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Sunday, May 31st, 2015

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요한 3:1~17)1

“우리는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구원 잔치인 전례 때에 드리는 이 신앙고백과 찬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르나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삼위일체 신앙을 선언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정통 그리스도교와 빗나간 종파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성공회는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에 우뚝 서서 삼위일체를 본떠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성부 하느님은 창조의 땀방울과 숨으로 우리에게 녹아계십니다. 하느님은 여느 종교와 신화에 나타나는 신과는 달리, 손수 더러운 흙을 손에 묻히는 수고와 땀으로 인간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나뉘지 않고, 하느님의 형상을 따르고 거룩한 숨결(영)이 스며들어 우리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창조는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과 거룩한 숨결이 태초부터 한데 어우러진 세계입니다. 하느님이 깃든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정의로운 관계라 말합니다.

삼위일체 성자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창조 때 마련된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가 끊어지고 관계가 부서져서 인간은 저 멀리 떨어졌습니다. 하느님은 그 낮은 데로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 삶의 고난을 나누며 우리 손을 붙잡아 끌어올리십니다. 몸이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우리 몸에 새로 넣어주셔서 먹여 주셔서 창조 때의 새 생명이 우리 핏줄에 돌게 하십니다. 성자는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성령 하느님은 우리가 부활의 자유로운 생명을 살도록 거룩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서로 떨어져 서로 억압하고 싸우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새로운 몸과 생활로 거듭납니다. 성서가 전하듯이, 절대자 하느님과 인간의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서서히 줄어듭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의 관계로 가까워지고, 자녀의 관계로 친밀해지고 서로 벗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자유와 일치의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정의와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하나 되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부족한 대로 서로 환대하며 자리를 내어줍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한 친교에 참여하며 기뻐하고, 그 친교를 우리 몸으로 익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세상 안에서 살되, 이 세상이 꿈 꾸지 못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새로운 관계를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배우며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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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31일 성령강림대축일 주보(↩)

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Wednesday,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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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Friday, August 15th, 2014

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8월 15일)1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이 기쁘고 즐거운 날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모 마리아 안식 축일과 겹쳐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송가’(루가 1:46~55)는 광복절을 되새기기에 좋은 해방의 복음이요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51~53).

성모 마리아의 삶은 이 ‘마리아 송가’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양 중세처럼 성모 마리아에 관한 잘못된 신심과 미신적인 숭배를 낳기에 십상입니다. 마리아는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녀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작고 가녀린 몸을 당신께서 몸소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뚜렷합니다.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천주교만 유독 이날을 ‘성모 승천’ 축일로 지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인데, 중세기에 생겨난 생각입니다. 1950년 천주교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무리한 주장을 펴며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가르침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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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정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의 ‘안식’(dormition) 축일로 지킵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잠들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신자는 모두 잠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쉴 뿐입니다.

정교회의 ‘성모 안식’ 이콘은 이 신학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아기 예수를 낳았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로 예수님 품 안에 안깁니다. 지상의 성모님이 천상에서 아기가 되고, 지상의 아기 예수님이 천상에서 마리아를 안은 ‘어머니’가 됩니다. 이 역전이야말로 성모 안식 축일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뒤바꾼다는 뜻입니다. 낮은 이들을 들어 올려서 하느님께 함께하도록 위치를 바꾸는 사건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가난하고 힘없는 종을 도우셨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10일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