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Wednesday,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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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

Friday, July 25th, 2014

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1

“영국 성공회, 여성 주교 성품 가능!” 최근 우리나라 언론도 ‘영국’ 성공회에서 여성 주교 성품이 법제화되었다는 소식을 앞다투어 전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영국 성공회 480년 만에 여성 주교 허용”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더 들춰보면 정확하지 않고 여러 편견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째, 성공회는 ‘480년 전’에 시작된 교회가 아닙니다. 원래 하나였던 그리스도교회는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이후 하나로 유지되던 서방교회는 다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다른 교단이 이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보든, 성공회는 기원을 초대 교회와 그 선교 역사의 경험에 둡니다. 성공회는 말 그대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둘째, ‘허용’이라는 말은 편견에 사로잡힌 표현입니다. 여성 성직은 누가 누구에게 허용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여성은 허용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듯이, 여성 성직은 허용받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억지로 금했던 역사가 모자라거나 잘못됐고, 이 잘못을 깨달은 여성과 남성 신자, 성직자들이 오래도록 잘못된 벽을 허물어 더 풍요로운 이해에 다다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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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성공회 주교회의 람베스 회의에 참석한 여성 주교들)

이번 ‘영국’ 성공회의 여성 주교 성품 법제화는 ‘영국’ 성공회의 많은 신자, 특히 여성들이 오래도록 바라며 분투했던 일이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더욱이 사제직뿐만 아니라 주교직에도 막힌 벽을 헐어서 여성과 남성, 인간 전체를 향한 하느님 은총과 소명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세계 성공회 역사 안에서 여성 성직을 이끈 교회는 아시아의 홍콩 성공회였습니다. 1944년 홍콩 성공회는 리 팀 오이 부제를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억지로 막은 담이 허물어진 뒤, 1970년대에 다시 홍콩, 미국, 캐나다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이 잇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2001년 민병옥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아 여성 성직의 길을 열었습니다.

1988년에는 미국 성공회에서 ‘흑인 여성 사제’ 바바라 해리스가 세계 성공회 첫 여성 주교로 성품받았습니다. 세계 성공회 관구의 절반 이상은 사제직에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주교직에서는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스코틀랜드, 호주가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여성 주교는 20여 명에 이릅니다. 이제는 ‘첫’ ‘여성’ ‘흑인’ 등과 같은 수식어를 모든 성직에서 없애야 할 때입니다.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정교회와 천주교 등과 나누는 일치에 문제가 생긴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더욱이 주교직은 남성 제자들을 통한 사도적 계승의 한 표현이며, 교회의 일치 수단이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성공회도 교리와 전통을 나누는 일치를 추구합니다. 동시에, 다채로움을 포용하고 초대하는 실천으로 일치의 자리가 더 넓어지고, 예언자적 행동으로 교회의 전통이 풍요로워진다고 믿습니다. 이 너른 일치와 풍요로운 전통은 교회의 선교를 더욱 든든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교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성직은 든든한 선교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7월27일자 주보에 실은 글(↩)

성소 잡감 2 – 성직자주의의 그늘

Thursday, April 19th, 2012

의도했든 안 했든 교회의 문화가 성직자주의로 미끄러지면, 성소에 대한 이해도 어긋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바른 관계를 세우기도 어렵다. 그 결과 교회는 선교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내부 혼란으로 기력마저 쇠진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왜곡된 이해와 관계를 바로잡기가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평신도’라는 말은 적어도 어떤 계급적 질서를 염두에 둔 용어이다. 그저 ‘신자’라고 하면 될 일이지만,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 어느 주교님은 굳이 ‘평신도'(lay people)라는 말을 쓰지 않고, 늘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고 그리 쓰기도 한다. 어쨌든 왜곡은 왜곡대로 인정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잡감에서는 여기저기서 ‘신자’와 ‘평신도’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다.

성소와 교회의 실제 사목과 관련하여 한국 성공회에는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잡감이라 이름 붙였으니 순서나 논리적 연계 없이 떠오르는 일 세 가지를 예로 들어 적어 보려 한다. 첫째는 성직자의 증가에 따른 평신도 사목의 축소 현상이요, 둘째는 ‘자급 사제’로 오해되는 ‘명예 사제’ 서품 관행, 셋째는 성직자와 신자의 힘 겨루기이다.

1. 성직자의 증가에 따른 평신도 사목의 축소 현상

언젠가 시골 교회 사목 경험이 풍부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특히 신자들의 교회 참여와 전례에 대한 참여에 관련한 이야기였는데, 그분이 들려준 고민이 이채로웠다. 예전에는 성직자가 모자라서 시골의 모든 교회를 돌보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 있는 신부님이 주일에만 성찬례 집전을 하러 오후에 오시고, 주중이나 토요일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저녁기도(만도)를 바쳤다고 한다. 물론 이 예식에서는 평신도가 ‘사식자’이다. 이런 만도, 혹은 매일기도 전통이 적어도 평신도의 지도력으로 시골 교회에는 나름 뿌리를 내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직자 수가 늘어서 작은 교회에도 파송되어 오고, 모든 전례를 성직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신자들도 전례와 예절은 모두 성직자의 몫이라 당연시했다. 굳이 성직자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매일 기도(성무일도)도 모두 성직자 몫이 되었다. 그런데다 매일 기도 전통도 차츰 사라졌다. 매일 미사를 드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사는 사제 아니면 집전할 수 없다. 자연스레 신자는 매우 수동적인 출석자, 전례와 사목의 방관자가 되었다.

전례와 다른 예배에서 신자들이 전례와 사목을 이끌 자리를 잃은 대신에, 신자들은 그 본연의 일을 할 수 있다고들 기대하기도 했다. 전례는 성직자에게 맡기고 신앙생활과 다른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상은 현대 사회의 직업주의, 혹은 전문화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신자는 전문가가 아니니, 전문가인 성직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방관자가 되면 된다. 신자가 참여할 수 있는 사목직이 있었으나, 이제 ‘풀타임’ 성직자가 있으니, 그가 모든 것을 맡으면 된다.

이 과정에서 신자는 참여자에서 벗어나 구경꾼이 되기 쉽다. 구경꾼의 특징은 종종 꼬투리를 잡는 것. 자신이 할 때는 안 보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허점이 보이는 법이다. 이러면서 성직자에 대한 요구 사항과 불만은 늘어간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이는 주인의식의 상실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불만과 요구는 박탈당한 주인의식을 되찾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성직자도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굳이 성직자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모두 나서서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일은 점점 많아지고, 여유로운 기도 생활보다는 탈진 상태가 속출한다. 그리고 이마저도 성직자의 운명이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피로가 쌓인다. 그런데 이 피로 상태로 신자들과 새로운 사목을 여는 일이 쉽지 않다.

2. 성직의 혼란 – 자급 사제, 명예 사제

한국 성공회는 지난 십 여년 동안 세계 성공회 역사에 놀랄 만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다행히 그 기록이 한국 성공회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서운할 정도다. 매우 냉소적인 표현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몇몇 기이한 사건이 성직을 둘러싸고 일어난다는 점에서 염려가 크다. 소위 ‘자급 성직’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실제로는 그 개념이 혼란스러운 성직 서품 관행이다. 서술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명예 성직’이라는 말이 그나마 정확한 표현이겠다. ‘자급 사제’는 말 그대로, 사제이되, 교구나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신이 손수 생활비를 마련해서 생활하는 사제를 말한다. 아내 등을 쳐서 먹고 살면서 교구나 교회에서 전혀 사례비를 받지 않는 내 경우도 ‘자급 사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관행에는 나름 좋은 뜻도 있다. 즉 성직 성소를 식별한 신자 가운데서 그 신앙의 경륜과 지식, 그리고 교회를 향한 헌신을 깊이 인정하고, 한정된 영역에서 전문적 사목을 할 수 있도록 성직을 서품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특별 과정이 있다는 것인데, 일반적인 성직 서품 과정인 성소 식별 과정, 신학 훈련, 사목 실습 및 필요한 기간을 전혀 달리해서, 이 모든 것을 축소한 ‘단기 코스’다. 물론 사목 활동에 대한 제한도 두었다. 그러나 성직(부제, 사제)으로 서품되면 그냥 부제요, 사제이지, 그 앞에 다른 말을 붙일 수 없는 법이다. 성직은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일을 천연덕스럽게 계속하고 있다. 교회가 정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에 함부로 예외를 둬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랜 경험과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모순되는 사례를 법제화하면, 교회는 그 일관성과 권위를 조금씩 잃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사회 선교 단체에서 일하는 신심 깊은 이들을 종신 부제직에 서품하자고도 한다. ‘종신 부제직’은 또 다른 사안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성직이므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에는 성직 성소 식별보다는 그 사회 선교 단체 활동의 편의를 위한 목적이 앞서는 일이 많다. 이는 그저 안타까운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성직에 대한 신학이 우리 교회에 빈곤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은 이런 문제 제기를 사석이나, 잠시 마련된 공론의 장에서 여러 차례 던졌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성직자주의의 뚜렷한 부작용이다. 성직 성소 식별을 위한 일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좀 더 쉽게 성직자가 될 길을 열어 놓는다는 생각에 물어야 할 단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왜 굳이 성직자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가능한 대답에 문제의 요인도 있고 해결책도 있다. 성직자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성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고, 신자로서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실제로 성직자가 여러 일을 독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결 방법은 그 사목을 함께 나누는 길이요, 이른바 “세례받은 신자들의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의 교회를 만드는 길이다. 바란다고 더 많은 성직자를 만드는 일로는 교회의 위계화만 심해진다. 또 그에 따른 권위주의가 깊어지는 만큼, 성직자의 실제 권위는 얕아진다. 성직 소명 식별이 분명하다면, 일반적인 과정을 따르면 된다. 성직의 길에 예외를 만들면 중세 교회 꼴이 난다. 그 탓에 현대의 많은 건전한 교단은 이 길에 예외를 거의 두지 않는다.

3. 성직자와 평신도의 힘겨루기

다시 말하거니와, 성직자주의는 성직자가 갖는 권위를 하나의 권력으로 휘두르는 현상을 말한다. 성직자에게는 교회가 부여한 권위와 권한이 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이 권위가 흔들리면서 이를 지키기 위한 자기 보호 본능이 발동한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가 정당한 근거 없이 도전받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도 어찌 보면,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하던 성직자주의 문화에 대한 신자들의 무의식적인 반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 반응과 반작용은 어느 쪽에서도 건강한 결과를 내지 못할뿐더러, 머지않아 교회를 깨뜨린다는 점이다. 이때 어느 한 쪽이 눈을 감고 참으면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태는 거짓 평화이다. 어느 한 쪽이 떠날 것을 서로 기대하는 불행한 평화이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의 실상이요, ‘수준’이다. ‘수준’을 운운하면 ‘욱’ 하고 덤벼들 분들이 우리 교회에 여럿인 것도 잘 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게도 심각한 ‘수준’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수준에 우리 자신 모두가 못 미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덮어두고 서로 불평할 일이 아니다. 수준을 높이려면 서로 불평하고 힘 겨루는 일을 그만두고, 그것을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의 수준에 대한 요구 사항은 사실 성직 서품 예식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보탤 말이 없다. 다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계속되는 기도와 공부에 기초한 신학하는 권위, 그리고 교회가 성직자에게 배타적으로 부여한 전례 거행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성공회 성직자가 바탕을 둬야 할 두 권위이다. 이 권위가 작동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자신이 따라야 할 권위를 바로 찾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성직 서품 이후에도 계속되는 성직 성소의 핵심이어야 한다.

신자가 갖는 권위는 우리 교회의 전통과 신학, 그리고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성직자의 권위를 따르며,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선교적 가치에 맞추어 실천하는 데 달렸다. 적어도 성공회 신자라면 성공회의 전통과 신학을 존중하며 배우고, 성직자가 교회에서 받은 공적인 권위를 인정할 때, 신자의 영성도 깊어지고 신자의 권위도 선다. 자기 개인의 신앙적 내력과 유산은 교회의 바른 권위와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 배울 때 더욱 풍요로워진다. 결국, 신자의 성소 식별은 이런 풍요로움을 위해 자신의 은사와 성소를 알아차리고 그 부분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어떤 신자들은 세속 정치에 대한 성직자들의 발언을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한다. 소위 ‘정-교 분리’라 부르는 정치와 종교의 불간섭 원칙을 내세운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세속 정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정교분리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정교분리 원칙은 대단히 미국적인 맥락에서 나온데다, 원래는 종교적인 교리를 세속 사회에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적어도 성공회 안에서는 ‘정교분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여 쓰지 않으면 성공회 전통에 대해 무지한 것을 금세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만다. 성직자가 성직 성소를 식별하며 교회에서 받은 권위에는 공동체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와 더불어, 복음의 가치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가 그 권위의 책임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신자들이 계속해서 성직자와 힘겨루기를 하면, 역설적이게도, 결국 교회가 정치판이 되고 만다. 이런 정치판이 사실 교회를 망친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의 염려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런 말이 흔히 떠돌았다. 4세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대주교가 한 말이라 전해진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사제들의 해골이 깔린 포장도로요, 주교들의 해골은 그 이정표라네!”

교부 자신이 이 경구를 발설했을 법하지는 않다. 아마 단테가 지은 <<신곡>>의 영향, 그리고 실제로 존 웨슬리가 크리소스톰 대주교가 한 말이라고 부정확하게 인용한 탓에 퍼진 말일 테다. 실제로 요한 크리소스톰 대주교는 당시 교회 현실을 두고 자주 개탄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 성당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 수많은 신자, 성직자 가운데 구원받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천 명 가운데 백 명도 안 될 겁니다.” 그 맥락은 당시 만연한 성직매매와 같은 교회 부패, 그리고 신자와 성직자 모두 연루된 교회 내 불화였다.

성직자나 신자가 자신의 성소 식별을 정확히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바른 힘의 균형이 깨진다. 이런 참에 더욱 서로 대화하고 서로 배우지 않으면 교회의 선교는 물론이요, 교부 성인이 염려한 대로 구원에서도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