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행동 연재] 전례 행동의 원칙 –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Saturday, February 9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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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행동의 원칙 –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그리스도교는 다른 여느 종교 예식처럼 형식과 행동이 있지만, 그리스도교만이 지닌 흔들릴 수 없는 기본 원칙이 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삶이며, 이분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 공동체가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건을 축하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시공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의 사적이고 내적인 신심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더 나아가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그 신앙을 표현하도록 요청한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신자를 그 지체라고 설명하며 강조한 이유이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초대받고,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한 몸을 이룬다. 세례와 성찬례가 교회 공동체의 전례와 신학의 근거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전례 공동체는 몸으로 함께 신앙을 표현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그에 따라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정교회는 ‘일어서 예배하는 교회’, 로마가톨릭교회는 ‘무릎 꿇는 교회’, 개신교는 ‘앉아 있는 교회’라고 한다. 저마다 그 뜻과 강조가 분명하다.

일어서는 행동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를 상징한다. 무릎 꿇는 행동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성찰하며 참회하려는 표현이다. 앉는 행동은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설인 설교에 조용히 귀 기울이겠다는 생각이다. 교회와 역사의 특성에서 마련된 것이다. 성공회는 어떤 교회로 이름 지을까? 현대 전례 운동의 경험과 배움을 늘 존중하는 성공회는 전례의 흐름과 주제에 따라서 일어서고 무릎 꿇고 앉는 일을 모두 적용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뻐하며 여러 사람과 함께 한 몸을 이루려고 ‘춤추는 교회’라고 하면 어떨까?

춤추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전례 행동은 성찬례에 근거가 있다. 구원은 창조의 하느님, 구원의 그리스도, 변화의 성령이 협력하여 이루신 사건이다. 전례는 삼위일체의 행동 속에 드러난 협력과 친교를 우리 전례 안에서 닮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이 협력을 생각하여, 전례학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다시 정리한다.

첫째, 전례 행동은 성직자나 집전자의 역할만이 아니다. 전례에 참여한 모든 이가 전례의 집전자이다. 예배로 모인 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늘 되새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드러난 헌신을 기억하며, 변화를 만드시는 성령을 청원하여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모두 참여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로써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연결된다. 전례의 순간을 넘어서서 우리 일상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것도 신앙인 개인이 아니라 교회로 하나된 선교의 사명을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펼치는 것이다.

넷째, 전례 행동은 전례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축성의 순간과 같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순서와 그 행동에 저마다 소중한 뜻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되새기며 움직일 때 전례 경험이 더욱 선명해진다.

다섯째, 함께 모여서 드리는 이 전례 행동으로 우리는 개인으로 모여들었다가 교회라는 한 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운 몸인 교회 공동체의 형성이 전례의 중요한 결과여야 한다.

  1. 성공회 신문 2019년 2월 9일 치 (↩)

신에게 솔직히

Sunday, November 1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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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성공회신학)

사람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책이 있습니다. 자못 진지하게 삶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무렵의 책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는 합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오랜 생각을 접고, 우선 종교와 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다짐한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습니다. 하라는 입시 공부는 안 하고 교과서 뒤에 몰래 펼쳐서 여러 신학책을 읽고는 했습니다. 아직 철모르던 때에 어느 분이 소개해 주신 책 하나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에게 솔직히> Honest to God (1963년). 그 제목이 마음에 깊이 걸렸습니다. 현실의 교회가 하느님께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저 자신도 물었습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가?’ 책의 저자 존 로빈슨(1919-1983년)은 자신이 겪는 신앙의 의문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흔들리는 신앙의 터전을 어떻게 하면 쇄신할까 고민했습니다. 그가 저명한 성서학자이고 성공회 주교님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신학자와 주교가 이렇게 터놓고 고민해도 되나?’

로빈슨 주교님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씨름한 신학자들을 초대하여 대화합니다. 이 시대에도 하느님을 ‘저 하늘 위나, 이 세상 밖에서’ 찾을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노인의 얼굴을 한 채 심판관을 자처하는’ 신을 상상하는 관습이 옳은 일인지 묻습니다. 그는 성서학자인 불트만을 따라 성서를 새로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나눕니다. 조직신학자인 틸리히를 읽으며 하느님을 인간 존재의 힘이라고 새롭게 이해합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순교했던 본회퍼를 되새기며 세속사회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신앙이 가능한지 성찰합니다.

주교님은 변화한 세상에서 신앙의 의미를 정직하게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직함때문에 교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찌 주교가 이런 망발을 하느냐?’는 험한 말도 나왔습니다. 친구들도 너무 나갔다고 핀잔했습니다. 신자들은 의심 없이 물려받은 신앙을 흔드는 이야기가 불편했습니다. 여러 공격을 받아 외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려 했던 이들과 교회 밖에 있던 이들은 이 책이 던진 질문으로 하느님과 신앙, 그리고 시대에 관하여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갔습니다.

30여 년 전 그 책을 제게 쥐여 주었던 분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신앙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자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솔직하고 깊은 신앙 안에서 자유와 기쁨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가을 낙엽처럼 헤매는 이들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은 다시 누군가에게 줘서 이제는 제 손에 없습니다. 그도 저와 같은 축복을 누렸으리라 믿습니다.

신에게 솔직히. 그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마음이 뜨겁고 떨립니다. 신앙을 버릴까 하던 방황을 거쳐, 로빈슨 주교님과 함께 성공회 전통 안에서 정직한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고민과 정직한 배움 안에서 쉬지 않고 흔들리는 신앙이 참 아름답습니다.

  1.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복음닷컴> 2018년 11월 18일 치 (↩)

[전례력 연재] 성도의 상통 – 추석의 신학

Saturday, September 22n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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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상통 – 추석의 신학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공회 기도서>(2004년)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설 명절과 추석 명절을 ‘주요 축일’로 정하고, 주일과 겹칠 때는 주일보다 우선하여 지키게 했다는 점이다. 축일 지정의 전통에도 맞고 우리 문화 존중의 태도를 잘 표현한 일이다(기도서 27쪽). 그런데 명절을 축일로 지키는 일에 관해서 여러모로 살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도의 상통’ 교리를 명절 예배의 근거로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조상 추모 예식을 조정하여 실천해야 한다.

<기도서>는 추모 예식의 신학 근거를 ‘성도의 상통’ 교리라고 분명하게 밝힌다(806쪽). ‘성도의 상통’은 이 세상을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끊이지 않는 교제를 말하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구분이 없다. 교회는 역사의 모든 신앙인을 ‘성도’(saints)라고 부른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 공간이고 예배는 그 시간이다. 하늘과 땅에서 같은 성도로 서로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아름다운 신앙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별세자 추모를 교회에 모여서 했다. 순교자를 기억하고 먼저 떠나간 가족, 동료 신앙인을 추모하는 일은 공동체의 의무였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공동체의 추모 예배는 가족 중심의 사적인 ‘연(煉)미사’로 변했다. 말 그대로, 연옥의 영혼을 위하 드리는 미사라는 뜻이다. 원래는 사목적인 위로와 희망을 담았던 ‘연옥’ 교리가 변질하여, 별세자의 영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부패가 횡행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연미사’ 뿐만 아니라 ‘별세자를 위한 기도’를 없애고, 추모 예식의 의미를 깍아내렸던 이유다. 성공회는 중세의 잘못을 반복하지도 않고, 종교개혁자들의 속 좁은 태도를 따라 하지도 않았다. 늘 ‘성도의 상통’ 신학으로 중심을 잡았다.

한국에서는 왜 교회 안에서 추모 예식을 드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상 제사와 미신을 없앤다는 이유로 교회의 예법에 따라 교회로 모여 드리게 했다고 추측한다. 제사 관습을 멈추게 하고, 미사와 예배 안에서 신앙 교육 효과를 얻는 방법이었겠다. 이제 선교사 시대를 벗어난 교회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우리 관습의 본래 뜻을 함께 헤아려서 새로운 길을 터야 한다.

가족 전체가 신앙인이라면 명절 예배를 성당에 모여서 드리면 좋겠다. 특히, 설과 추석 명절에는 제대 앞에 소박한 음식상을 차리고, 우리 전통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한다. 신자들의 기도 부분에서 여러 성인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성인 호칭 기도에 이어, 별세한 이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다. 기도 후에 신자들은 제대를 향하여 모두 정중히 목례하고, 평화의 인사를 함께 나눈 뒤, 성찬의 전례로 이어가도록 한다.

가족 안에서 종교가 서로 달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명절 예식을 두고 다른 종교 관습 때문에 갈라지는 일을 피해야 한다. 갈등을 중재하는 일이 신앙인의 도리이다. 이때는 성당보다는, 가정에서 드리면 좋겠다. 우리 전통의 음식상을 소박하게 차리고, 절을 할 수도 있다. 신위를 놓지 않고, 초혼(강신) 없이, 순서에 따라 말없이 행동으로만 예를 표한다. ‘성도의 상통’ 신학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뒤에 가까운 조상에 관한 기억을 나누는 순서를 갖고, 기도서에 있는 추모 예식 전체나 일부분으로 마칠 수 있다.

예식 준비와 실행에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절 횟수는 두 번으로 하되, 남녀 구별은 두지 않는다. 음식상은 ‘제사상’이 아니라, 예가 끝나면 상을 곧바로 옮겨서 가족 전체가 먹을 수 있는 상차림으로 한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가중되는 명절 풍습을 신앙인이 먼저 바꿔야 한다. 복잡한 제사상 관습은 오랜 전통이 아니라 조선 말 신분 질서가 어지러워지면서, 저마다 ‘양반 제사상’을 흉내내어 정착했다. 그 노역은 조선의 ‘종’들에서 근대의 ‘여성’으로 넘어왔다. 이를 끊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9월 22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