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삼위일체의 삶과 연중시기

Saturday, June 9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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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삶과 연중시기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과 관련하여 <1965년 공도문>과 <2004년 기도서>의 큰 차이 하나는 성령강림주일 이후 시기의 명칭이다. <공도문>은 이 시기를 ‘성삼후’(성 삼위일체주일 이후)로 불렀지만, <기도서>는 뜻이 불분명하고 밋밋한 ‘연중시기’라고 이름 붙였다. 1960년대 천주교의 전례력 개정을 그대로 따라 한 결과다. 천주교 내부에서도 말 많은 명칭을 성공회가 한참 후에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1960년대라면, 우리 <공도문>이 나온 바로 그즈음인데, 우리 전통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천주교는 ‘연중’이라는 말은 라틴어 ‘오디나리우스’에서 번역했다. 그러나 같은 말인데도 쓰임새가 서로 달랐다. 교회에서는 ‘전례의 질서’를 뜻했지만, 세상에서는 ‘그저 보통’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전례의 시간과 주일은 모두 특별하고 뜻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이 문제를 알아차린 몇몇 성공회 기도서는 ‘연중-보통’이라는 용어 대신에 ‘특정’(Proper)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교회의 깊은 전통에서 보면 여전히 부족한 표현이다.

서방교회에서 성 삼위일체 주일 관습은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세력을 얻자, 지역 주교들이 정통 교리를 되새겨 강조하는 뜻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이 축일을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로 공식 확정한 때는 14세기이다. 이러한 결정에는 그 4백 년 사이에 영국교회에 뿌리내렸던 전통 때문이라는 주장이 높다. 후에 순교자로 잘 알려진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1118-1170년)는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에 성품됐고, 이후로 이 주일을 성삼위일체를 기리는 주일로 지키게 해서 널리 퍼졌다. 그런 탓인지, 영국교회 전례 전통인 ‘사룸 Sarum 전례’는 이후 주일을 모두 ‘성삼후 주일’로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 <공도문>은 이 전통 아래 있다고 하겠다.

동방교회는 사정이 다르고 울림이 더 크다. 성령강림주일과 성삼위일체주일이 같다. 부활절기의 절정으로서 성령강림사건을 되새겼고, 부활 사건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과 행동에 감사하고 경배하려는 뜻이었다. 부활절기에서 똑 떼어 성령강림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교회의 탄생’이라고 풀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는 부활로 얻은 새 생명의 공동체가 성령으로 축성되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고 일치하면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정교회가 그 다음 주일을 ‘모든 성인의 주일’로 지키는 관습은 이러한 신학적 일관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미 채택한 ‘연중시기’라는 표현은 언젠가 바로 잡았으면 한다. 그 전에 우선 ‘성삼후 시기’는 ‘연중’ 내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펼치신 구원 행동을 우리 신앙인과 교회의 몸에 되새기는 시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 시기는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랑과 희생을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우리 삶을 포개는 훈련의 시간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세상이 겪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로 참아주고 환대하며, 함께 시련을 이겨내며 희망을 만들어 가는 실천의 시간이다. 푸르른 생명의 상징인 ‘녹색’을 입고 장식하여 생명을 향한 수고와 땀으로 그 열매를 맺어가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전례력의 막바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6월 9일 치 (↩)

[전례력 연재] 전례독서 –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Saturday, May 12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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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독서 –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교회력)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구원의 역사를 축하하고, 주님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사는 일이다. 신앙인은 이를 전례 안에서 훈련하고, 성서 안에서 확인한다. 전례력에 따라 ‘전례독서’(성서정과)를 마련하여 복음에 드러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기고, 서신성서에서 교회의 신앙을 확인하는 이유이다.

‘전례독서’는 정해진 절기와 주제에 따라 전례 안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이다. 그 기원은 유대교까지 올라간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펼치신 구원 역사를 매년 되새기도록 1년에 걸쳐 ‘토라’(모세오경)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전례독서를 마련했고, 전례략이 정비된 5세기에 이르러 그에 맞는 ‘전례독서’가 자리 잡았다. 초기 전례독서는 복음과 서신서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약은 크게 중시하지 않았고, 시편은 성가대의 노래로 편곡하여 불렀다. 대체로 1년 주기 전례독서로 매년 되풀이하여 읽었다.

1960년부터 전례독서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천주교는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 개혁을 교회 개혁의 첫걸음으로 삼았다. 전통적인 1년 주기 독서를 개정하여,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에 바탕을 두고, 요한복음서를 주제에 따라 삽입한 3년 주기 독서를 마련했다. 1969년의 천주교 전례독서는 전례독서에 관한 이해를 크게 증진했다. 당시 기도서를 개정 중이던 성공회와 루터교가 이를 적극 수용했고, 다른 개신교들도 잇따라 도입했다. 이로써 3년 주기 주일 성찬례 전례독서와 2년 주기 매일기도(성무일도)의 독서가 마련됐다. 물론, 교단 전통에 따라 조금씩 수정하여 사용한다.

북미 그리스도교 연합 모임인 ‘공동전례문위원회’는 수년의 노력 끝에 1983년 ‘공동전례독서’를 출간했다. 이후 다른 영어권 교회들과 협력을 확대하여 1992년 ‘개정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 RCL)를 내놓았다. 성공회는 대체로 이 전례독서를 따른다. 대한성공회는 1983년부터 ‘공동전례독서’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일 전례독서는 3년 주기이다. ‘가’해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는 루가복음서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걷는다. 요한복음서는 주요 절기들(대림/성탄, 사순/부활)에 사용되며, 짧은 마르코 복음서를 보충하여 ‘나’해에는 요한 6장을 덧붙여 사용한다. 전례력의 주제는 같지만, 복음서의 특성에 따라 해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최근 전례독서의 큰 변화는 구약성서의 재발견이다. 구약과 신약에 드러난 구원 역사의 일관성을 확인하고,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전통적으로 구약을 복음서의 주제에 따라 배열한 ‘선택 독서’가 있고, 새롭게 구약의 흐름을 존중한 ‘계속 독서’가 있다. 천주교는 전자를 고수하지만, RCL은 ‘계속 독서’와 ‘선택 독서’를 모두 제시하여 설교자가 선택하도록 배려했다. ‘선택 독서’든 ‘계속 독서’든 한 방식을 선택하면, 한 해 동안 유지하는 것이 좋다.

‘전례독서’가 3년 주기로 반복되는 탓에, 사목 상황과 사목 주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성서 본문을 선택하는 개신교 예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데 많은 성서학자가 동의한다. 세계 여러 교회가 같은 전례력을 지키며 같은 성서 본문을 두고 성찰하는 일은 한 분이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함께 고백하고 따른다는 중요한 징표이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5월 12일 치 (↩)

신앙 – 두려움 없는 의문과 대화의 길

Sunday, April 29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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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두려움 없는 의문과 대화의 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주일 낮 어느 골방 풍경 – 신앙 즉문즉답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시간입니다. 방금 드린 낯선 예배에 관한 궁금증이든, 종종 낯설고 기이한 교회라 불리는 성공회와 평소에 품었던 교리 문제이든, 아니면 요즘 돌아가는 사회와 정치 문제이든 함께 도전하며 머리 맞대고 정직하게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성찬례가 끝나면 어김없이 자유로운 질문과 답변의 시간이 열립니다. 스무 분이 넘게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 층 골방에 모입니다. 처음 방문한 이든 새로운 교회를 찾아 헤매든 이든 오래 출석하는 이든 누구나 환영합니다.

수년 전에 시작한 ‘신앙 즉문즉답’ 시간은 머뭇거리는 입가에 담은 웃음으로 신앙의 질문을 엽니다. 즉문즉답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변은 없습니다. 아니, 질문 없는 답변이나 가르침은 무기력합니다. 의심이 없으면 믿음은 없습니다. 아니, 의심 없는 믿음과 확신은 위험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일에서 신앙이 시작된다는 말은 뻔뻔한 으름장일 뿐입니다. 따지지 말고 그냥 따라야 길이 열린다는 말은 낯 두꺼운 사기입니다. 으름장과 사기가 종교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가르침과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신뢰는 길을 잃습니다. 길 잃은 사람이 많으면 이들을 유혹하는 거짓 술사들이 더 판을 칩니다. 이 악순환을 멈추는 방법은 정직하게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일입니다. 문답은 신앙의 길에 동행하는 첫걸음입니다.

# 교리문답 – 신앙의 산파술

질문과 답변의 대화법은 역사가 깁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법, 혹은 문답법으로 제자들을 자극하여 좀 더 정교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르쳤습니다. 그 탓에 스승이 먼저 질문을 던져 생각을 자극하고 대화를 이어가곤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선불교 전통은 화두를 던져서 깨달음을 향한 길을 탐구하게 했습니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뻔한 대답이라도 할라치면 방망이로 맞는 일이 잦았다고 전합니다. 문답은 진리를 찾는 길에서 늘 새로운 생각과 배움을 주고는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이런 문답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요약하여 가르치는 일에서 문답이 많이 쓰였습니다. 대체로 세례성사나 견진성사를 준비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려는 이들의 필수 코스였습니다. 조금 다른 점도 눈에 띕니다. 질문하고 답변하는 사람이 선생과 학생으로 굳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학생의 질문에 선생의 답변이 있을 수 있고, 선생의 질문에 학생이 답변할 수 있습니다. 대화로 배우는 일이 신앙 교육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대화 없이는 바른 신앙을 배우거나 따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회의 핵심 전통입니다.

종종 이런 대화의 신앙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가르침의 수단인 교리가 목적이 된 탓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시대와 문화 안에서 소통하여 설득하고 전달하려고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늘 변하고 발전해야 하는 교리가 변하지 않는 진리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이때마다 반성과 개혁이 뒤따랐습니다. 서방교회 종교개혁 기에 교파마다 앞다퉈 ‘교리문답서’ catechism 를 내놓은 이유입니다. 뒤틀리고 오해한 교리를 바로잡고 간략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고백과 교회의 신앙을 정리하여 증언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역시 금과옥조 변치 않는 자기 교단의 정체성이 되어 굳을 대로 굳기를 거듭했습니다. 다행히 교리의 한계를 아는 신앙인들과 교회들은 이를 거듭 개정하여 펴내고 새로운 시대에 신앙의 고민을 두고 씨름했습니다. 대한성공회 <기도서> 2004년 판에 새롭게 수록된 <신앙의 개요>가 그 한 사례입니다. 다만, 과거처럼 ‘정답’을 주지 않고 ‘답변’을 두어 대화와 연구로 더 나아가도록 격려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질문과 답변 – 신앙의 메아리

흔히 ‘교리문답’으로 번역되는 말은 그리스어 ‘카테케인’ katēchein 에서 나왔습니다. ‘말로 소리를 내 가르친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메아리를 뜻하는 ‘에케’ ēchē 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실은 서로 메아리쳐 가르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묻고, 이에 응답하는 일로 신앙의 가르침은 전달되고 널리 울리며 멀리 메아리칩니다. 신앙은 이 메아리를 따라가며 그 부딪는 산과 벽, 집과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 책의 원래 부제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탐구’ Exploring Christian Faith 로 달았으니 참 잘한 일입니다.

신앙의 메아리가 시작되고 울려 퍼진 변화의 과정과 그에 얽힌 사건과 사람을 만나는 일로만 우리는 진리의 파편 하나를 겨우 손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잠시 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며 냄새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다양한 감각의 체험은 의문을 갖고 탐구의 여정을 떠나는 일로만 가능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성공회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을 함께 찾는 여정을 떠나보자고 초대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이 책 역시 ‘정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메아리를 듣고 느끼는 방법을 안내하여 ‘생각하는 신앙’을 훈련하고, 자기 밖의 이들에 관하여 ‘사려 깊은 신앙’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응원합니다.

# 성공회에 관한 평범한 질문과 위험한 답변

성공회는 한국 사회에서 작고 낯선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입니다. 작고 낯선 것을 매우 꺼리고 인색하게 대하는 우리 문화 안에서 ‘성공회에 관한 질문과 답변’은 얼핏 흥미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의 <신앙 즉문즉답>에서 답변하는 제 경험에 따르면, 질문하는 사람은 대체로 무의식의 복합감정 안에서 묻습니다. 한편에서는 질문 자체에 자신의 주장을 담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과 너무 달라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교회를 떠날 이유가 충분한 셈입니다. 한편,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처지도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한 근거와 설명의 도움을 받아서 기존의 생각에서 헤어나 새로운 탐험에 몸을 던져보겠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말합니다. “신앙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확신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하느님과 이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분투하며, 진리를 식별”하는 사람들입니다(46쪽).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태도, 특히 성공회 전통을 잘 설명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보면 인생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오히려 아름답고 복됩니다.

“우리는 심지어 견뎌내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할 때조차, 그 순간에도 하느님이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약속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확신이 흔들릴 때도 하느님께서 당신 품 안에 안아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47쪽).

이 아름다움을 축하하는 자세로 이 책의 저자들은 다양하고 곤란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려 합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성공회 신자가 될 수 있느냐?”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 “천국과 지옥은 있느냐? 있다면 어떤 곳이냐?” 이런 솔직한 질문에 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답변을 제공하려 합니다. 질문의 주제에 따라, 때로는 역사의 상황을, 때로는 최근 과학적 발견의 새로운 사실을, 때로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해석의 다양성과 주된 뜻을 풀어줍니다. 그 답변은 ‘이렇게 말해도 될까?’ 하는 염려도 자아내지만 세심하고 논리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럽지 않으며 질문 자체를 비웃는 일도 없습니다.

종교 안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러 질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혼과 재혼 문제, 임신 중절 문제, 전쟁과 사회 참여에 관한 문제는 여느 종교와 사회 모두 씨름하고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한편, 성공회 신앙과 전통 자체에 관한 답변도 간명하게 제공합니다. 역사의 상황을 모르면 단견과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역사의 명암에서 자유로운 사회와 인간은 없습니다. 그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서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실존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성공회는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실존을 가장 정직하게 성찰하는 신앙 공동체라고 자부합니다.

실존적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선한 사람이 악으로 고통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47쪽). ’신정론’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에서 아직 선명한 대답을 내놓은 종교는 없습니다. 아니, 선명한 대답을 한다면 오히려 사기이거나 사이비 종교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공회의 저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 고통의 현실에 관하여 충분히 깊고 넓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빠른 답변에는 머뭇거려야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조심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새겨진 새로운 현실과 세계를 확인하고 바라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악과 고통을 허락하셨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비극과 요구에도 관여하셨고 온전히 참여하신다고 그리스도교인들은 믿습니다.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성 금요일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주일이 따라옵니다. 이로써 우리는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부활은 찾아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언제나 길은 있습니다”(49쪽).

한편으로는 현실의 변화가 없는 답답한 답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 안에서 서로 위로하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성공회 신자는 답변들 자체에 눈을 고정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하여 눈을 돌립니다. 그들과 함께합니다. 이야말로 위험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신적인 행동입니다.

# 기도서 – 예배가 신앙이다!

성공회는 교리서의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교회’입니다. 성공회는 고대 교회의 격언인 ‘기도의 법이 신학의 법’ lex orandi, lex credendi 이라는 신앙 전통에 굳게 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신자들이 함께 나누는 예배와 기도 경험을 신앙의 선언인 신학과 교리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논쟁 속에서 서로 배척하고 심지어 정죄하고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성공회는 이러한 극단의 역사를 겪으며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예배를 중심으로 주관적 감정으로 멋대로 흔들리는 신앙을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성공회는 ‘공동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 에 담긴 세심한 신학의 균형으로, 또한 전통과 현대가 어울려 만드는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 큰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공동체 기도와 예배에 관한 성공회의 강조는 또 다른 희망을 열어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려던 삶과 희망처럼, 교회는 세상 속에서 구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특히 전례 liturgy 는 교회가 가르치고 믿는 신앙의 내용, 곧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일상의 삶 속에서 훈련하고 실천하는 틀입니다. 공동체 전례 안에서 누리는 기억과 찬미와 감사와 나눔은 신앙인이 따를 ‘삶의 법’ lex vivendi 입니다. 공동체의 기도인 전례에 근거한 신앙의 이해와 삶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신앙인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그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계속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성서)과 교회의 가르침(교리)은 전례 속에서라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성공회 – 역사 안의 공동체

인간의 실존을 역사 안에서만 바로 이해할 수 있듯이, 성공회의 전통도 역사 안에서만 바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 성공회’의 저자가 ‘미국’ 성공회 신자를 독자로 생각하여 쓴 책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상황에서 조금 동떨어진 내용도 있습니다. 이 책의 우리말 편집인들과 감수인이 그 간격을 좁히려 저자들의 허락을 받아 여기저기 손을 대고 몇 부분은 수정하고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의 상황을 너무 일반화하면 성공회 전통에 오히려 어긋납니다. 성공회는 잉글랜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수단, 남아프리카, 콩고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 안에서 자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열매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어느 열매가 그릇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세계와 하느님의 생명을 어떻게 보살피며 지켜나가느냐에 자신을 맡기고 판단합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전통에 사로 잡히거나 전통을 쉽게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현대의 문화에 힘없이 유혹되거나, 무조건 반대하며 거절하지 않으려 합니다. 미국의 경험을 다 지우거나 크게 바꾸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황 안에서 성공회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가고 어떻게 변화를 마련했는지 우리 독자들이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역사와 현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순결한 교회를 이상화하고 실체 없는 교회를 공상하는 이단 종파들이 초기 그리스도교를 괴롭혔습니다. 교회를 ‘성사’sacrament 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교회를 구체적인 현실과 실체 안에 깃든 은총으로 이해할 때 교회와 신앙이 바로 섭니다. 성공회가 신앙과 권위의 식별 기준으로 닦아온 성서・전통・이성의 삼중 관계는 ‘성사인 교회’를 우리 삶과 역사 안에서 지탱하려는 노력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성’을 좁게 이해하여 과학 자체, 합리적 추론, 또는 개인의 자유로운 주장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이성 자체를 신앙의 대척점에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회의 이성은 교회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인 지성과 감성을 서로 신뢰하며 대화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안에서 역사와 삶을 더 깊고 균형 있게 이해하고, 현실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견디는 신앙의 힘입니다. 이점에서도 문답으로 대화하는 이성의 신앙은 개인이 정답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익혀서 역사와 현실 안에 있는 교회의 선을 함께 최대로 끌어올리려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건강한 신앙의 척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서로 정직하고 서로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려 깊은 성공회 신자들이면 늘 고백하듯이, 성공회의 길은 종종 힘들고 위태롭게 보입니다. 실제로 성공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분투, 힘든 신앙의 길이 그리스도교회을 지탱하고 더욱 건강하게 만듭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종교를 둘러보면 이러한 건강한 전통의 신앙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로

이 책은 굳이 요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은 짧고 분명하며, 답변은 사려 깊고 신중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차례를 펴서 자신이 궁금한 질문을 찾아 그 답변을 천천히 대화하듯 읽기 바랍니다. 혼자 읽어도 좋지만, 작은 모임에서 함께 나누면 그 대화와 배움이 더욱 커집니다. 이 책이 제시한 ‘생각해봅시다’하는 질문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질문을 만들어서 토론한다면, 독자가 이 책의 또 다른 저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제 다른 사람이 지시하거나 전달하기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 함께하는 공동체의 신앙이 출발합니다.

<신앙 즉문즉답>의 짧은 시간이 끝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성공회 신앙의 여정에 동행해서 기쁩니다. 환영합니다.”

  1. <질문과 답변 – 성공회 신앙 안내> Episcopal Questions, Episcopal Answers: Exploring Christian Faith (비아, 2018) 에 실린 해설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