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Sunday, June 28th, 2015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마르 5:21~43)1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 이야기는 모두 ‘구원’ 이야기입니다. 성서 원어에서도 ‘치유’와 ‘구원’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아픈 이들을 고치신 사건에는 우리 삶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비롯한 오늘 독서에 담긴 구원의 선포는 분명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여성이 오늘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 두 여성을 이해할 때, 오늘 복음의 뜻이 풀립니다. 2천 년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의 고통 아래 살았습니다. 한 여인이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았습니다. 당시 종교의 정결법은 피를 흘리는 여성은 ‘더러우니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오염된 여인’의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아픔을 돈벌이로 이용했습니다. 회당장의 딸은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상황에 관한 고발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착취에 희생당하거나, 주어진 능력과 뜻을 펼치지 못하고 짓눌리기 일쑤입니다.

하혈병 앓던 여인은 몰래 예수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세상은 ‘두려운 남성의 체제’였기에 치유의 힘마저도 숨어서 얻어야 했습니다. 여느 ‘남성’과 달리, 작은 이들에게 세심하고 예민헀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 나오게” 했습니다. ‘나오라’는 말씀은 그의 존재 전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고통, 숨기고 싶은 자신의 연약함을 당당히 선언하며 ‘커밍아웃’(coming-out)하여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때 새로운 정체성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이제 “딸”(디가테르)이라 부르며, 온전한 “평화”(샬롬)의 삶을 분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랑하는 작은 딸’(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미 죽었으니 ‘폐를 끼칠 일 없이’ 그만두셔도 좋다는 조언을 마다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희망을 만드는 일에는 그 어떤 일도 ‘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을 무릅쓰고서라도 손을 펼쳐야 합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희망을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라”는 말씀에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을 뚫고 일어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미리 드러납니다. 억눌린 ‘작은’ 이들의 생명은 일어서야 하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지닌 이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며 걷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치유는 아프고 혼란스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감수성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에게만 예민하지 말고, 밖에서 다가드는 요청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한계와 정체성을 인정할 때, 구원이 펼쳐집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이웃과 사귀며 하느님과 신뢰를 마련할 때, 신앙이 힘을 얻습니다. 이 신앙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눌린 생명을 살리고 꽃피우는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합니다. “나오라, 일어나라, 가서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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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28일 연중13주일 주보(↩)

저편으로 건너가자 –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Sunday, June 21st, 2015

“저편으로 건너가자” –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마르 4:35~41)1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잠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보채는 통에 바람을 꾸짖어 구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수님이 옆에 늘 계시는데도 신뢰하지 못하여 삶의 고난을 겪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인생의 모든 풍랑은 잔잔해지리라는 기대 어린 풀이가 짝을 이루기도 합니다. 나름 뜻이 깊지만, 더 깊고 너른 차원도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차원과 우리의 삶에서 이뤄나갈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짚어야 합니다.

어거스틴 성인(354~430년)은 예수님과 제자가 함께 탄 ‘배’를 신앙인과 교회의 내면 상태로 풀이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입니다. 종종 배를 위태롭게 하는 거센 바람을 만나 신앙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과 저런 소문에 화가 나면 내면에서 분노의 파도가 일고 모종의 복수심으로 변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도록 내버려 두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까닭입니다. 십자가로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늘 깨우고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우리 자신과 교회는 풍랑에 먹혀 가라앉고 맙니다. 바른 신앙인은 우리 내면 깊은 곳곳에 예수님을 깨워 그분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함께 걷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신앙으로 걷는 인생길이 탄탄대로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신실했던 욥의 고난 이야기를 듣자니 이런 기대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사뭇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일까요? 이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 낳은 창조세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태에서 나온 자녀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지 않을 부모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 고통의 호소와 하느님 은총의 응답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은 종종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시간의 간격을 견디어 내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며, 삶의 고통을 세상 전체 일로 바라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습니다. 자기 내면의 상태를 정직하게 살피라는 초대입니다. 신앙 가운데서도 여전한 고통을 인내하며 세상의 아픔을 발견하는 항해를 계속하라는 부탁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이동과 항해의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납니다. 자기 안에 안주하거나 자기보호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는 ‘이편’을 떠나, 더 넓고 깊게 세상의 아픔을 살피며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로 치유하는 ‘저편’의 하느님 나라로 우리 시선과 행동을 옮겨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분노를 인정하기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깨워 우리 삶의 판단과 행동을 이끄시도록 마음을 열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이 찾아옵니다. 그동안 지내던 대로 자신을 보살피던 ‘이편’을 떠나 세상 문제가 복잡한 ‘저편’으로 떠나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파와 고통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거친 사랑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다집니다. 두려움 없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시선과 행동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종내에 ‘거센 바람’을 평화롭게 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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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21일 연중12주일 주보(↩)

생명을 위한 성령의 공동체 – 경동교회 교환예배

Sunday, June 7th, 2015

창세 3:8~15 / 시편 130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2015년 6월 7일 (성삼후 첫주일, 연중 10주일)
한국 기독교 장로회 경동교회 (교환예배) (성찬례 및 강론 동영상)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모든 교우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 된 기쁨으로, 경동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처럼 말씀과 성사의 잔칫상을 함께 나누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저 자신은 사적으로 기독교 장로회에 깊고도 고마운 은혜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직 철없던 시절,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할 때, 저는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을 통해서 성서와 복음에 관해 새로운 시선을 발견했고, 새로운 교회의 행동과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겨우 눈뜬 앳된 시선으로 여전히 어리둥절할 때, 꿈과 희망에만 사로잡혀 좌충우돌할 때에도 바른 신앙인의 길과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나 언제나 너그러운 인내로 저를 단련시키고 안내해준 어른들과 공동체도 바로 기독교 장로회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장 교단의 목회자와 신자로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들고 애쓰는 여러 지인과 친구들이 제 눈앞에 환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신 세 분의 이름과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꼭 밝히고 싶습니다. 안병무 박사님과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의 기장 구민교회와 김거성 목사님입니다.

잠시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돕고 보살피며, 서로 도전하고 배우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걸어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희 서울 주교좌 성당과 여러분 경동교회는 서로 다른 전통과 경험을 들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잔칫상에서 먹고 마시며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생각하며 서로 먹이며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풍요로운 기쁨이 컸기에, 오히려 세상의 궁핍과 가난함, 갈등과 분열을 도드라졌고,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삶과 사회가 피폐해가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살펴보며, 우리의 다짐, 우리의 실천을 되짚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를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비밀을 앞세워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이 종교계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과 경험은 이러한 통념과 사뭇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신앙의 핵심주제가 선명하고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가 ‘죄’이며 ‘타락’이라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고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처음 창조 때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종교이든 신앙이든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사유화할 수 없는 공동의 나무를 훼손하거나 독점하는 잘못을 인간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은 추궁하려는 소환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여전히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아담은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멀리 숨습니다.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며 감탄하며 여태껏 사랑하던 ‘여자’ 하와를 아담은 이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 핑계와 비난의 사슬은 이제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로 번집니다. 이 일로 함께 사귀며 나누던 관계,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사랑하던 관계가 깨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난과 분열의 영이 만들어 내는 ‘죄’와 싸우는 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싸우는 방식은 죄와 타락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대안으로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를 보듬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일은 전혀 다른 ‘영’의 활동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을 무고하고 혐의를 덧씌우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사탄의 비유를 들어 논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악령인 사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은 이 험담과 파괴의 행동을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동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로 죽이고 죽임당한 한국전쟁은 어떤 영적인 힘이 만들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65년간 서로 갈라져서 적대하는 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깊이 성찰하고 물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라 자처하는 교회들이 보여준 상호 비난과 정죄, 분열과 갈등은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과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혐의를 씌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며, 자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꿈꾸고, 자신들과는 다른 모양으로 사랑과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세운 기준과 울타리가 아니면, 모두 적이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음새 없이 통짜로 만드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창조운 세계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악령을 단단히 제압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는 상처 입고 위로받으려 신앙을 찾은 사람을 속이며 생각과 태도를 완고하게 합니다.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와 권력은 자기 안위와 안녕만 생각하고 타인을 거들떠 보지 않는 욕심 가득한 세상, 부패한 세상을 만듭니다.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완고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동교회는 개신교의 깊은 말씀 전통에 터 잡아 성서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예언자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생명의 공간, 자유의 공간을 이 자리에 마련하였습니다. 힘없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을 이곳에, 여러분 마음에 깊이 초대하여 보호하고 함께 위로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은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신앙하는 깊고 풍요로운 방식을 지켜왔습니다. 사회의 변화와 유행에 휘청거리는 번영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고 느리게 살며,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 몸의 모든 감각으로 창조세계를 느끼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바쁜 삶에서 멈추고 하느님의 품을 닮은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와 쉬도록 함께 초대하고, 빵과 잔을 나누며 우리가 모두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경동교회와 서울 주교좌 성당은 함께 세상에서 휘젓고 다니는 분열의 영, 반(反)생명의 ‘영’에 저항하고 상처 입은 세계를 껴안아 먹이며 살았습니다. 이 경험만이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제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싸매고 고치는 일로 연대해야 합니다.

이 앞에 마련된 부활의 식사, 새로운 생명의 식탁에,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친교와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형제자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눔의 공동체가 서로 먹이고 키우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어머니’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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