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불꽃 논쟁 – 승천일과 성령강림일 사이

Saturday, May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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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논쟁 – 승천일과 성령강림일 사이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예수께서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가 24:50-51, 사도 1:9). 예수의 승천 사건은 루가복음의 결말과 사도행전의 시작을 연결한다. 그러니 예수의 승천 사건만 똑 떼어 풀이할라치면 그 깊은 뜻이 밋밋해진다. 부활 사십일 째 일어난 승천은 부활의 기쁨이 사십 일의 고난(사순절)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기쁨은 더 확장된다. 열흘을 더해 성령강림절(오순절)이 부활절의 완성이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위대한 오십일’로 읽으며 한 절기로 지켰다. 승천 축일을 따로 지키는 관습은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야 정착했다. 승천에 관한 성서 기록이 명백한데도 교회 전통에서는 애초에 부활절기를 워낙 강조했기 때문이다. 승천을 부활절 전체 맥락에서 풀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승천일은 부활 사십 일 셈법에 따라 늘 목요일이 된다. 그래서 ‘승천일’이라는 말보다는 ‘거룩한 목요일’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오래 쓰였다.

승천은 부활의 구원 사건에 담긴 새로운 역사의 운동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하시러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께서 다시 하늘에 오르셔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신다. 인간의 잘못으로 부서져 내려앉은 창조세계를 회복하여, 끌어올리고 확장하는 부활의 뜻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에 걸쳐 여전히 계속 일어난다. 그분은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로 내려오신다. 열흘 후 성령강림 사건이다. 하강과 상승의 예수 운동에 우리 삶을 맡기고 포개는 일이 승천 사건이 보여주는 부활 신앙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문화와 종교 생활의 핵심이었던 탓에 여러 주요 축일과 마찬가지로 승천일도 휴일이었다. 그러나 근세기에 선교지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고 사회의 세속화도 빨라져서 축일을 휴일로 지내기 쉽지 않게 됐다. 천주교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축일 당일을 고집하지 않고 다음에 오는 주일을 해당 축일로 지키는 지침을 제정했다. 성공회와 다른 전례적 교회는 획일적 지침을 정하지 않았으나, 이런 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인다.

승천일은 부활밤에 밝힌 부활초를 끄는 날로도 유명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으니 예수의 지상 생활을 청산하는 뜻에서 부활초를 끄고 보이지 않도록 치운다는 해석이다. 당일 축일 미사에서 복음을 읽은 직후에 부활초를 끄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단순하고 명백한 상징이어서 교육 효과가 상당히 컸다.

그러나 부활의 위대한 오십일 전통을 회복하면서, 이 관습에 변화가 생겼다. 부활초는 지상을 걷는 예수의 몸만이 아니라 부활 사건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승천을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통치자로 등극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떠나지 않고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에 부활초를 끄고, 부활초를 세례대 옆으로 옮긴다. 세례와 장례 때에는 부활초를 밝혀서 사용한다.

오랫동안 보고 익힌 관습의 힘은 여전히 세다. 부활초 끄는 시점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다. 나름대로 이유와 전통이 있으니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면서 배척할 일은 아니다. 공동체가 그 여러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되새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다만, 새롭지만 실은 더 오래된 신학을 되살려서 성령강림절에 끄면 좋겠다. 영성체 후나 파송 선언 직후에 부활초에서 저마다 작은 초를 밝혀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퇴당 때, 부활초를 들고 세례대로 순행하여 불을 끈 뒤에, 순행을 뒤따른 신자들이 개인 촛불을 세례대 근처에 놓고 떠난다. 자신의 세례로 시작한 부활의 생명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뜻이겠다.

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Sunday, April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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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루가 24:13-35)

그들은 힘없는 마음을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이야기해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벽은 단단하고 움찔하지 않으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일들이 무너지자 세상이 싫고 사람도 싫고 자기 처지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두 제자는 꿈에 부풀어 올랐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이제 낙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듯이 걸었습니다.

인생을 헤매는 미로에서 새로운 만남이 일어납니다. 길에 동행한 어느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며 과거의 희망과 현재의 절망을 나눕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같이 읽다가 서로 위로 삼아 ‘함께 묵자’고 초대합니다. 같이 빵을 떼고, 잔을 마시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인생에 즐비한 슬픔과 절망의 미로를 헤매는 시간은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하느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정체와 행동을 알았고, 그분이 처형당했다가 살아났다는 증언도 들었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의 체험과 경륜이 길다 해도,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일이 숱합니다. ‘내가 안다, 내가 경험해 봤다’고 너무 자신하면 신앙의 성장을 멉춥니다.

예수님의 동행이 흥미롭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서를 다시 해석하여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방향을 얻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은 눈을 가리는 책더미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성찰과 기도, 열린 대화와 배움으로 마련한 신학이 없는 교회는 신앙의 길을 잃습니다.

제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붙듭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교정받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성서를 다시 가르칠 때 깊이 귀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낯선 사람의 도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곁에 두어 함께 지내고자 합니다. 이 도전과 배움에서 신앙이 열립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환대와 사귐에서 새로운 만남과 깨달음이 열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눕니다. 이 익숙한 광경은 가나의 혼인 잔치, 오천 명을 먹이신 음식 기적과 함께 성 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나눔은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친히 아침상을 마련하신 식사와도 겹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례는 이처럼 서로 기쁨을 주고, 주린 배를 채우며, 사랑과 섬김을 나누며 축하하라는 당부입니다. 절망과 실패, 수고와 땀으로 젖어 지친 이들을 초대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부활의 성찬례 안에서 낯선 이와 대화하고 배울 때 가려진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환대하여 빵을 떼어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닫히고 막힌 가슴이 찢어지고 열립니다. 이 동행의 성찬례의 사귐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이 되살아 납니다.

[전례력 연재] 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Saturday, April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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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공회는 전례적 교회로서 교회력(전례력)을 성실하게 지킨다. 교회력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우리 일상의 시간에 고스란히 겹치려는 장치이다. 몸과 마음, 시간과 생활의 리듬이 되도록 하라는 부탁이다. 전례의 여러 상징도 새로운 삶을 돕는다.

부활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하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열렸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분기점,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 신앙 식별의 잣대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이 새로운 시간을 강조하려고 고대 신앙인들은 흥미로운 숫자 놀이를 했다. 창조의 시간인 ‘칠’(7)에 하나를 덧붙여 ‘팔’(8)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옛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새 창조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부활일은 단지 안식일 다음 날이 아니다. 새로운 제8요일이다.

새로운 시간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표현이 예배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예배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간의 제8요일인 ‘부활하신 주님의 날’(주일)에 성찬례를 드렸다. 그리스도인들을 이후 일어난 모진 박해 아래서도 목숨을 걸고 새 시간에 모였다. 부활일은 일 년 중 가장 큰 주일이며, 매 주일은 모두 작은 부활일이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여기에도 같은 숫자 놀이가 있다. 옛 창조 시간의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나서 새로 얻은 시간이 ‘오십일’이다 (7*7+1=50). 구약성서의 희년 사상과도 겹친다.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로서 통째로 하나인 희년의 시간이다. 부활절기는 부활밤에서 시작하여 부활일과 부활 후 팔일부, 그리고 사십 일째 되는 승천일을 거쳐 50일째 되는 성령강림일을 아우른다. 4세기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절기 동안에 무릎을 꿇지 않도록 정했을 정도로 부활의 기쁨을 강조했다.

부활절기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축하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부활은 오늘과 미래에도 살아계시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확인하고 되새기며 찬양하고 기뻐하는 영원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단 하루의 종교적 의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서 나날이 변화하고 성숙하며, 주님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세상에 전하는 ‘기쁨의 50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절기의 중심적인 상징 두 가지는 부활초와 세례대이다. 부활초는 부활밤 새로 축복한 불에서 붙여서 세상의 어둠을 이긴 하느님의 빛, 즉 부활의 생명이 만든 빛을 드러낸다. 부활밤 세례식에서 부활초로 물을 축복하고 그 물로 세례를 베푼다. 세례를 베푸는 곳은 성천(聖泉:거룩한 샘)이라 불리는 세례대이다.

교회 전통에서 세례대는 성당 동쪽의 제대와 마주 보는 서쪽의 입구 중앙에 부활초와 함께 있다. 신앙은 세례를 받고 제대로 나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순례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성당 입구에서 우리는 죄를 씻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례의 경험과 언약을 되새기며 그 물로 십자 성호를 긋고 성당에 들어온다. 전통적인 성당 배치에서는 제대와 성천이 마주하며 복음의 성사인 성찬례와 세례를 되새겨 준다. 종종 세례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서울주교좌성당의 세례대는 영국에서 가져와 1892년부터 사용하던 정교한 대리석 팔각형 성천이다. 숫자 ‘팔’(8)이 다시 적용됐다.

신앙인은 부활밤의 새 빛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간을 걷는다. 신앙인은 과거를 씻는 세례를 통과하여 새로운 ‘생각과 말과 행실로’ 새로운 시간을 사는 ‘제8요일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