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Saturday, April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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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이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이 신비하고 거룩한 불꽃 앞에 둘러선 이들이여,
이제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 은혜를 인하여 이 위대한 빛을 찬양하라”
(부활찬송 첫 부분).

부활밤 그리스도인들은 마당에 모여 새로운 불을 축복하여 어둠을 밝힌다. 새로운 불에서 빛을 밝혀 부활초에 옮겨 놓고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며 길을 따른다. 이 순례자들의 손에도 작은 촛불이 들려있다. 빛의 순례자들이 모여서 듣는 부활찬송(Exsultet)에는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죽음과 부활 속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이 펼쳐진다. 8세기부터 ‘부활찬송’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활과 구원의 신학을 보듬어 들려주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이 세상을 ‘보시기에 참 좋은 것’으로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시기, 질투와 모함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파고들면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게 마련이다. 서로 멀어지고 깨진 관계를 신앙인은 ‘타락’과 ‘죄’라 부른다. 창조의 때를 회복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시겠다고 작정하셨다. 우리에게 선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마련하고, 우리의 교만과 미움을 쫓아내셨다.

이 부활밤이 거룩하고 복된 까닭은 이 위대한 사건이 예수를 건너 우리 자신과 교회를 통해 더욱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예수의 삶을 따라 악행을 지워나가고, 서로 용서한다. 우는 이에게 기쁨을 주고, 분열의 세상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준다. 신앙인은 이렇게 빛의 순례자들이다. 부활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인 사람들이 세상의 빛으로 변화하는 축성의 시간이다.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부활-성삼일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고,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며, 부활을 경험한다. 이 거룩한 사흘 동안 일어난 우주의 결합과 화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한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마지막 삼일은 이 모든 화해와 구원의 필수요소를 제시한다.

성목요일은 세족례와 마지막 나눔의 만찬으로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금요일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절망이 서로 내어주는 희생으로만 희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한다. 성토요일은 어둠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새 생명을 건져 올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마침내 부활밤에 우리는 죽음이 우리 삶의 끝이 아니며, 새 빛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 우리의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체험한다.

새로운 생명이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산다.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은 이제 ‘주님의 날’(주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시간인 ‘제8요일’의 역사이다. 새로운 시간에 우리는 새로운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며 산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스도를 먹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이다. 아울러, 부활 오십일 째인 성령강림절은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교회’라는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 


“모든 창조물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여, 주님은 이제와 영원히 다스리시니, 우리도 세상에 이 빛을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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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길목 – 마른 뼈와 라자로

Sunday, April 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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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길목 – 마른 뼈와 라자로 (요한 11:1-45)

우리는 부활의 길목에 당도했습니다. 오늘 성서와 복음은 어둡고 무거운 우리 마음을 일으켜 더욱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 마지막 고난의 산마루 너머로 펼쳐지리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이름 없이 쓰러진 생명을 기억하고 일으켜 세웁니다. 어둠의 사슬에 묶이고 죽음의 세력에 짓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물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약속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마른 뼈’ 환시가 기이합니다. 왜 ‘들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마른 뼈들이 널려 있을까요? 고관대작들의 뼈는 거대한 무덤에 잘 묻혀 있지만, 전쟁에 끌려간 사람들과 이름 없는 양민들은 어느 편 가릴 것 없이 권력자들이 벌인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무덤도 없이 버려진 시신들은 바람에 쓸리고 짐승들에게 찢겨, 결국 뜨거운 태양 아래 마른 뼈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희생자들의 백골이 곳곳에 흩어져있습니다.

하느님은 마른 뼈들을 잊지 않습니다. 애틋한 마음이 생명을 잃은 뼈들을 어루만집니다. 이제 그분 말씀 한마디에 흩어진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 힘줄과 살을 잇고, 피부와 얼굴을 얻습니다. 뼛조각 하나 허투루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합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펼치신 창조 역사를 재현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들을 온전하게 회복합니다. 억울하게 잃었던 생명, 세월 따라 잊었던 생명을 모두 껴안아 창조 때 원래 모습으로 되돌립니다. 창조를 회복하는 삶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조의 회복인 부활을 더욱 또렷하게 합니다. 내세의 약속으로 오해하는 부활을 바로 잡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과 슬픈 눈물은 부활의 신앙과 실천을 바로 세웁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한 마음이 든 까닭은 인간의 죽음을 생명의 끝이라고 여기는 상식과 세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체의 생리 작동 중지를 죽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생존 너머의 차원, 자기 너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죽음입니다. ‘너머’와 초월에 향한 상상이 없는 삶, 초월하는 세계인 하느님에 관한 성찰이 없는 삶이 죽음입니다. 종교도 인간 개인의 안위을 보장하는 기복의 도구가 되면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육체의 늙음과 스러짐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마침내 우리 삶을 더 크신 하느님께 맡기는 위대한 행동에 나섭니다. 이 ‘위탁의 신앙’이 우리를 부활의 신비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며 신비의 끝까지 걷는 길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현재의 슬픔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눈물 속에서 다른 인간이 겪는 상실과 슬픔을 껴안습니다. 잃은 사람들을 우리 눈물의 슬픔 속에서 기억할 때, 이 상실과 절망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강력한 다짐이 힘을 얻습니다. 신앙인은 쓸모없다는 효용성의 가치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서둘러 처리하고 잊으려는 망각을 거부합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삶의 진실을 가두는 무덤 문을 부수라는 명령입니다. 묶인 몸을 풀어주고 한 사람의 얼굴을 찾아주라는 부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역사가 죽인 이들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가게 하는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창조 때 모습을 회복하고 되찾은 생명을 기뻐하며 나누는 축하의 잔치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에 머물지 않고, 창조한 생명을 기억하고 회복하여 기뻐하는 부활의 잔치입니다. 이미 떠나간 이들, 그러나 우리 기억과 삶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이들을 초대하여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몸과 피를 나눕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을 향한 순례를 계속합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신앙의 양식 – 우물가의 여인처럼

Sunday, March 1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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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양식 – 우물가의 여인처럼 (요한 4:5-42)

하느님은 생명의 물입니다. 어둠 깊은 물에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그 물은 죽음과 심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는 홍수의 물로 심판받습니다. 다시, 홍해에서 갈라진 물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의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물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차별과 분리의 벽을 넘는 만남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마련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만난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과 변화의 물을 선택합니다.

오늘 한낮에 벌어진 우물가의 만남은 지난주 어둠 속의 만남과 대조를 이룹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여인은 대낮에 자신의 신분과 처지가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권위 있는 선생입니다. 그러나 우물가에서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지치고 연약한 나그네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니고데모는 권력과 도덕의 명분을 갖춘 사람이지만, 이 여인은 과거의 삶이 복잡합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권력과 신분, 종교와 혈통입니다. 성차별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대비 점도 꼭 눈여겨봐야 합니다. 휘두르는 힘과 고통받는 연약함을 여러 맥락에서 조심스레 식별해야 합니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처음에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지의 상태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와 편견을 벗어나 배움과 깨달음으로 전진하느냐 마느냐는 신앙의 기준이 됩니다.

두 사람의 방향은 전혀 다르게 펼쳐집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지만, 여인은 깊은 대화와 배움 속에서 자기 생각을 바꿉니다. 자신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처지, 복잡하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낯선 사람과 나눌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세운 온갖 차별과 분열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 일로 여인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과거가 불분명하고 낯선 이방인 여인을 복음의 증언자로 초대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신앙인이 먹을 양식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새로운 음식의 조리법과 같습니다. 그 조리법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몸을 참된 기도와 예배의 그릇에 담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뒤섞여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로 끓을 때 새로운 음식이 마련됩니다. 교회는 이 음식을 올린 잔칫상에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행동이 우리 신앙인의 양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예수님과 생명의 물을 마시며 신앙의 양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이 우물가의 성찬례, 참되고 영적인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