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st, 2017

회개와 순종의 권위 (마태 21:23-32)
기쁘고 여유로운 명절이 다가옵니다. 가족이 기쁘게 모여 안부를 물으며 소홀했던 사랑을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한편, 명절 안부에 조금 조심하여 마음을 써달라는 부탁도 회자합니다. 졸업은 언제 하느냐, 취직은 언제 하느냐, 결혼 계획은 있느냐는 말을 피해달라는 당부입니다. 친구나 친척의 자녀를 예를 들어 비교할라치면 명절 분위기 한순간에 망치기에 십상입니다. 지켜보는 답답함이 큰 탓이겠지만, 당사자의 마음고생을 더 깊이 헤아려 주면 더 큰 격려가 됩니다. 어른의 권위는 여기서 나옵니다. 사람이 바라는 때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때가 다르다는 신앙의 지혜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사람의 기대와 하느님의 뜻 가운데 삶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둘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의 태도는 우리 삶과 가정, 교회와 사회 안에서 권위를 둘러싼 갈등을 비춥니다. 성전을 오래 지킨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이미 권력을 누리며 판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때 낯설고 젊은 예수님이 등장하니 기득권에 위협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운 지위와 하느님의 새로운 도전 가운데 무엇을 신뢰할지 되물으십니다.
신앙인은 모든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만든 권위는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위로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식별하여 따를 때 신앙의 권위가 굳게 섭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운 인내를 생각하며 자녀의 성장과 미래를 격려할 때 부모는 권위를 얻습니다. 공동체나 사회의 갈등을 풀려면 저마다 지닌 경험과 주장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낮으나 높으나, 누구든 하느님께 순종하고 복음 선포에 헌신할 때 자신도 존중받고 교회의 권위와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신앙인의 권위는 하느님을 향한 예배와 헌신, 이웃을 향한 봉사와 선교에서 나옵니다. 그 방향이 혹시라도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향하면, 사람은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업적과 소유 경쟁으로 빠져듭니다. 이 다툼과 불화가 바로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죄는 어떤 법의 위반 여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올바르게 누리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를 깨닫고 언제든 돌아와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다시 조율하며 순종합니다. 이 회개와 순종때문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31절).
오늘 서신서 본문의 아름다운 성육신 찬가처럼,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으나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이 명절은 사랑의 기다림 끝에 돌아오는 가족과 자녀를 다시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서로 겸손하게 격려하며, 서로 사랑으로 순종할 때, 하느님은 우리 가족과 교회 안에 보름달처럼 풍성한 복락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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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4th, 2017

하느님 나라 – 은총의 경제 (마태 20:1-16)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누는 첫 문단을 우리 사회의 아프고 슬픈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복음은 그 어두운 현실을 뚫고 들어와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국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지표가 적잖이 우울합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고, 자살률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가장 높으며, 남녀임금 격차는 꼴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노동자 임금 문제로 풉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등은 하느님 나라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 비유로 세상 상식의 허점을 보여주십니다. 일찍 와서 더 많은 노동을 한 사람에게 더 많은 품삯을 주는 일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해 질 무렵에 온 사람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합니다. 게다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나눠주니 먼저 온 사람들이 골을 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늦도록 일감을 얻지 못해 바동거리는 마음을 읽으십니다. 뉘엿한 해의 그림자 안에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의 그늘이 더욱 길고 깊었을 테니까요. 신앙의 시선은 먼저 사람의 그늘을 향합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불편하게 자극하여 사람의 속내를 들춰냅니다. 먼저 온 사람을 뒤로 서게 하셔서 그들의 볼멘소리를 자극하신 듯합니다. 사람은 작은 일 하나에서도 자기 권리는 재빨리 주장합니다. 짧은 기다림으로 다른 이들의 염려와 간절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그런데도 좀 더 커다란 사회와 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에 관해서는 자기 일 아닌 듯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구약 요나 이야기처럼, 자신의 작은 불편함에는 금세 골을 부리면서도, 많은 사람이 은총을 누리는 모습에 억울해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요청입니다. 인내와 자비가 하느님의 길이니까요.
신앙인은 행복의 기준을 하느님께 둡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에 비교하여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넉넉한 은총이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풍성하게 펼쳐지는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니 그분의 처분에 따라 널리 나누는 일이 신앙의 행동입니다. 남을 물리치고 먼저 움켜쥐려는 태도는 우리를 아귀다툼의 지옥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사람 생각으로 정한 정의와 평등을 넘어서, 불편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와 평등을 바라볼 때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복음을 따르기 쉽지 않으나, 바울로 성인이 옆에서 격려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십시오. 그 용기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믿음과 고난과 섬김은 우리의 특권입니다”(필립 2:27-29). 신앙인은 이 특권으로 긴 노동에 지친 이들을 쉬게합니다. 삶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세상의 크고작은 불평등을 조금씩 없애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총의 경제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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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7th, 2017

용서 –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 (마태 18:21-35)
그리스도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 하면 신앙인은 자못 뿌듯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사람들이 험악하게 내뱉는 ‘응징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앞말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두 별칭 앞에 ‘하느님’을 붙이곤 해서 혼란은 더 깊어집니다. 이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혼란스러운 신앙을 바로 세우며, 자비로운 하느님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신앙은 억울한 마음과 앙갚음의 악순환을 끊고,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에 자신을 옮겨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삶에 흐르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십니다. 유명한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 명령은 근거와 의도가 분명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후예 라멕이 자신을 해치면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하리라”는 협박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창세 4:24). 자기 중심주의에서 나온 질투와 악행, 두려움과 보복의 악순환은 사회 안의 갈등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대결과 전쟁놀음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어디에서든 이를 멈추도록 끊어서 궤도를 돌리는 일이 인간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용서와 구원의 선순환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일곱 번 용서’는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일흔 번’을 곱하여 인간의 셈법을 훌쩍 넘습니다. 하느님의 셈법이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셈법은 아무리 너그러워도 제한과 조건에 걸려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흔듭니다. 불행하게도 그 셈법은 그에 따른 판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셈법은 자비의 셈법입니다. 신앙인의 구원은 응징과 심판이 아니라, 모두 함께 누리며 축하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길이 억울하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미 구원의 선순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종교 감정의 영역과 개별적인 인간관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 이야기는 경제 문제를 다룹니다. 일만 달란트의 탕감과 백 데나리온의 빚 독촉의 비교는 천문학적 부를 누리는 이들이 하루 생활비에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현실의 고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자비의 선순환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더 많이 지닌 이들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더 많은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더 깊은 신앙의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앙의 은총과 사회 안의 책임을 분리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신앙인은 오늘 읽은 구약의 요셉 이야기처럼, 눈물의 참회와 고통스러운 용서로 악행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며 살아갑니다. 형들이 흘린 참회의 눈물은 우리가 받은 세례의 물입니다. 오늘 성당 입구에서 십자성호를 몸에 그으며 적신 물입니다. 우리는 이 눈물로 묵은 감정과 세상의 셈법이 만든 악순환을 끝내기로 다짐합니다. 용서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눈물이 참회의 눈물과 만날 때 새롭고 거룩한 일이 펼쳐집니다. 그 눈물은 생명의 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씻기고 먹이며 우리를 하느님 자비의 삶에 참여하도록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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