의 순교일이나 별세일을 부활의 새로운 탄생으로 여겨, 축일로 지정하여 지켰다.

전례력 지침은 그리스도 절기를 최우선으로 하여 축일을 지키는 순서를 제공한다. 그 탓에 종종 여러 성인 축일을 다른 날로 미루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교회에서 공적인 매일 전례나 기도가 뜸해지면서 평일에 든 축일을 간과하기도 한다. 기도서에 선명한 축일들이 무색한 상황이다.

교회 신앙의 모범이라고 마련한 성인 축일을 되살려야겠다. 축일을 그날에 지키는 교회라면 성인의 삶과 의미를 명백하게 설명해야 한다. 사정상 그렇지 못하다면, 평일 중 한 차례의 전례 안에서 그 주간의 성인들을 함께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 그마저 어렵다면 주보를 이용하여 소개하거나, ‘이달의 성인’을 선택하여 소개하는 교육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 기도서에 새롭게 들어간 성인들, 특히 근대의 성인들은 자료 구하기도 쉽고, 현대의 신앙인에게 더 가깝고 친밀한 신앙의 모본을 선사한다. 성인들은 우리보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24일 치 []

[전례력 연재]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Sunday, February 11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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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기도서에 적힌 <병자를 위한 기도일>(2월 11일)은 낯설고 새롭다. 전례 색깔도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한다. 교회마다 주일 전례나 매일 기도 때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왜 이날을 따로 정했을까? 어떤 달력은 좀 더 세심하게 ‘세계 병자의 날’이라 적기도 한다. 건강 관련 세계 단체가 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축일은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제정하여,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다른 교단과 사회 단체에 널리 퍼졌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교회력에 넣은 교단일 테다.

교종은 이렇게 부탁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자신도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12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연유도 있다.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겹친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께서 세 번이나 나타났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일의 연원에서 세 가지 뜻을 살핀다.

첫째, 이날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다. 고통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부탁이다. 무슨 말인가? 종교는 종종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너무 쉽게 말한다. 성서에도 치유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전통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고통에 관한 깊은 생각으로 초대한다.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치유 기적 핵심에는 측은지심과 축복이 있다. 병약자들이 소외당하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병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선언한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축복하시고 그 가치를 새롭게 선언하신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이다. 기도일을 제정한 교종도, 성모 발현의 복된 증인인 소녀도 결국 죽음을 맞았다. 교종은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녀는 수녀가 되었지만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모두 죽었다. 오래 사는 사람은 있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병에 들든지 건강하든지 우리는 모두 죽는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앙인은 이 시차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는 큰 안타까움이지만,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진다.

셋째, 사람은 잊어도 하느님은 잊지 않으신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든지 길든지, 생명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히는 일이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니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이다.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이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뜻이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10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