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 땅의 생명에 깃든 보물

Sunday, July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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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땅의 생명에 깃든 보물 (마태 13:31-33, 44-52)

‘비유의 장’ 마태오 복음 13장 전체는 하느님 나라를 비춥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좀 더 넓고 깊게 펼쳐주며, 동시에 우리의 고정관념을 수정하라고 요청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비유를 따로따로 살폈다면, 오늘 비유들은 그 전체의 벼리를 잡아당기는 대단원입니다. 이미 나눈 바와 같이, 비유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목적 말고도, 쉽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더 깊은 뜻이 왜곡되거나 좁아지는 일을 막는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 전체를 활용하여 더 깊이 느끼고 더 높이 상상하도록 우리의 머리와 몸을 이끕니다.

오늘 이야기를 포함하여 마태오 복음 13장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리고 보물이 묻힌 밭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비유의 공통점이 눈에 띕니다. 씨는 땅에 뿌려집니다. 밀과 가라지는 땅에서 자라납니다. 겨자씨는 흙에서 자라납니다. 누룩은 무엇인가에 들어가서 작용합니다. 밭은 이 모든 것이 작용하는 흙입니다. 이 뜻은 분명합니다. 천상에나 있을 법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흙과 땅’에 들어가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 땅과 세상과 깊은 관련을 맺습니다. 죽어서 간다는 ‘저승’이나, 허공의 ‘하늘’과 연결짓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뿌려지고 심겨서, 자라나고 부풀어 올라야 할 현실입니다. 성서의 하느님 나라는 저승과 허공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 미약하더라도, 흩날려서 잃는 씨앗이 많더라도, 가라지 때문에 생육이 좋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현실에서 기어이 많은 수확을 내고 큰 나무로 자라나며, 빵처럼 부풀어 올라 커지리라는 희망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확과 큰 나무, 커다란 빵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제대로 쓰일 때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많은 수확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겨자씨에서 자라난 큰 나무는 새들이 집을 짓고, 사람이 쉴 그늘을 만드는 곳이어야 합니다. 밤사이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빵은 아침의 허기를 달래고,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소중한 양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풍요롭게 먹이고, 사람을 품어서 그들이 쉬며 사랑을 나누게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깃든 생명을 우리가 키워내고 먹이며 지친 삶을 쉬게 할 때 비로소 발견하는 보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목적을 깨달은 신앙인은 이제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값진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니, 신앙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기꺼이 바꾸어 붙잡습니다. 우리 재산과 시간, 재능과 수고를 이 땅에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우선 봉헌하며 헌신합니다. 이 땅에 깃든 생명을 키워내고 지친 이들의 삶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행동에 참여할 때 신앙과 교회가 바로 섭니다. 이때라야 풍성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삶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전례력 연재]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Saturday, July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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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7월 22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막달라 마리아는 성서 인물 가운데 가장 야릇한 시선을 받는 성인일 테다. 예수와 특별한 인연 때문에 역사는 다양하고 극적으로 성인의 삶과 운명을 상상했다. 예수의 연인으로 착색하여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 발견된 고대 파피루스 조각에서는 ‘예수의 아내’라는 표현이 나와 떠들썩했다. 거기에 나온 ‘아내’를 막달라 마리아로 섣불리 단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몇 년 후 그 파피루스는 가짜로 판명 났다.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은 이런 상상력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교회는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는 예수와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의 선교를 돕던 사람이었다. ‘일곱 마귀’로 고생하던 그를 예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했던 것 같다. 이 ‘일곱 마귀’의 정체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서방 교회는 복음서 이야기를 엮어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몸을 파는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온다. 참회와 헌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중세교회는 이 여인에게서 신앙인의 모본을 찾고는, 그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멋대로 결론 내렸다. 12세기 때부터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이런 상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묻힌 현장에 있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이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져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다. 마리아는 상실과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이 여성이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다. 서방 교회도 나중에는 그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라고 불렀다. 서방 교회는 최근에야 동방 교회를 따라 축일을 7월 22일로 정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한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로, 다른 한 분은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불렸다. 예수를 신실하게 따랐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마음과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1. [성공회 신문 2017년 7월 22일 치 7면 (↩)

성령 – 교회의 영

Sunday, May 2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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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교회의 영 (요한 14:15-21)

최근에야 널리 쓰이기 시작한 ‘영성’은 오용하기 쉬운 말입니다. 신앙 ‘체험’이라는 말도 비슷하게 그 앞에 ‘개인’이나 ‘내면’과 같은 꾸밈말이 덧붙으면 신앙의 오해로도 이어집니다. 다른 종교들과 교류가 활발하여 영성과 신앙 체험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기도 했지만, 분별이 성글어서 생기는 혼란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체험’은 저마다 개별화하고 파편화한 ‘나 – 인간’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우리 – 그리스도’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을 교회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따르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홀로 동떨어진 ‘개인’이 없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인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오해하기 쉬운 책입니다. 다른 종교와 대화하려는 선한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거짓 교리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기도 합니다. 난해한 탓에 제멋대로 해석하기 십상입니다. 그참에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보다는 신학적 이해를 펼치는 요한복음서를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부활 사건에 기반을 두고 ‘교회’라는 새로운 ‘우리-그리스도’를 펼치는 새로운 신학이라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삶에서 늘 배우고 기대며 따랐던 어떤 이가 떠났을 때, 특히 그가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던 이였을 때, 우리는 깊은 상실과 혼란에 빠집니다. 삶은 불확실하고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외롭게 개별화한 눈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흩어져 파편화한 손길로는 자신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서 홀로 절망하는 이들을 하나로 붙드는 힘을 약속합니다. 새로운 몸을 만드는 가치와 행동을 선물하십니다. 삶을 새롭게 보는 눈길, 세상을 껴안아 보살피는 손길을 약속하십니다. 생명의 숨결인 하느님의 영, 동행하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협조자 성령입니다. 이 영이 성찬례 안에서 작은 밀떡과 값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으로 변화하는 신비를 마련합니다. 교회 안에서 작고 모자란 인간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적을 선사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듭니다. 교회는 다시 세상의 삶 속에서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를 ‘영적인 실체’와 ‘제도적 도구’로 나누어 대결시키려는 이분법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관련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숨결과 그리스도의 동행과 성령의 힘이 만든 영적이고 역사적인 실체입니다. 교회로만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호흡하고 삽니다. 그 호흡 속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성이며 체험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합니다. 일치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체험합니다. 여기서 교회의 생명인 선교가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