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환대와 6.10 민주 항쟁

Tuesday, June 10th, 2014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1열왕 17:7~16 / 시편 4 / 마태 5:13~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은 6월 10일입니다. 27년 전 오늘 6월 10일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6.10 민주 항쟁” 혹은 “6.10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게 된 사건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한국 사회 전역에서 진행된 민주화 시위를 일컫습니다. 27년 전 6월 10일은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희생을 위에 세워진 역사였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통제와 압제가 계속되었고 그에 따른 희생이 잇따랐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숨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 생명의 죽음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 아닌 말로 덮으려 했습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박종철 씨가 고문으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 의로운 몇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드러났고,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망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군사 정권이 만든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에 향한 반대 시위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민주화의 외침을 쏟아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바로 전날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시위하던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6월 10일 명동 성당을 점거하고 독재 정치를 막을 내리는 싸움이 불길이 되어 올랐습니다. 이를 저지하고 억압하던 당시 정권은 결국 6월 29일 여당의 대표 노태우의 입으로 헌법 개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를 다 써서 얻은 민주화 운동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며칠 후인 7월 5일 이한열 씨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 뜰 한쪽, 사제관 앞 나무 그늘에는 “유월 민주 항쟁 진원지”를 기리는 기념비가 수줍게 앉아 있습니다. 자기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이 수줍음과 27년 전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사건은 큰 대조를 이룹니다.

610_cathedral.JPG

1987년 6월 10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당시 경찰의 통제로 “국민대회’ 장소인 천주교 명동 성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서울 주교좌 성당의 주임사제 고 박종기 신부님은 밖에서 서성이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국민운동 본부’ 집행부를 사제관으로 안내합니다. 그리하여 서울주교좌성당과 사제관은 한국 민주화에 획을 긋는 유월 민주 항쟁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두렵도록 암울한 시대에 정의와 자유의 숨통이 트인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대조에서 우리는 신앙의 사건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속에서 우연히 일어났던 작은 환대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작고 수줍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자기 배 안에 아기를 품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이 생명을 그 작은 몸에 받아들입니다. 수줍고 작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을 그 마음에 품어 환대의 공간을 열어주었을 때,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는 구원의 역사인 성육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엘리야 예언자는 악한 왕 아합을 호되게 비판하고, 그와 그의 왕국에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엘리야는 아합 왕의 탄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렙다라는 작은 마을에도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여인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그 가난한 여인은 아들 하나를 홀로 키우던 과부였고 겨우 한 끼가 될까 하는 식사를 아들과 나눈 뒤에 죽음을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여인은 그날 먹을 것 전부를 낯선 손님인 엘리야에게 내어 줍니다, 엘리야는 그 적은 음식을 다시 여인과 나누어 먹으며, 과부의 환대에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마리아의 환대와 사렙다 과부의 환대는 결코 손익계산을 따진 접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평판과 효율성과도 한참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그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수줍고 겸손한 환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환대는 더욱 넉넉했고 더 큰 역사가 움텄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이 역사에 관여하는 성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엘리야 예언자는 선포와 사명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처지 그대로 낯선 이들과 나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일과 낯선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을 통해서 그저 그만그만한 우리 교회는 뜻밖에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이 환대를 주저하는 이유와 핑계와 염려가 우리 교회에는 많습니다. 낯선 사람과 주장을 불온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염려와 자신의 편안함에 머문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낯선 이를 통해 주시는 뜻밖의 은총과 축복에서도 제외되고 맙니다. 작은 환대의 용기가 없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도 그저 공허해질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이 밟히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돌아봅니다. 27년 전 6월 10일 그 작은 환대의 자리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더 많은 희생을 감수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긴 고통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이 이 고통을 줄이는 일에 쓰임 받았으니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수줍은 환대의 신앙과 실천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을 향해 보여야 할 선교입니다.

이제 다시 물어야 합니다. 27년 전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에 자기 생각과 행동을 맡겨 변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수줍은 환대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나요? 우리는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지막으로 대접한 작은 밀떡을 이 성찬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나요?

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Monday, May 27th, 2013

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흐드러지고 바람도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잔인한 4월이 4.19 혁명 기념일에서 5월의 5.18,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도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역사를 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소위 ‘일베충’들과 수구 언론들은 인터넷과 방송으로 5.18 광주 민중 항쟁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수구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명인 조갑제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부끄러운 줄 모르는 허위와 거짓말이 범람하는 현상을 보며하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3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 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518.png

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3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계속했나요?

(침묵)

오늘은 그리스도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지만, 그 모양과 활동은 독립적인 세 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세 분도 결국은 한 하느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논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분이라는 기이한 교리입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교리로 접근하면 삼위일체의 신비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를 세우려 애썼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서로 자기 설명이 맞네 틀리네 하며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정죄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서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 교리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은 셋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그냥 무작정 믿어야 할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창조와 구원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드러내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사랑으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본떠 만들어야 할 새로운 관계의 모델입니다.

16세기 러시아 수도자였던 안드레이 류블레프는 그 유명한 삼위일체를 나그네가 나누는 밥상의 친교로 표현했습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 응시하며, 서로 초대하고, 서로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봅니다.

trinity_rublev.jpg

성 이냐시오는 삼위일체를 음악의 악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음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관계가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가 전체를 위해 서로 기여하고, 큰 몸, 한 몸을 만듭니다.

성부 하느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창조의 하느님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창조의 하느님’이란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과 환경과 우주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떤 차별도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존재하며,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자 하느님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겪으러 오셨고, 가난한 이들과 권력이 없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정치범 처형 방식인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구원의 하느님인 예수는 구원이 어떤 도통한 종교적 도력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애틋함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돌리는 행동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입니다. 정의는 바로 이 위에 서야 합니다.

성령 하느님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입니다. 성령 하느님은 모든 세상 위에 골고루 내려 생명을 키우는 단비 같은 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저마다 은총의 선물을 주어, 그 선물을 이용해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표현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오직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가슴에 품고 애틋하게 여기고 기도하고 사랑할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고 내 안에 초대하여 내 아픔으로 삼을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을 빌어볼까요? 삼위일체 하느님은 서로 지닌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며, 함께 시련을 이겨낼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밥을 나누고, 자신의 피를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와 역사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먹밥과 피를 나누었던 33년 전을 기억합니다. 서로 초대하고 감싸며 보살폈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여러분을 저 제대에서 나누는 밥과 피의 잔치로 초대합니다. 저 둘레에서 같이 먹고 나누며, 2천 년 전 예수가 나누던 밥상, 33년 전 닷새 동안 나누던 잔치를 기억해야 하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잔인한 4월, 잔인한 5월을 제대로 기억하며, 망각을 끝낼 수 있으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생명력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볼까요?

(침묵)

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