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마리아, 예수, 머튼, 본회퍼

December 31st, 2008

“두려워 하지 마라.”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전하며 그렇게 말을 뗐다. 마리아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태어난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첫 아침에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마라.”

이 전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핵심 사건인 성육신과 부활에 자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일에서 시작되어 완성되고, 다시 시작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다시 그의 자궁에 품은 예수에게서 다시 제자에게로 돌아가는 일은, 제자된 우리가 이제 우리의 몸 속에 예수를 담는 마리아인 것을 상기시킨다. 제자된 우리는 현재를 사는 마리아이다.

가끔씩 잊고 살거나, 아니 이를 아예 잊고 싶어할 때, 신앙의 위인들은 자신이 겪은 두려움 속에서 이 전언을 다시 새겨듣고는, 우리에게 합장하며 그 겸손한 죽비를 내려치곤 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맞는 이 시간에 두 분의 글을 떠올려 옮겨 놓는다. 토마스 머튼의 기도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시이다. 어깨 시큰하도록 맞고 싶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기도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 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제 자신을 알 수 없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제가 그리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갈망이 실제로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걸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그 갈망을 갖길 희망합니다. 그 갈망에서 벗어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스스로 희망합니다. 그리할 때, 제 비록 아무 것도 알지 못해도, 주님께서 옳은 길로 이끄실 것을 압니다.

그러니 죽음의 어둠 속에서 갈 곳을 잃어 헤맬 지라도 주님을 항상 신뢰하렵니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험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테니까요.

in Thoughts in Solitude

본회퍼(Dietrich Bonheoffer, 1906-1945)의 기도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게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갇힌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침착하고 활기있고 단호하다고 한다.
자기 집을 나서는 주인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간수들에게 말할 때
자유롭고, 친절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한 말하기를
내가 불운의 날들을 견디어 내면서도
한결같이 웃음을 짓고, 당당하다고 한다.
늘 승리하는 사람처럼.

글쎄,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쉬지 않고 갈망하며 병든,
누군가의 손이 내 목을 조르는 듯이 숨 가빠하는,
다채로운 색깔과 꽃과 새 소리를 그리워하는,
친절한 말들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목말라 하는,
큰 사건에 대한 기대로 몸부림치는,
멀리 떨어진 친구들에 대한 염려로 힘없이 마음 졸이는,
기도와 생각과 일마저도 지치고 공허해진,
약해져서 그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할 준비가 된,
(그런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

(1944년 옥중 어느날 – 1946년 3월 4일 발표)

* 역주: 원 독일어의 영역에서 중역

성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December 24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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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December 15th, 2008

성공회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든지 죽든지 해야 할 것인가? 성공회로 오려다가도 선뜻 문지방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보면서, 이렇게 사람끌지 못하는 곳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고민한 일이 적지 않다. 여러 궁리도 하고 시도도 해봤다. 해법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의 어떤 반동세에 힘 입은 것인지, 다시 “성장 욕망”이 이곳 저곳에서 불끈불끈한다는 소식이다. 생존 욕구가 그 기반에 있으니 차마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교회는 당장의 숫자와 생존 욕구 너머를 봐야 교회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고 하지 말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무리로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다. 오늘 어느 블로그에서 받은 충격은, 건실하고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서도 여전히 숫자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아직 철없는 혈기때문인가, 아니면 당사자의 변명일까. 여러 변명과 토를 달고 말았다. 그 본문의 한 토막 (원래 글 링크)을 옮겨 놓고, 그에 덧붙인 토를 여기에 빈한 대로 옮겨 적는다.

몇 주 전에 몸과 마음이 상한 채로 한국의 여러 신부님들과 통화한 뒤 어떤 쓸쓸함과 분개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준비하던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비어져 나올 줄 몰랐다. 그 생각의 결론은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였는데, 아직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이번 한국 감리교회의 대혼란을 계기로 성공회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중략]… 그러나 한국 성공회를 리서치하면서 결론은 아직 유보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국의 성공회가 전체교인수가 5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0만명도 아니고 5만명이라는 점.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점,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의 보통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교회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엘리트들이 관심있는 일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는 보통사람들에 의해서, 보통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보통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via 당신과 가는 길)

내 댓글은 이랬다 (이후 약간 편집).

배달되는 RSS의 글들을 깊이 들여다 볼 처지가 아니었는데, 성공회에 뜨끔한 지적을 하신 것을 보고, 되돌아 읽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방은 수긍하면서도 다시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참에 토를 달아보려고 합니다. 딴 생각, 괜한 토달기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교단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최근의 감리교 사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적어도 감리교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이는 이미 십수년전 감신대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내치는 어떤 힘에 장악되면서 내다보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장로교에서 일어났다면 그냥 갈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뒤돌아 볼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감리교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유지하면서 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최소한 한국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정치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덕이 높으신 감리교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계시니 이 위기를 큰 성찰로 삼아 잘 이겨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중앙집권적 교회 정치 구조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역시 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 그룹)나 자기 그룹 안에서 권력을 가지려 하고, 이로 대결한다는 것이지, 회중들의 의사 결정 구조때문에 권력 남용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의 불균형이 가져온 갈등과, 그 대결의 결과로 보고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해 반가움이 앞섭니다. 같은 전통에서 함께 걸으면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의 길을 걷는 길에서 만날 수 있으려니 그 “유보”가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속깊은 블로그를 훔쳐보는 입장에서 교인 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5만명도 부풀려진 숫자입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인 수가 부풀려진 것처럼 말이죠. 저는 늘 공식 집계의 25% 만을 신자로 보는 계산법을 갖고 있습니다. 어는 종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성공회 신자는 정확히 1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게 맞습니다. 숫자에 정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120년이 다 되는 역사 속에서 이 정도 밖에 신자가 안되는 것을 곧장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견이거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공회가 꼭 엘리트적이었다도 할 수 없으며, 보통 사람의 일에 관심을 다른 교단에 비해 적게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성공회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가 심어놓은 독특한 배타주의, 특히 다른 교단까지도 배타하는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이 가운데서 “작은 종자”는 그 기원이 어떻다 하더라도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전세계의 분포와 전혀 달리 장로교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한국 개신교의 양상이 그 배타적인 신학적 성향과 맞아 떨어진 탓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리 말합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감리교는 60%이상인 장로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민중적인” 혹은 “민족적인” 성향을 가진 교단 교회라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출발에서 한국의 가장 토착적인 교단이라 여길만한 “복음교회”라는 교단은 그 존재가 미미합니다. 이들은 서구 신학을 비판했기때문에 오히려 작게 되었고, 큰 수의 횡포 안에서 이 마이너리티는 그 존재 자체를 지금까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공회로 돌아 옵니다. “숫자”는 큰 유혹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곤 합니다. 숫자라는 점에서 한국 성공회는 어떤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오히려 철 지난 성장 모델에 눈을 돌리려는 욕구가 강해집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이 틀에 들어서면, 오히려 그 ‘작음’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신선도가 급격히 떨어질게 분명합니다. 숫자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정감을 갖고 찾아오지요. 그러나 어떤 성장이요, 어떤 숫자를 갖고 있느냐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서 붙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성공회의 고민이 있습니다.

주어진 처지에서, 저는 한국 성공회의 선교를 일당백의 게릴라전으로 보거나, 혹은 게릴라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만, 이전과는 달리 이런 목소리는 성공회에서마저 정신없는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라는 강박감에 멍든 탓입니다.

토를 단 김에, 덧붙이자면, 어디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예를 드신 성공회의 신학자들 목록은 사실 성공회의 한 방향만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렌즈를 통해서 한번 걸러진 분들이라는 것이죠.

이만, 허접한 토달기를 접습니다. 복된 대림절기 되길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