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파수꾼 –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Tuesday, June 24th, 2014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이사 40:1~11 / 시편 85:7~13 / 사도 13:14~26 / 루가 1:57~66,80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들 가운데 탄생 축일을 정하여 지키는 분은 성모 마리아(9월 8일)와 세례자 요한, 딱 두 분입니다. 정교회 성당에는 제대를 둘러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라는 성화벽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대 혹은 예수님의 이콘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양쪽 곁을 지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성서의 기록과 교회 전통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와 늘 비교하여 역사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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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겼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남성 제사장이었던 즈가리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요한의 수태고지를 믿지 못합니다. 그 탓에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났습니다. 젊은 여성이고 시골 아가씨였던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예수의 수태고지를 믿습니다. 마리아는 그 유명한 마리아 송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비교에서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제사장과 시골 무지렁이, 그리고 믿지 않음과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대와 성과 지위와 행동의 전환이 뚜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만두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기대하라고 외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을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신과 함께 이미 와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고 부르시며, 당신 자신과 하나가 된 ‘작은 그리스도’로 여기시고,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모본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 전통을 완성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정교회 전통에서는 9월 23일을 세례자 요한 수태고지로 지킵니다. 추분 때라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수태고지 3월 25일은 춘분 때라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의 선포’를 넘어서서 ‘말씀의 실천’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고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여러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중의 배신으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분은 이런 삶을 미리 알았을까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성모문보, 5월 31일),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기뻐 뛰놀았습니다. 역사의 공명이 이 두 분에게서 시작되었고, 한 분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기꺼이 옛 역사를 마감하며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분은 그 희생을 이어받아 죽음과 부활로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런 비교는 두 분의 우열을 가리려는 일이 아닙니다.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할 때라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옛 시대가 자연스럽게 가고 새 시대가 자동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임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그다음에 오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자기 몸을 열었다면,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웠습니다.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 기쁘게 뛰놀았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 역사의 전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두고 신학자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는 시대와 시간의 경계를 헤아리는 세례자 요한인가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우리가 서 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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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

Saturday, May 17th, 2014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학살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교회와 신학 역사의 전환점으로 새겼습니다. 그 학살 이후로 모든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서,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고통인 것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회와 세계는 이를 다시 망각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아랍의 전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20세기의 남은 시간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이런 학살 전쟁을 제각기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졌습니다. 사람과 인생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연대로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는 종교심은 사라지고, 미움을 부추기는 근본주의가 많은 종교를 먹어치웠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앙인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지던 날, 9.11을 기점으로, “9.11 이후의 종교”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동서 냉전을 마감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고 주름잡으며 스스로 ‘위대한 나라’로 일컫던 미국이 자국민 3천 명을 순식간에 자기 안방에서 잃었습니다. 온갖 전쟁을 자기 영토가 아닌 남의 영토에서 치렀던 미국은 자국 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그 비극적인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든 종교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쳐놓은 종교의 욕망, 시쳇말로 ‘삼박자 축복’(영혼, 물질, 건강 축복)은 이런 깨달음이 주는 변화의 희망을 여전히 더디게 만듭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입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된 어른들은 아이들마저도 학교 감옥에서 괴물 훈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지만, 우리만 모릅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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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이 가능할까요?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내 삶에 디엔에이(DNA)처럼, 아니 원죄처럼 새겨진 삼박자축복, 기복신앙, 특권의 남용과 오용을 찢어서 걷어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이러다가는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3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하느님 곁에 우리가 앉을 가능성은 참으로 낮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염려에 행여 “이 세상 안락을 등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라고 진짜 믿었어?” 하는 ‘속된 종교인’의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간 [복음 닷컴] 162호, 2014년 5월 18일(↩)

성삼일에 듣는 “톰 조드의 유령”

Thursday, March 28th, 2013

성삼일(Triduum Sacrum)에 듣는 고전적인 성가가 숱하겠으나, 나는 오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톰 조드의 유령”(The Ghost of Tom Joad)을 들으며, 이 거룩하고 전복적인 시간을 준비한다.

미국 현대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널리 읽혔지만, 그 자신의 사회주의와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소설에 담긴 참혹한 현실은 세계화한 자본주의의 패권 아래 곳곳에서 이주 노동자와 같이 여전히 주변부를 떠도는 이들 안에서 확장될 뿐 나아질 기미가 없다. 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까?

스타인벡은 노벨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성공회 신자(Episcopalian)였던 스타인벡은 역사 속의 교회에 비판적이면서도 복음의 가치인 측은지심과 사랑을 그의 소설에 되살려 놓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에 인용한 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측은지심과 사랑을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근거여야 한다고 나 스스로 해석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피력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낙관주의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생각했던 이상이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펼쳐졌고 펼쳐지는지를 목격했던 후대 사람이니까. 세상이 변하지 않는 여러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런 낙관주의가 인생 곳곳에 놓인 탐욕과 권력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진 탓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은 바로 이같은 낙관주의의 균열과 그 깨어진 틈에 존재한다.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허튼 낙관주의를 의심하는 비관주의자이며, 억압의 비관주의에 저항하는 낙관주의자이다. 이 균열과 깨진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부활이 그 빛이다.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1939)가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은 마당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사람이 아닌 <<톰 조드의 유령>>(1995)을 우리 안에 되살려 놓는다. 이 노래를 성삼일 성가로 들으며 나는 톰 조드의 유령, 아니 예수의 유령을 찾는 성삼일을 시작한다.

톰 조드의 유령
브루스 스프링스틴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느니
고속도로 순찰 헬기가 산등 위를 날아오고
다리 밑 모닥불 위에선 뜨거운 국물이 끓고 있네
피신처를 지나는 철조망의 끝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온 것을 환영하고
남서부 어디 차 안에는 가족들이 잠을 자고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는 곳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그는 침낭에서 기도서를 꺼내고
사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니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때를 기다리고
지하도 아래 종이상자 안에서
약속된 땅을 향한 편도 차표를 꺼내느니
배에는 구멍이 들고, 손에는 총을 든 땅
돌베개를 베고 잠들며
도시를 흐르는 수로에서 몸을 씻는 땅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고
모두가 어디로 향하는 지 알고 있지만
나는 모닥불빛 아래 앉아
톰 조드의 유령을 기다리느니

이제 톰이 말하네. “엄마, 경찰이 어떤 사람을 때리고 있을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저를 보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에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흠,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가사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