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Sunday, September 3r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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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마태 16:21-28)

주일 복음의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니 혼란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베드로를 두고 ‘믿음의 반석이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사람’으로 칭찬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색하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시니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까요? 그러나 세상에 혼란을 더하는 변덕스러움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자기중심의 시선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옹졸함이 변덕을 일으키니, 주님의 칭찬과 꾸짖음이 번갈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앙과 행동은 교회의 반석이지만, 자기 중심성은 인생과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이를 식별하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이 닥칠 도전을 예견하십니다. 그 길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미워하고 박해하는 길입니다. 모함에 따른 고난에 굽히지 않는다면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주님과 신앙인을 모함하는 세력은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의 전통을 나누고 있다고 믿는 공동체의 일원들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내력과 경험을 들먹이며 기득권을 누리고 텃세를 부리는 이들입니다. 출신과 나이, 학력과 재산, 경험과 지위를 자기 안위의 기준으로 삼은 사람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고 맙니다.

이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탄을 객관적 형태를 가진 악귀 정도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러면 베드로를 ‘사탄’이라 꾸짖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권력 질서가 유혹하는 편안함에 머물며 자신의 행복감을 식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런 사람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불렀습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자기 만족감에 매달려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태도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하는 사탄입니다(23절).

신앙인은 믿음의 반석과 사탄의 걸림돌을 식별합니다. 같은 돌이라도 용도가 전혀 다릅니다. 같은 돌이라도 언제든 건물을 튼실히 떠받치는 주춧돌이 될 수 있고, 애먼 사람을 가로막고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주춧돌이었어도 공동체를 신앙으로 받들지 않고 삐져나와 기득권을 내세우면 금세 다른 사람의 발을 걸고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남에게 버림받고 혼자 굴러다니던 돌이더라도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 걸으면 언제든 주춧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역전의 상황을 뼈아프게 깨닫고 스스로 살피는 이가 신앙인입니다.

십자가는 나약한 인간의 변덕을 깊이 돌아보는 잣대입니다. 자신의 성과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새롭고 낯선 변화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베드로처럼 자신을 내세워 예수님을 꾸짖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이때 십자가는 자기를 내려놓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하라는 촉구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길 위에 있나요?

변모의 빛 – 선교를 향한 변화

Sunday, August 6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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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의 빛 – 선교를 향한 변화 (루가 9:28-36)

주님의 변모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셔서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느라 아주 바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주 홀로 떨어져 기도하는 시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서 자주 빠져나와야 새로운 신앙의 힘을 충전할 수 있습니다. 잠시 떨어져서 우리 삶을 지긋이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안주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으로 삶에 변화를 키워낼 수 있습니다. 그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교회의 선교가 세상에 펼쳐집니다.

사건은 산에서 일어납니다. 성서에서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땅의 유한한 인생이 하늘의 영원한 차원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이 경계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하게 우뚝 서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신앙인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땅의 생활을 하늘의 가치에 비추고 잇대며 살아갑니다. 자기 삶과 세상이 잘 변하지 않는 까닭은 땅의 염려에만 붙들려 골몰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고귀한 가치를 바라보며 떠나는 일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이러한 변화의 역사에 참여하라고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모세는 판에 박힌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고 깊이 느꼈을 때 가녀린 떨기나무에 깃든 하느님의 불을 만났습니다. 말주변이 없어 주눅 들었던 그가 노예의 대탈출을 이끌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하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 권력을 비판하다가 모진 고생을 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하늘의 자리에 올려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누리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과 만납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와 사회도 빛을 얻기 시작합니다.

변화를 향한 새로운 참여는 관습과 통념에서 탈출하는 모험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과 떠남’에 관해 논의합니다(31절). 이때 ‘죽음’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엑소더스’(해방의 탈출)입니다. 교회와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기득권의 관행을 그쳐야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겉에 드러난 영광만을 좇아 초막을 지어 머물려고 합니다. 안주하고 머물려고 온갖 변명과 뒷이야기마저 만듭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입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명예 주장을 그치고 하느님의 일에 귀 기울여 참여하라는 일갈입니다.

신앙인의 목표는 높은 산에서 땅과 하늘을 이으시며 빛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억압하는 어두운 땅의 관습에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모진 수고의 땀을 흘려 자유롭고 시원한 산의 높이에 올라서 하느님의 가치로 세상을 조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훈련하고 그 뜻을 품어 하산하여 교회와 세상을 바꾸는 노력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이 땅에서 빛나는 존재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향한 선교의 제자로 우뚝 서는 일입니다. 이때 주님의 비밀과 빛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 펼쳐집니다.

[전례력 연재]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Saturday, July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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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7월 22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막달라 마리아는 성서 인물 가운데 가장 야릇한 시선을 받는 성인일 테다. 예수와 특별한 인연 때문에 역사는 다양하고 극적으로 성인의 삶과 운명을 상상했다. 예수의 연인으로 착색하여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 발견된 고대 파피루스 조각에서는 ‘예수의 아내’라는 표현이 나와 떠들썩했다. 거기에 나온 ‘아내’를 막달라 마리아로 섣불리 단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몇 년 후 그 파피루스는 가짜로 판명 났다.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은 이런 상상력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교회는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는 예수와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의 선교를 돕던 사람이었다. ‘일곱 마귀’로 고생하던 그를 예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했던 것 같다. 이 ‘일곱 마귀’의 정체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서방 교회는 복음서 이야기를 엮어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몸을 파는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온다. 참회와 헌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중세교회는 이 여인에게서 신앙인의 모본을 찾고는, 그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멋대로 결론 내렸다. 12세기 때부터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이런 상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묻힌 현장에 있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이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져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다. 마리아는 상실과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이 여성이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다. 서방 교회도 나중에는 그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라고 불렀다. 서방 교회는 최근에야 동방 교회를 따라 축일을 7월 22일로 정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한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로, 다른 한 분은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불렸다. 예수를 신실하게 따랐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마음과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1. [성공회 신문 2017년 7월 22일 치 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