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교만 태만 기만을 넘어 걷는 일

Friday, December 12th, 2014

이사 48:17~19 / 시편 1 / 마태 11:16~19
2014년 12월 1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상당히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예수님의 불편한 마음,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마음을 한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는 복음서를 세밀하게 읽지 않고 대충 읽어서 크게 오해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불평이나 한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역할을 맡아서 노는 장면입니다. 아이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 역할극이 잘 진행되지 않자 서로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들이 제멋대로 역할을 만들어 놓습니다. “야, 나는 피리를 불 테니까, 너는 춤춰, 알았지?” “야, 이제 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소리를 내면,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신을 벗어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흉내를 내는 거야, 알았지?”

자기들이 역할을 일방적으로 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켜 놓고는, 잘 안 된다고, 잘 따라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비난하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장면입니다. 잘 보면, 그 역할이 아주 불공정합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피리만 불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춤을 춰야 합니다. 자기는 곡소리만 내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자기 가슴도 쳐야 하고 땅도 쳐야 합니다. 매우 불공평한 놀이입니다. 게다가 아주 일방적이기에 더욱 정의롭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멋대로 해석하여 만들어 놓은 율법을 자기는 잘 지키는데, 다른 사람은 잘 지키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겉보기에는 뭔가를 잘 지키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기 편한 대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만끽하며 살았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좋은 음식이 주는 편안함을 먹지 않고 들꿀과 메뚜기의 불편함을 먹고 살았습니다. 좋은 집에 앉아서 권력을 누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재산과 권력을 누리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외침은 어느 자리에 앉아 특권과 권력을 누리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세례자 요한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먹고 노는 역할은 자기가 할 일이라 정하고, 밖에서 땀 흘려 육체노동을 할 사람을 따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촌뜨기 예언자가 나타나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꼬드겨 ‘설’(說)을 풀고 다니고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습니다. ‘설’(說)은 자신들이 풀어야 하고, 더러운 사람들은 정결법이나 어기지 말고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도 먹고 즐길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예수님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의 편의를 기준 삼아서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변덕을 못 따라준다고 남을 핀잔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 멋대로 금을 그어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일이라도 할라치면 못 하게 막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부른 사람에게 금식을 요구하던 세례자 요한도 못마땅하고, 죄인과 먹고 마시기를 즐겼던 예수님도 못 마땅합니다. 다 자기 기분대로 판단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제 우리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죄는 마음이 닫힌 상태를 말합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여 마음을 서로 닫아서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입니다.

신앙인이니까 이런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신앙인이 죄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죄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태만, 기만입니다.

신앙인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성서를 잘 안다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위세가 되어버리면 이미 교만의 죄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태만하기 쉽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초월을 깊이 체험하는 일입니다. 이 체험은 개인적이기도 해서 그 깊이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신앙이 너무 깊어서 다른 사람의 신앙, 다른 사람의 경험, 다른 사람의 공부와 훈련에서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은 신앙의 출발인데도, 그것을 완성이고 종착지인 양 착각합니다. 신앙을 꿰뚫었다고 착각합니다. 도통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발견과 연구와 지식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태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교만을 떨면서 하느님을 기만하고, 태만하게도 다른 사람의 체험과 지식과 발견에 눈을 열지 않고 귀를 열지 않습니다. 이 태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합니다. 이러한 교만과 태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며 기만하는 길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기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대림절기는 우리 신앙인이 먼저 자신의 교만과 태만과 기만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과 행동을 고쳐 먹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정심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시 되새겨 봅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도 다 아시기에 우리 자신마저도 기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뒤따릅니다.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케 해 주십시오.” 내 신앙 체험이 나를 정결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나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송하는 일에서 태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며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습니다. 성찬례는 우리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오도록 나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구별을 없애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는 훈련이요 체험입니다. 주먹을 꼭 쥐고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손을 펴서 받들 때라야 그분의 몸을 받아 만질 수 있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서야 성체와 보혈을 모실 수 없습니다. 입을 열어 그분을 먹고 마셔야 그분을 맛보고 그분이 우리 몸과 피가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대로, 율법의 원래 뜻은 ‘길’입니다. 길은 미지의 세계요 여행입니다. 길 가는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길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발걸음을 부지런히 걷는 사람입니다. 자기 멋대로 걷지 않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을 받아들여 환대하여 대화하고 배우며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위로와 약속을 전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와 약속입니다.

“나 야웨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이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리라. 너의 정의가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리라. 네 이름이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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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Saturday,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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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

전례 노트 – 순례자의 미사

Saturday, October 18th, 2014

오늘 오후, 지난 9월 29일에 진도 팽목항에서 시작한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도보 순례단이 광화문에 도착했다. 광화문에서 보고회를 마치고, 도보순례단과 함께 참여한 선한 이들이 서울주교좌성당에 모여서 순례 감사 성찬례를 드렸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성찬례를 주관하기로 했다.

순례단을 받아들이는 사안을 둘러싼 여러 미안함과 면목없음에서 나온 주저함을 뒤로하고, 소탈하게 성찬례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순례의 주제가 제대로 드러나는 성찬례를 드리려 했다. 주교좌성당의 여러 신부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 피하고 싶었던 강론까지 맡았던 차에, 당일 새벽 3시 반까지 뜬 눈으로 버티면서도 글자 한자를 백지에 적지 못했었다.

이번 성찬례 기획의 초점 몇 가지를 밝힌다.

1. 환영예식: 창세기 18장,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입당 직전, 순례자 환영 예식으로 설정했다. 성당 정문 입구 성천(세례대) 주위에 순례자를 환대하며, 집전사제는 이렇게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이 말과 함께, 우리는 입당 행렬에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제대를 향하여 입당했다.

2. 강론: “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 4세기경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새로운 삶의 비전과 전례 행동을 보고 기록했던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모티프로 삼아, 순례의 신앙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와 연결하여 해석했다. (강론 전문 참조).

3. 신자들의 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의 성인 호칭 기도와 별세자를 위한 연도를 혼합하여,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한 명씩 정성껏 불렀다. 이는 우리 전통의 초혼(招魂)과도 닮아있다. 이 호명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로 함께해 주셨다.

4. 성체배령-영성체: 성찬례는 삶의 변화를 뜻한다. 지금까지 순례자들은 나그네로서 환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찬기도가 끝난 후, 이제 기존의 순례자들은, 성체를 모시기 위해 제대를 향하여 ‘순례’하는 이들을 환대하고 먹이고 보살피는 환대의 벗들로 변화된다. 이 변화와 아름다운 역할 나눔을 드러내기 위해 순례자들이 성체배령을 하도록 조정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순례자가 된다.

이 네 가지 초점의 기획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참여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모두 순례자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