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

Saturday, February 2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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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삶 – 축일의 신학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교회 역사가 전례력(교회력)을 마련하고 구성한 목적은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구원의 역사를 축하하며,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살자는 뜻이다.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말에는 우리 삶과 시간을 그리스도의 시간과 맞춘다는 뜻이 있다.

전례력이 세상의 시간인 달력과는 살짝 비껴 나가듯이, 신앙인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르게 살아간다. 신앙인이 세상과 조금씩 불화하는 이유이다. 전례력을 바로 살아야 신앙의 삶도 바르게 된다. 새로운 시간의 길을 걷는 신앙인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은 전례력이 마련하고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눈과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낀 탓일까? ‘그리스도의 몸’이라 자처하는 교회의 현실이 여전히 어수선하고 부족하여 낭패감에 휩싸인 탓일까? 교회는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초대 교회에서 그 모본은 예수를 곁에서 따르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성모 마리아와 여성 신앙인들이었고 사도들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자기 생명을 하느님께 바친 순교자들이 뒤를 이었다. 지상의 예수를 곁에서 친밀하게 따랐던 사람처럼 그들 곁에서 이어서 따르고, 후대에 그들을 다시 이어서 따르는 ‘신앙의 릴레이’가 마련됐다. 역사의 현실 안에서 한 사람이 교회의 신앙을 지키던 삶과 번뇌, 그리고 성취를 친밀하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역사에서 발전한 ‘성인 공경’ 관습은 함께 머물고 보고 만지며 냄새를 느끼는 오감의 친밀감에 바탕을 둔 신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도 계승’ 교리는 지위의 계승이 아니라, 신앙의 모본을 정직하고 바르게 따르는 신앙의 행동이다.

전례력은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을 겹쳐서 절기와 축일을 만들며 발전했다. 그리스도의 삶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는 그리스도 절기(템포랄레 temporale)와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성인 축일(상토랄레 sanctorale)이다. 그리스도 절기는 부활-성삼일을 정점으로 사순절과 부활 50일(오순절)이 마련됐다. 이후 성탄일을 지정하자, 먼저 만들어진 절기를 본떠서 대림절과 공현절을 두었다. 성인 축일은 그들의 순교일이나 별세일을 부활의 새로운 탄생으로 여겨, 축일로 지정하여 지켰다.

전례력 지침은 그리스도 절기를 최우선으로 하여 축일을 지키는 순서를 제공한다. 그 탓에 종종 여러 성인 축일을 다른 날로 미루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교회에서 공적인 매일 전례나 기도가 뜸해지면서 평일에 든 축일을 간과하기도 한다. 기도서에 선명한 축일들이 무색한 상황이다.

교회 신앙의 모범이라고 마련한 성인 축일을 되살려야겠다. 축일을 그날에 지키는 교회라면 성인의 삶과 의미를 명백하게 설명해야 한다. 사정상 그렇지 못하다면, 평일 중 한 차례의 전례 안에서 그 주간의 성인들을 함께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 그마저 어렵다면 주보를 이용하여 소개하거나, ‘이달의 성인’을 선택하여 소개하는 교육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 기도서에 새롭게 들어간 성인들, 특히 근대의 성인들은 자료 구하기도 쉽고, 현대의 신앙인에게 더 가깝고 친밀한 신앙의 모본을 선사한다. 성인들은 우리보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24일 치 (↩)

[전례력 연재] 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

Saturday, January 13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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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의 절기와 축일에 관한 이 연재는 ‘공현절’의 의미를 다룬 글로 꼭 1년 전에 시작했다(<공현절: 세상의 빛 – 예수와 신앙인> 성공회신문 2017년 1월 21일 치). 그 글에는 이런 사족이 붙었다. “애석하게도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가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전례독서에는 공현절기의 뜻과 신학이 사순절 직전까지 드러난다. 나중에라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여 바로잡을 일이다.” 그러나 곧 배포될 2004년 기도서의 최종 수정판(2018)에서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수정판의 한계 때문이다.

전례력에는 확정된 답이 없다. 긴 역사 안에서 조금씩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더하고 빼기를 거듭하며 내용과 의미마저 변하고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할 가능성도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일치하게 하려는 노력에는 원칙이 있다.

교회의 시간을 정하는 제1원칙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성목요일부터 부활밤까지 이어진 ‘부활-성삼일’의 전례가 마련됐다. 초대 교회 맨 첫 시기에 발전한 ‘부활-성삼일’은 교회의 시간과 전례의 어머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활을 중심으로 앞에는 사순절이 준비 기간으로 붙고, 뒤에는 부활 50일 축하 시간이 확장됐다. 교회는 2세기를 넘기기 전에 이미 사순절-성주간-부활성삼일-부활50일-성령강림일의 시간을 확정했다.

여기서 나온 제2원칙은 포개기 작전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우리 삶에 포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교회의 시간에 포개어 시간 전체를 거룩하게 한다는 뜻이다. 4세기에 이르러 주님의 성탄이 주요 축일로 주목받자, 성탄 사건을 부활 사건과 동시에 강조했다. 이미 마련된 부활절기를 그대로 성탄절기에 포갰다. 사순절을 따라서 대림절을, 부활 축제를 성탄축제로, 성령강림일을 성탄인 공현절로 삼았다.

제3원칙은 시간과 의미의 확장이다. 성령강림주일로 부활50일 축제의 대단원을 축하한 뒤에 교회 전통은 성삼위일체주일을 제정했다. 구원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일치가 마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교회의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을 따라 사는 일이다. 성공회가 일찍이 전례력의 나머지 시간을 ‘성삼후’(성삼위일체 후 시기)로 표현한 까닭이다. 빼어난 통찰이다.

안타깝게도, <2004년 기도서>는 성공회의 빼어난 전통 두 가지를 지웠다. 절기로서 ‘공현절기’가 사라지고 ‘공현일’만 남았다. 공현절기의 일부였던 ‘주님의 세례 주일’이 아무 뜻 없는 ‘연중시기’의 시작이 됐다. 밋밋하기 짝이 없다. ‘성삼후’를 지켰던 <1965년 공도문>에서도 뒷걸음친 일이다. 실은, 1960년대 이후 천주교가 만든 ‘연중시기’ (또는 ‘보통시기’) 명칭을 그대로 따른 탓이다. 전례의 시간은 그저 ‘보통’이라 부를 수 없다. 모두 특별하고 뜻깊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2000년 기도서 <공동예배>는 공현절기를 살려냈다. 2월 2일의 ‘주님의 성전 봉헌 축일’까지 확장한다. 개정된 세계공동전례독서(RCL)은 교회의 전통을 되살려서 의미를 더 확장했다. 사순직전 주일을 ‘주의 변모 주일’로 삼아 공현절기의 절정을 삼게 했다. 다행히, 2018년 전례독서는 이를 따라 공현 마지막 주일(사순직전주일)에 주의 변모 사건을 읽도록 했다. 성탄의 작은 별이 주님 변모의 빛으로 우주에 널리 빛난다는 공현의 뜻을 확인한다. 이 사건은 이후 걷는 사순절 여정의 막바지에서 부활로 우리를 변하게 하실 예수 부활의 빛과 상통한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1월 13일 치 (↩)

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Sunday, September 3r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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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마태 16:21-28)

주일 복음의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니 혼란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베드로를 두고 ‘믿음의 반석이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사람’으로 칭찬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색하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시니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까요? 그러나 세상에 혼란을 더하는 변덕스러움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자기중심의 시선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옹졸함이 변덕을 일으키니, 주님의 칭찬과 꾸짖음이 번갈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앙과 행동은 교회의 반석이지만, 자기 중심성은 인생과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이를 식별하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이 닥칠 도전을 예견하십니다. 그 길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미워하고 박해하는 길입니다. 모함에 따른 고난에 굽히지 않는다면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주님과 신앙인을 모함하는 세력은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의 전통을 나누고 있다고 믿는 공동체의 일원들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내력과 경험을 들먹이며 기득권을 누리고 텃세를 부리는 이들입니다. 출신과 나이, 학력과 재산, 경험과 지위를 자기 안위의 기준으로 삼은 사람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고 맙니다.

이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탄을 객관적 형태를 가진 악귀 정도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러면 베드로를 ‘사탄’이라 꾸짖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권력 질서가 유혹하는 편안함에 머물며 자신의 행복감을 식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런 사람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불렀습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자기 만족감에 매달려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태도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하는 사탄입니다(23절).

신앙인은 믿음의 반석과 사탄의 걸림돌을 식별합니다. 같은 돌이라도 용도가 전혀 다릅니다. 같은 돌이라도 언제든 건물을 튼실히 떠받치는 주춧돌이 될 수 있고, 애먼 사람을 가로막고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주춧돌이었어도 공동체를 신앙으로 받들지 않고 삐져나와 기득권을 내세우면 금세 다른 사람의 발을 걸고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남에게 버림받고 혼자 굴러다니던 돌이더라도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 걸으면 언제든 주춧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역전의 상황을 뼈아프게 깨닫고 스스로 살피는 이가 신앙인입니다.

십자가는 나약한 인간의 변덕을 깊이 돌아보는 잣대입니다. 자신의 성과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새롭고 낯선 변화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베드로처럼 자신을 내세워 예수님을 꾸짖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이때 십자가는 자기를 내려놓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하라는 촉구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길 위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