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배움 위에 선 교회 – 요크의 알퀸

Saturday, October 27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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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위에 선 교회 – 요크의 알퀸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성공회신문 2018년 10월 27일 치 ))

<성공회 기도서 2004>의 성인 축일에는 근대의 새로운 성인을 여럿 추가했으나, 꼭 기억해야 할 고대의 성인은 소홀히 다뤘다. 축일 개정 원칙을 세울 때, <공도문 1965>의 축일을 최대한 유지하고, 종교개혁 이후 근대 성인을 더 넣자고 했기 때문이다. 역사 전체에 걸쳐 성인들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한 봉합책이었다는 인상이 짙다.

요크의 알퀸(Alcuin of York, 735-804년 )은 한국 기도서에서 한 번도 축일에 들지 못한 성인이다. 8세기 영국 출신의 부제이자 수도원장이었고, 시인, 교회학자, 전례학자였다. 성인은 8세기 서방 교회의 신앙을 학문과 지식에 근거한 지혜의 전통 위에 다시 세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공헌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닮았으나, 교만과 무지도 비슷한 관계이다. 교만하면 배우려 하지 않는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도 교만에 빠지면 배우기를 멈추거나 알량한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만다. 한편,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권위를 내세울 근거가 부족한 탓에 지위로만 교만을 부린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행동이다.

알퀸은 교회가 교만과 무지로 고통받던 시대에 살았다. 샤를마뉴 황제가 서 로마 제국 패망 이후 분열되었던 유럽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 통일하던 때였다. 교만의 대결이 만들었던 정치의 오랜 분열을 마감하려는 참이었다. 역사에 쌓아 올린 교부의 전통이 무지로 부서진 상태에서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때였다.

샤를마뉴 황제는 변방 영국의 학자로 알려진 알퀸을 불러, 무너진 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체계를 다시 세우게 했다. 성인은 학교를 세워 유럽 최초로 인문학 교육을 시작했다. 문법과 수사학, 대화법을 가르쳤다. 지금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문장에 물음표를 처음 만든 사람도 알퀸이었다. 그는 산수와 기하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은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자요, 문학가이기도 했다.

성인은 영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프랑스, 독일 지역을 돌며 학교를 세우고 지식과 학문의 방법을 계속해서 전파했다. 교육과 탐구가 진리를 이해하는 바른길이며, 진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성실한 연구가 있어야만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성찬례를 비유하여 노래한 시에도 담겨 있다.

내 아침의 세월, 혈기가 넘칠 때, 나는 영국 땅에 씨를 뿌렸지.
그리고 이제 내 저녁 시절, 내 피가 점점 차가워져도,
여전히 프랑스 땅에 씨를 뿌리고 있네.
하느님의 은총으로 두 곳에서 모두 씨가 자라나기를 희망하네.
그래서 달콤한 꿀 같은 성서의 맛을 전하며,
오랜 가르침에 깃든 잘 익은 포도주를 다른 이들이 마시게 하며,
나는 여전히 씨를 뿌리고 있네.

얄팍한 심리학적 경구나, 도통한 척하는 영성적 태도는 사람을 자주 현혹하며 교회를 위태롭게 한다. 성실한 배움과 불편한 지식을 멈추게 하고 교회를 무지의 나락으로 흩어지게 한다. 기도하면서 여전히 진리를 탐구하고 논쟁하고 대화하는 일로만 신앙과 교회는 단단해진다.

교회를 신앙의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세우는 일에 헌신했던 알퀸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먼지와 벌레와 재로 덮여있으나
내 이름은 알퀸, 늘 지혜를 사랑했나니
이 묘비를 읽은 이여, 내 삶과 영혼을 기억해 주시오.

[전례력 연재] 황소, 코끼리, 여우 – 아빌라의 성 데레사

Saturday, October 13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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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코끼리, 여우 – 아빌라의 성 데레사 축일 (10월 15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기도서 2004>는 교회력의 성인 축일을 선정할 때, 종교개혁 이전의 성인들을 대체로 인정하여 ‘성’(聖: Saint)를 붙이고, 이후의 성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그런데 1965년 <공도문>은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가 갈라진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한 세 분의 성인을 포함했다. 동양 선교의 상징인 ‘성 사베리오 프란시스’(1552년, 축일 12월 3일), 그리고 16세기 수도원 개혁과 영성의 쇄신을 이루어냈던 ‘아빌라의 성 테레사’(1582년, 축일 10월 15일)와 ‘십자가의 성 요한’(1591년, 축일 11월 24일)이다. <공도문 1965>는 왜 예외를 두어 ‘로마 가톨릭 성인들’을 축일로 기념했을까? 그들이 교회에 남긴 족적과 유산이 크고 깊다면, 교파의 구분을 두지 않겠다는 너른 의지였겠다.

스페인 아빌라 지역 출신인 성 데레사(1515년~1582년)는 ‘십자가의 성 요한’(1542년~1591년)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영성의 거인으로 불린다. 16세기 서양 정치와 종교의 격동기 속에서 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새롭게 비추었다. 성인은 생명력 없는 교리와 부패하는 교회 개혁에 앞장섰다. 스스로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수도자의 길에 들어서서, 갖은 반대를 뚫고 기도와 영성 생활의 쇄신으로 수도원 개혁을 이뤄냈다.

데레사 성인이 남긴 자서전과 영성 저술, 편지 조각들은 세월을 넘어 더 깊은 기도 생활을 원하는 이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읽혔다. 현대에 들어 유행처럼 밀려드는 영성 운동, 혹은 ‘영성주의’는 성인을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가장 주목할 영성의 교과서처럼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완전함’을 향해 내달았던 내면의 영적 여정은 혼란한 시대의 신앙에 확신의 길을 마련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레사 성인의 영성이 그 시대와 종교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씨름했던 결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스페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차별의 딱지가 그 가족을 내내 괴롭혔다. 열네 살에 어머니를 여읜 성인은 ‘성모 마리아’에게 어머니를 비춰 자신의 슬픔을 이겨냈다. 탁월한 수도자이긴 했지만, 사회와 종교 전체에서 여성에게 들씌우는 차별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중세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던 ‘악마’ 문제에 집착했다. 평생 병고에 시달렸던 그의 삶도 성인의 영성을 이해할 때 헤아려야 할 지점이다.

성인은 당시 교리 중심의 교회와 신학을 ‘신앙 경험이 부족한 상태’라고 비판했지만, ‘성서와 신학을 배우려 하지 않고 체험에만 머물려는 영성가들’에게도 경고했다. 견고한 신앙인은 지적인 연구와 영적인 훈련으로만 탄생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회는 종교개혁의 격동기 속에서 전통 진영과 개혁 진영이 서로 비난하고,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 힘을 겨루면서 정작 그리스도는 놓치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현대 영성가들이 성인을 ‘내면의 영성가’로 축소하는 일은 큰 염려를 불러 일으킨다.

데레사 성인의 전문가인 로완 윌리엄스(전직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인의 영성이 ‘복음’과 ‘성찬례’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분석한다. 복음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야기 속에서 성인은 ‘사회 중심부에 멀어진 이들’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모험과 도전을 새롭게 읽어낸다. 성찬례는 ‘주변부 사람들’과 만나려고 ‘성육신하신 하느님’ 예수를 오늘 우리가 만나는 길이다. 성찬례는 정신적인 회상이나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몸과 영에 깃들어 만나는 실제 경험’으로 받아들일 때만,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복음과 성찬례 없이는 교회는 물론, 영성도 설 수 없다는 말이다.

그 탓일 테다. 1970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이다. 교회와 신앙의 개혁에 단호했던 성인을 일컬어 현대의 어느 작가는 ‘황소처럼 완강하고, 코끼리 피부처럼 두껍고, 여우처럼 지혜로운 성인’이라고 불렀다.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쇄신을 향한 그 용기와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성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흔들리지 마라.
어느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리니,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인내하라.
부족함 없이 충분하신 하느님이 늘 곁에 계시리니.’

  1. 성공회신문 2018년 10월 13일 치 []

[전례력 연재] 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Saturday, September 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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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축일 – 9월 13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박해 중에도 교세가 늘긴 했지만 순교를 각오하던 처지에서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는 종교로 변한 것이다. 그 파장은 컸다. 지루했던 신학 논쟁을 정치 권력이 나서서 정리했다. 필요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점차 세속 정치를 닮아갔다. 로마 정치의 위계질서와 권력 문화가 교회에도 들어왔다. 주교는 신앙의 교사, 사목자, 순교자라는 소명을 벗고, 점차 사회와 종교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피의 순교 시대가 끝난 349년에 태어났다. 홀로 된 어머니의 깊은 신앙 아래서 자란 그는 지식과 교양의 중심지 안티오키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지식인의 유행은 수도원에 한동안 들어가 호젓한 생활을 즐기며 겸양과 교양을 젠체하는 것이었다. 요한도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 생활과 공부를 자처하여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고 오히려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요한은 성 바실(330-373년)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사제 서품받기를 주저하는 이유를 나누었다. 사제직에 관한 그의 고민과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칭찬을 즐기지 않으며 자신의 성취[사제직]를 바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칭찬을 즐긴다면 그는 받기 원할 것이고, 그가 받기 원한다면, 나중에는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요한은 이런 고민을 안고서 뒤늦게 사제가 됐다. 이후 그는 뛰어난 설교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모스)이라고 불렀다. 그의 설교는 지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당시에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이 유행하여 성서의 가르침을 자기 멋대로 내면화하고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은 성서와 복음이 던지는 도전을 생활의 근거와 명석한 논리, 그리고 뛰어난 연설 기법에 담아냈다. 그의 설교에는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를 지켜내야 할 신앙인의 책임이 반복됐다. 마르고 작은 키, 큰 머리에 움푹 패인 눈을 한 그가 외칠 때 사람들은 예언자를 떠올렸다.

예언자 같은 주교가 쉽지 않지만, 그는 주교가 됐다. 398년, 군인들이 그를 납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주교로 성품한 것이다. 정치 관료들이 꾸민 이 일을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주교로서 전례 개혁에 공을 들였다. 그의 성찬기도를 근거로 한 ‘요한 크리스소톰의 전례’는 지금도 동방 전례의 표준으로 쓰인다.

그는 당시 주교들과는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멀리하고 정치인들과 벌이는 사교 모임에도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처세술이 부족하다고 동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고 그의 솔직한 설교와 의견으로 적도 많이 생겼다. 이미 만연한 성직매매, 신자와 성직자 모두 연루된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 수많은 신자, 성직자 가운데 구원받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천 명 가운데 백 명도 안 될 겁니다.” 그는 황실의 향락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떠나 407년 9월 14일 흑해의 동부 해안 코마나에서 이생의 죽음을 맞았다.

438년 1월 28일,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서방교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9월 14일에 축일을 지키다가, 7세기에 십자가 축일이 지정되자 13일로 옮겨 지킨다. 동방교회는 그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날을 축일로 지킨다. 그는 이 생의 유배를 신앙의 순례로 삼아, 죽은 후에도 여러 곳을 옮기며 교회 신앙의 가르침과 본을 보여 주었다. 성인을 ‘교부’라 칭하는 이유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9월 8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