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나요?

Sunday, July 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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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나요? (마태 11:16-19, 25-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초대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신앙인은 초대 안에서 안식을 누리려 주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고, 짐이 가벼울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으로 오늘 성서 독서 전체에 흐르는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보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삶의 고통을 덜고 안식을 누리려면 신앙의 새로운 선택과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첫째, 즈가리야 예언자는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를 비교하며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선포합니다(9:9-12). 세상도 신앙도 정의와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힘센 사람들에게만 해당합니다. 평화는 군사적인 힘의 대결과 균형으로 위태롭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개선장군의 군마가 아니라 어린 새끼 나귀 등 위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를 ‘꺽어버리고’서야 하느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피’를 나누는 친밀함 속에 있으니,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억압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도 바울로 성인은 스스로 자신이 ‘비참한 인간’(로마 7:24)이라고 고백하며, 실은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서로 잘 나고 부자이고 높은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활과 일은 어떤 처지에든 ‘악이 도사리고’ 있어(21절) 괴로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사람이 다 이런 처지일진댄 자신이 이룬 성취와 지위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을 휘두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내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밖에서 손을 내미는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자기중심의 시선과 삶을 넘어서서 바깥을 바라볼 때,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의 삶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며, 자기 기분에 따라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권력가들을 나무라십니다. 바리사이파는 편하게 앉아 ‘율법의 피리’를 불면서, 남들에게 춤을 춰라, 곡을 하라며 지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식한다고 비판했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먹보와 술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무슨 연유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는지 되새겨 보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멍에와 짐은 경쟁과 대결로 만든 정의와 평화입니다. 자신의 모자란 선을 내세우려는 교만이며, 자기 멋대로 힘을 휘두르는 지배욕입니다. 이 어지럽고 억지스러운 일이 우리 삶을 괴롭힙니다. 이때,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멍에와 짐을 선사하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찬 세상의 멍에와 짐을 덜어내고 치워서, 밖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우리 안의 중심 자리에 모시려는 노력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른 신앙인과 더불어 ‘겸손하고 온유하게 배우며’ 대화하는 수고입니다. 이 새로운 노력과 수고의 짐과 멍에를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짓눌린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Sunday, July 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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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마태 10:40-42)

우리 삶에는 온갖 배척과 환대가 뒤엉켜 있습니다. 조직을 지키려면 바깥에서 온 낯선 이들보다는 안쪽에 있는 인맥에 기대는 편이 더 지혜롭다고들 합니다. 반면, 고인 물이 쉽게 썩는 일을 염려하여, 새로운 물갈이 말고는 공동체의 쇄신과 성장이 어렵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을 얻습니다. 일상에서는 서로 가까운 사람들도 어떤 이익 분기점이나 감정의 경계 막바지에서는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사람이 만든 배척과 환대의 기준은 정갈하지 않고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주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감추고 덮으려는 거짓 세상을 향하여 진실을 외치고, 힘의 대결로 약속하는 거짓 평화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깃든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이자 기준입니다. 녹록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에 물든 종교가 약속하는 성공과 안위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모진 고생과 박해, 상처와 손해가 뒤따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평화의 행동 안에서 제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서로 안에 머물며 일치하는 신비가 펼쳐집니다(40절). 이 신비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확장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이 신비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식별하여 경계합니다(로마 6:12-23). 그것은 ‘신앙 기득권’과 ‘제멋대로 신앙’입니다. 율법은 애초에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조절하고 제어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규칙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종교권력자가 자신은 쏙 빼고 다른 사람들만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때 율법은 선물이 아니라 지배와 배척의 도구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규칙과 제어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자칫 공동체를 또 다른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사도 성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배와 예속, 자유와 정의에 관한 생각을 사뭇 다르게 풀어갑니다. 그 분명한 대조와 역설적인 표현은 새로운 시선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율법이든 은총이든 지배 아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지배받고 사로잡히겠느냐는 선택입니다. ‘죄’는 남을 배척하며 힘을 휘두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여 섬기는 일입니다. ‘죄’는 제멋대로 개인적인 자기감정과 주장에 골몰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하느님의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성찰하여 대화와 배움의 고된 행동에 예속하도록 이끕니다. 제멋대로 세운 배척의 기준과 자유의 환상은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밖이든 안이든 새롭게 다가오는 낯선 도전의 은총을 환대하고 견디는 일은 교회와 세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려는 율법과, 고된 도전으로 낯설게 배우려는 은총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나요? 자리를 지키려고 웅크린 배척의 감정과, 초대하며 부딪쳐 나누려는 환대의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나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은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누구인가요?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Sunday, November 13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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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주교는 신앙의 교사, 공동체의 사목자, 복음의 진리에 삶을 바치는 순교자이다(본지 2016년 10월 30일 치). 주교의 사명은 이 본질적인 직무를 품고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과 동행하는 일이다. 주교의 권위는 자신을 교회에 묶어서 이 사명에 충실할 때만 나온다. 이런 권위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새로운 주교의 식별과 선출 과정은 이러한 선교 지향과 내실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흔히, 기도로 준비하여 주교를 뽑자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기도는 주문이나 주술이 아니다. 기도는 신앙인이 맡겨진 일을 면밀하고 책임 있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선출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드리는 간구이다. 주교 선출에서 선교 비전과 내실을 모두 함께 성실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기도는 반쪽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세계성공회 여러 관구에는 주교 후보자의 자질과 내실을 충분히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이끄신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먼저 교구 내에 주교선출위원회를 설치한다. 현재 교회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다음, 교구의 미래 선교 방향을 정리한다. 새로운 주교는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뽑는다. 이 선교 방향을 다시 관구 주교선출위원회가 치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적합한 주교 후보를 추천한 뒤에 지명한다.

미국성공회는 한국처럼 교구의회에서 선출한다. 주교선출위원회가 마련한 교구의 미래 선교지향을 완전히 공개하고 이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지원자를 가려낸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거친 후에,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청회 과정을 갖고, 마지막에 교구의회 양원의 투표로 뽑는다. 대체로 2년이 넘는 과정이다.

현행 대한성공회 주교 선출 방식에는 교회 현실에 필요한 선교 지향과 내면의 힘을 확인하는 절차가 몹시 빈약하다. 이를 보완하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구의 선교지향과 후보자 내실 검증을 현행 주교 선출 투표 과정의 적정한 순간에 적용해야 한다. 그 식별의 잣대는 성공회의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시대정신에 대한 뚜렷한 희망 안에서, 현실 세계에 능동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대응하는 선교 전략이다.

시대정신은 지도자 선출에 매우 중요하다. 당면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시대와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응하면서, 교회로 사람을 불러모을 때 우리 교회는 살아남아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현재 성공회의 미래는 기존 신자의 안정적인 50대 이하의 성공회 신자와 아직 성공회에 들어오지 않은 ‘잠재적 신자’(타교파, 타종교, 무종교)에게 있다. 이들을 향한 복음의 선포와 신앙의 변증이 필요하다. 이 시대정신이 식별의 기준이다.

주교 개인이 지닌 영성의 일관성도 중요한 식별 잣대이다. 바른 영성은 인격과 신학이 깊이 있는 성찰로 만날 때 나온다. 주교는 지위와 권위를 가진 직분이기에 권력의 유혹에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에 관한 자기 성찰이 투철하고, 주교직의 본래 사명을 늘 되새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교는 사적인 관계나 온정주의에 휘둘리지 않는다. 정직한 근거와 합리적인 대화로 관행과 관습에 과감하게 손을 대는 사람이다. 이런 합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면, 결국에 성직자와 신자의 신앙도 흩어지고, 교회도 위태로워진다. 교회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기대했던 현실은 간데없이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지도자와 지도자에 대한 신앙인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증하는 현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복음으로 세상을 세우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교회 먼저 복음과 역사에 바로 서는 일이 절박하다. 이 새로운 시작을 복음의 신앙, 시대정신의 선교에 헌신하는 새로운 주교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6년 11월 13일 치 – 서울교구 주교 선거를 앞두고 [성공회 신문]의 요청으로 짧은 글을 썼다. 지난 호 “주교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주교의 근본적인 직무를 되새기고, 이번 호에서는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주교 선출을 위한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