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한 성령의 공동체 – 경동교회 교환예배

Sunday, June 7th, 2015

창세 3:8~15 / 시편 130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2015년 6월 7일 (성삼후 첫주일, 연중 10주일)
한국 기독교 장로회 경동교회 (교환예배) (성찬례 및 강론 동영상)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모든 교우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 된 기쁨으로, 경동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처럼 말씀과 성사의 잔칫상을 함께 나누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저 자신은 사적으로 기독교 장로회에 깊고도 고마운 은혜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직 철없던 시절,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할 때, 저는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을 통해서 성서와 복음에 관해 새로운 시선을 발견했고, 새로운 교회의 행동과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겨우 눈뜬 앳된 시선으로 여전히 어리둥절할 때, 꿈과 희망에만 사로잡혀 좌충우돌할 때에도 바른 신앙인의 길과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나 언제나 너그러운 인내로 저를 단련시키고 안내해준 어른들과 공동체도 바로 기독교 장로회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장 교단의 목회자와 신자로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들고 애쓰는 여러 지인과 친구들이 제 눈앞에 환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신 세 분의 이름과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꼭 밝히고 싶습니다. 안병무 박사님과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의 기장 구민교회와 김거성 목사님입니다.

잠시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돕고 보살피며, 서로 도전하고 배우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걸어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희 서울 주교좌 성당과 여러분 경동교회는 서로 다른 전통과 경험을 들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잔칫상에서 먹고 마시며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생각하며 서로 먹이며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풍요로운 기쁨이 컸기에, 오히려 세상의 궁핍과 가난함, 갈등과 분열을 도드라졌고,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삶과 사회가 피폐해가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살펴보며, 우리의 다짐, 우리의 실천을 되짚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를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비밀을 앞세워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이 종교계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과 경험은 이러한 통념과 사뭇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신앙의 핵심주제가 선명하고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가 ‘죄’이며 ‘타락’이라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고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처음 창조 때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종교이든 신앙이든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사유화할 수 없는 공동의 나무를 훼손하거나 독점하는 잘못을 인간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은 추궁하려는 소환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여전히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아담은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멀리 숨습니다.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며 감탄하며 여태껏 사랑하던 ‘여자’ 하와를 아담은 이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 핑계와 비난의 사슬은 이제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로 번집니다. 이 일로 함께 사귀며 나누던 관계,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사랑하던 관계가 깨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난과 분열의 영이 만들어 내는 ‘죄’와 싸우는 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싸우는 방식은 죄와 타락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대안으로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를 보듬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일은 전혀 다른 ‘영’의 활동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을 무고하고 혐의를 덧씌우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사탄의 비유를 들어 논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악령인 사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은 이 험담과 파괴의 행동을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동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로 죽이고 죽임당한 한국전쟁은 어떤 영적인 힘이 만들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65년간 서로 갈라져서 적대하는 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깊이 성찰하고 물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라 자처하는 교회들이 보여준 상호 비난과 정죄, 분열과 갈등은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과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혐의를 씌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며, 자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꿈꾸고, 자신들과는 다른 모양으로 사랑과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세운 기준과 울타리가 아니면, 모두 적이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음새 없이 통짜로 만드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창조운 세계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악령을 단단히 제압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는 상처 입고 위로받으려 신앙을 찾은 사람을 속이며 생각과 태도를 완고하게 합니다.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와 권력은 자기 안위와 안녕만 생각하고 타인을 거들떠 보지 않는 욕심 가득한 세상, 부패한 세상을 만듭니다.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완고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동교회는 개신교의 깊은 말씀 전통에 터 잡아 성서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예언자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생명의 공간, 자유의 공간을 이 자리에 마련하였습니다. 힘없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을 이곳에, 여러분 마음에 깊이 초대하여 보호하고 함께 위로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은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신앙하는 깊고 풍요로운 방식을 지켜왔습니다. 사회의 변화와 유행에 휘청거리는 번영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고 느리게 살며,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 몸의 모든 감각으로 창조세계를 느끼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바쁜 삶에서 멈추고 하느님의 품을 닮은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와 쉬도록 함께 초대하고, 빵과 잔을 나누며 우리가 모두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경동교회와 서울 주교좌 성당은 함께 세상에서 휘젓고 다니는 분열의 영, 반(反)생명의 ‘영’에 저항하고 상처 입은 세계를 껴안아 먹이며 살았습니다. 이 경험만이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제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싸매고 고치는 일로 연대해야 합니다.

이 앞에 마련된 부활의 식사, 새로운 생명의 식탁에,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친교와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형제자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눔의 공동체가 서로 먹이고 키우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어머니’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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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Sunday, April 19th, 2015

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루가 24:36~48)1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루가 24:13~35). 두 제자의 길에 끼어들어 동행한 낯선 사람은 제자들이 알고 있던 성서의 내용을 다시 풀어 주었고, 제자들이 그를 환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눌 때 그들의 눈과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만남이 이끈 변화는 이제 두려움을 없애고, 새로운 눈과 몸으로 새로운 삶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두려움은 절대 초월자인 신을 향한 종교심의 출발일 수도 있지만, 벌과 심판의 교리로 사람을 옭아 죄어 하느님의 넉넉한 사랑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닫아 우리 안에 온갖 고정관념을 만들어서 새로운 대화와 배움을 차단하고 무시하게 합니다. 부활 신앙을 ‘뼈와 살’의 튼실한 구조와 내용으로 채우기보다는, ‘유령’처럼 두리뭉실한 태도로 얼버무리거나 윽박지르는 태도를 낳습니다. 도전에 열린 알찬 신앙만이 실체 없는 두려움의 유령을 몰아냅니다.

부활 신앙은 ‘새로운 몸’의 경험에 있습니다. 그 경험은 부활한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살피고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비추어봅니다. 신앙의 경험은 낯선 이를 초대하여 먹을 것을 건네며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초대와 나눔은 새로운 몸을 움직이는 근육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영혼이나 정신의 일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몸에 담긴 혼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혼’에 새겨진 역사의 기억과 아픔의 감각으로 예수님의 삶에 우리 자신의 몸과 생각을 맞추어 조율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기억과 감각의 조율로 다시 낯선 이들을 초대하여 나누며 배우는 관계에서 더 크고 넓어진 ‘몸’이 등장합니다. 부활한 몸의 정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부활한 몸인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다시 보고 듣고 경험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사회, 종교와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공합니다. 이 사명은 고난의 시간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이때를 피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의 새 삶과 교회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역사는 멀게는 1960년 4.19 혁명이라는 역사의 현장이며, 가깝게는 작년 4.16 세월호 참사라는 여전히 애끊는 슬픔의 기억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기억과 현장에서 ‘비롯하여’ 두려움 없이 다시 일어섭니다. 여기서 교회가 섭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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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19일치 – 수정(↩)

신앙 – 교만 태만 기만을 넘어 걷는 일

Friday, December 12th, 2014

이사 48:17~19 / 시편 1 / 마태 11:16~19
2014년 12월 1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상당히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예수님의 불편한 마음,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마음을 한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는 복음서를 세밀하게 읽지 않고 대충 읽어서 크게 오해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불평이나 한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역할을 맡아서 노는 장면입니다. 아이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 역할극이 잘 진행되지 않자 서로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들이 제멋대로 역할을 만들어 놓습니다. “야, 나는 피리를 불 테니까, 너는 춤춰, 알았지?” “야, 이제 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소리를 내면,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신을 벗어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흉내를 내는 거야, 알았지?”

자기들이 역할을 일방적으로 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켜 놓고는, 잘 안 된다고, 잘 따라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비난하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장면입니다. 잘 보면, 그 역할이 아주 불공정합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피리만 불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춤을 춰야 합니다. 자기는 곡소리만 내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자기 가슴도 쳐야 하고 땅도 쳐야 합니다. 매우 불공평한 놀이입니다. 게다가 아주 일방적이기에 더욱 정의롭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멋대로 해석하여 만들어 놓은 율법을 자기는 잘 지키는데, 다른 사람은 잘 지키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겉보기에는 뭔가를 잘 지키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기 편한 대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만끽하며 살았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좋은 음식이 주는 편안함을 먹지 않고 들꿀과 메뚜기의 불편함을 먹고 살았습니다. 좋은 집에 앉아서 권력을 누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재산과 권력을 누리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외침은 어느 자리에 앉아 특권과 권력을 누리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세례자 요한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먹고 노는 역할은 자기가 할 일이라 정하고, 밖에서 땀 흘려 육체노동을 할 사람을 따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촌뜨기 예언자가 나타나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꼬드겨 ‘설’(說)을 풀고 다니고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습니다. ‘설’(說)은 자신들이 풀어야 하고, 더러운 사람들은 정결법이나 어기지 말고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도 먹고 즐길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예수님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의 편의를 기준 삼아서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변덕을 못 따라준다고 남을 핀잔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 멋대로 금을 그어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일이라도 할라치면 못 하게 막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부른 사람에게 금식을 요구하던 세례자 요한도 못마땅하고, 죄인과 먹고 마시기를 즐겼던 예수님도 못 마땅합니다. 다 자기 기분대로 판단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제 우리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죄는 마음이 닫힌 상태를 말합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여 마음을 서로 닫아서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입니다.

신앙인이니까 이런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신앙인이 죄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죄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태만, 기만입니다.

신앙인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성서를 잘 안다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위세가 되어버리면 이미 교만의 죄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태만하기 쉽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초월을 깊이 체험하는 일입니다. 이 체험은 개인적이기도 해서 그 깊이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신앙이 너무 깊어서 다른 사람의 신앙, 다른 사람의 경험, 다른 사람의 공부와 훈련에서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은 신앙의 출발인데도, 그것을 완성이고 종착지인 양 착각합니다. 신앙을 꿰뚫었다고 착각합니다. 도통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발견과 연구와 지식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태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교만을 떨면서 하느님을 기만하고, 태만하게도 다른 사람의 체험과 지식과 발견에 눈을 열지 않고 귀를 열지 않습니다. 이 태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합니다. 이러한 교만과 태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며 기만하는 길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기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대림절기는 우리 신앙인이 먼저 자신의 교만과 태만과 기만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과 행동을 고쳐 먹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정심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시 되새겨 봅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도 다 아시기에 우리 자신마저도 기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뒤따릅니다.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케 해 주십시오.” 내 신앙 체험이 나를 정결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나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송하는 일에서 태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며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습니다. 성찬례는 우리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오도록 나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구별을 없애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는 훈련이요 체험입니다. 주먹을 꼭 쥐고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손을 펴서 받들 때라야 그분의 몸을 받아 만질 수 있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서야 성체와 보혈을 모실 수 없습니다. 입을 열어 그분을 먹고 마셔야 그분을 맛보고 그분이 우리 몸과 피가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대로, 율법의 원래 뜻은 ‘길’입니다. 길은 미지의 세계요 여행입니다. 길 가는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길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발걸음을 부지런히 걷는 사람입니다. 자기 멋대로 걷지 않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을 받아들여 환대하여 대화하고 배우며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위로와 약속을 전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와 약속입니다.

“나 야웨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이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리라. 너의 정의가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리라. 네 이름이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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