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

연재 글 “전례 여행” 차례 및 본문 링크

Thursday, February 2nd, 2012

지난 한 해 동안 <성공회 신문>에 실었던 전례 연재 글의 차례를 밝히고, 해당 글이 있는 온라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의 주소를 링크한다. 원래 기대했던 토론이 이곳이든 <포럼>에서든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 여행
(2011년 2월 ~ 2012년1월, 성공회 신문)

주낙현 신부(서울교구)는 현재 미국에서 전례학과 성공회 신학을 연구하며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을 비롯한 성공회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 http://www.skhcafe.org 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 http://viamedia.kr
트위터 @viamedia

1. 연재를 시작하며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2. 예배, 기도, 전례
3. 전례 – 구원과 선교의 잔치
4. 전례 전통과 도전 – 한국 성공회의 위치
5.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6. 전례와 역사 – 전통과 정통 사이에서
7.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8. 성공회 종교개혁 – 전례를 통한 개혁
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11.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12.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13. 성사와 성사성 – 하느님 은총의 통로
14.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전례와 몸의 감수성
15. “나를 기억하라” – 전례의 기억과 시간
16.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
17.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
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
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

편집자 주: 주낙현 신부의 이 연재글은 서울교구 분당교회의 후원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분당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 문구는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방문 설교

Sunday, October 9th, 2011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전한 설교를 우리말로 옮겨 싣는다. 약 1만 5천여 명이 운집한 경기장에서 열린 성찬례에서 윌리암스 대주교는 짐바브웨의 폭압적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짐바브웨 하라레 교구의 모든 시설을 사적으로 가로채서 파직된 주교 쿠농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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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짐바브웨는 독재자 무가베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인적 인플레로 고통 받고 있다. 게다가 이 독재자를 옹호해 온 하라레 성공회 교구 전직 주교였던 놀버트 쿠농가는 은퇴를 거부하고 하라레 교구의 모든 교회와 교회 부속 재산을 사유화했다. 하라레 교회 성공회 신자들과 새로운 주교가 이를 정상화하려 했지만, 쿠농가는 무가베 정권을 등에 업고 예배드리는 신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거나 교회를 폐쇄했다. 아직도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미사를 드려야 한다.

그동안 성공회 여러 지도자들은 무가베 정권의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례로 영국 성공회 요크 교구의 센타무 대주교는 방송에 나와 자신의 성직 칼라를 자르면서, 무가베가 퇴진할 때까지 성직 칼라를 하지 않겠다고도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설교이지만, 윌리암스 대주교의 설교는 세계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그의 외침은 지구 반대편의 우리 땅과 교회에도 해당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 사명을 잘 기억하며 늘 되새기고 있는가? 우리 삶에 그것을 비추어 성찰하고 있는가? 그저 립서비스와 수사에 우리의 부정직을 숨기고는 있지 않은가? 혹은 사회의 정의를 위한 주장을 맥락이나 내용 없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며,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는가? 돌아볼 일이 꽤 많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하라레, 2011년 10월 9일)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이 들려준 큰 혼인 잔치 이야기는 정말로 흥겨우면서도, 가장 도발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에게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는 어느 큰 임금이 자신이 마련한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려 한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잔치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와서 먹을 만큼 음식도 넉넉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손님들이 흥겹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모두 말이죠.

이제 반응이 하나 둘 돌아옵니다. 임금이 기대한 손님들은 임금의 관대한 초대를 거절할 핑계를 찾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관심에 너무나 몰두해서 이 멋지고 공적인 축하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모든 문을 완전히 열어서 잔치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초대합니다. 고픈 배를 움켜쥔 이들도 문지방을 넘어오고,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사람도 오도록 하고, 누구나 와서 그 잔치를 즐기라고 합니다. 임금이 바라는 것은 그가 준 선물을 사람들이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받아서 기뻐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이 세계에 부어 주셨습니다. 천연자원이라는 선물, 인간의 기술이라는 선물, 인간의 사랑과 이해라는 선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선물을 써서 우리가 모두 함께 기쁨을 누리길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성숙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기뻐하고 서로에게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정의입니다. 그것은 공정함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정의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어떤 만족감을 갖는 상황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걸어 잠그려는 사람들의 방해가 없는 상태입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13)고 주님께서는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과 너그러움을 나누라는 그분의 초대에 어떤 이들이 거절하는 상황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도 쉽게 이러한 사랑을 가로막고, 다가오는 사람마저 막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여러분 얼굴 앞에서 그 문들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입네, 성공회 신자입네 하는 사람들인 것 말이죠. 그들의 탐욕과 폭력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거절하는지, 그래서 여러분이 드리려는 예배를 막고, 이 나라의 교회와 학교와 병원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선교적 증언을 훼방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이 비유 이야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그분의 잔치에 초대하시려는 의지는 강력한 것이어서 상식도 없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러한 공격들을 종내에 이기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의심으로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셨듯이, 여러분을 짓누르려는 온갖 획책이 있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보이셨던 계시처럼, 주님께서는 이제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문이요, 자비의 문이요, 그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러분의 교회 문이 닫히는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은 신앙과 인내를 가지고 열린 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초석을 둔 영적 기반이 바로 교회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열어 놓으신 문을 두고 감사하는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과 박해자들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은 너희에게도 열려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우둔한 폭력을 그만두고 돌아오라.”

하느님의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이러한 선물을 망가뜨리고 훼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향한 약속과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잘못과 죄를 인정하기 그토록 어렵단 말입니까? 도전과 비판의 목소리를 침묵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 일들이 잦습니다. 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정말로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먹이기도 넘칠 만큼 주셨습니다. 이 땅의 광물 자원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이 땅은 사람들을 먹이는 데 쓰이지 않고, 쓸모없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광물 자원이 어떻게 저주로 바뀌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싸움에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에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몇 달 전, 콩고에 갔을 때 광물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생겨난 비극적인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울부짖는 우리 창조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요? 아벨의 피가 땅 밑에서 울부짖는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준 선물을 가지고 피를 뿌리는 전쟁을 일으키는가? 어찌하여 너희가 가진 것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그것을 사리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과거에 이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식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 탐욕을 부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선임 마이클 램지 대주교님처럼 분명하게 인정한 유럽인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들의 지배가 몇 대에 걸쳐 지속된 후, “우리 유럽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프리카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불안에 떠는 지배 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원주민들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리와 존엄의 희망과 정치적 자유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이 또 다른 형태의 무법적 권력으로 대치되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요.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연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하느님은 또한 우리에게 외부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연대의 선물과 자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일어서서 정치 지도자들과 지배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들어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들어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님의 백성이 정의와 평화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를 갈망하는 그 목소리를 들어라.”

이 성찬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모든 사람의 배를 불리는 잔치입니다. 여기에는 인종도, 부족도, 정당의 구분도 없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폭력과 보복이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은총을 바라는 죄인들로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이 세계에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평등하게 마련된 하느님의 식탁에 빈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해야 할 일은 정치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창조의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와 기쁨의 공동체적 관계, 이 우주적 잔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전망 속에서라야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폭력에 반대하라고 촉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년에 선거를 앞둔 이 나라에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가진 깊은 존엄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의 안녕을 내팽개치는 일, 사람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일을 완전히 멈출 수 있습니다.

이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려 합니다. 우리는 이 유혈의 공포 속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길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막고 닫을 수 없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든 이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 지독한 우리의 대적자들에게도 그분의 평화 속에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길을 돌이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서신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지요?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한 말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런 것들로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위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폭력과 유혈의 갈등, 그리고 과열된 정치적 갈등의 수사가 만드는 거짓 전율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화해의 희망으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이기도 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도움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교회는 희망의 원천이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근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 개인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의 시선과 봉사가 그들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는 그 충일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이 나라에서는 최근에 여러분과 같은 성공회 형제와 자매들이 그 실천적인 봉사에서 더더욱 적극적인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이 사회 전체에 되새겨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한 세대를 파괴하는 HIV/에이즈의 확산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여러분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악화시키는 문제들과 이 현실을 정직하게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도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들의 가치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문제, 편견, 그리고 미신을 분쇄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벗된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 교회와 이 위대하고도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사는 이웃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하루하루 여러분은 불의와 직면하고 있으며, 바울로 성인이 말씀하신 “타락한 형제들”의 오만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배부른 자들에게서 비웃음 소리를 들었고, 교만한 자들에게서 모멸을 받았습니다”(시편 123:3-4). 그러나 알아주십시오. 여러분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와 너그러움과 끈질김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불확실성과 계속되는 공격의 위협으로 고문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세계 성공회의 모든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시어 그분 아들의 자리에 사람들을 앉게 하시고,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뤄진 하늘과 땅의 혼인을 축하하도록 하려는 그분의 뜻은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기다렸더니,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오늘 우리는 이 성찬례 안에서 그 구원과 천상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치유를 위한 하느님의 초대는 폭력과 불의의 길을 멀리 떨쳐 버리고, 우리 모임 속에서 다시 한번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울부짖어야 할 말과 더불어,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원문: http://goo.gl/2btrR
번역: 주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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