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Sunday, March 12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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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요한 3:1-17)

낯익고 편한 곳을 떠날 때, 믿음의 순례가 시작됩니다.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그 순례에 동행하는 힘을 확신할 때, 복이 다가옵니다. 받은 복을 움켜쥐지 않고 남에게 끼치고 나눌 때, 우리 삶에 덕이 섭니다. 이 과정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순례를 떠나 낯선 이들을 환대하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이 순례가 생명을 선물로 발견하는 은총의 길이라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두려움을 넘어 낯선 자유와 구원의 성령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득권과 지위를 내려놓아 얻은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저 ‘동네의 높은 아버지’(아브람)에서 ‘세상 전체를 품은 아버지’(아브라함)가 되었습니다. 그는 괴롭고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고 나서야, 오히려 헐벗고 지친 나그네를 품고 환대하며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잃어서 더 큰 복을 누리는 순례의 길이 신앙이라고 그의 삶은 증언합니다. 그는 과거의 세상 권력과 재산을 자기 대에 누리지 못했을망정, 후손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에게서 인간과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합니다. 신앙은 축복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려는 소망을 하느님께 부탁하여 그 대가를 지급하려는 행실이 아닙니다. 진노의 심판을 피하려는 주술행위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우리 삶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착한 행실은 그 감사의 응답 안에서 기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생명을 함부로 짓이기거나 훼손하는 처사에 용기 있게 저항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과 은총을 지키려는 노력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로 섭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니고데모에게 자유를 선사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들으려다 오히려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려는 수단으로 경전을 읽으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였던 종교 권력자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밤에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잡은 손을 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선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움켜쥐려는 경쟁과 성취는 우리 사회를 더 깊은 낭패와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 삶의 기준을 이 땅에만 두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가치, ‘위에서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향할 때 우리는 새로운 자유로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우리처럼 감추고 싶은 ‘어둠’이 있었을까요? 세상에서 실패하여 좌절했거나,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에 묶여 스스로 움츠러들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우리를 자유의 바람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존재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바람과 숨결과 성령은 어떤 낭패와 절망의 벽, 장애와 차별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그 성령이 이미 우리 몸 전체에 깃들어 있으니, 이를 발견하고 어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입니다. 경쟁과 권력의 어둠, 단죄와 수치의 어둠을 넘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높이어서 우리 삶과 생명을 회복하시려는 예수님과 함께 신앙인은 오늘도 부지런히 걷습니다.

[전례력 연재] 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Saturday, March 11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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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장미 주일’로 부르는 주일이 교회력에 두 번 있다. 대림 3주일과 사순 4주일이다. ‘장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례 색깔도 장미색을 쓴다. 장미는 그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한다. 하필 왜 참회와 절제의 절기 중간에 이러한 화려한 기쁨이 있을까?

사순절기의 절제 생활이 지금처럼 느슨해진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 전통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금욕, 금육, 금식 등 절제 생활이 엄격했다. 어린이와 임산부, 노약자만 예외였다. 하도 엄격해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에는 작정하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 축제를 만들 정도였다. 지루한 절제 시간 가운데 잠시 휴식을 주려는 것이었을까? 곧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라는 배려였을까? 그도 아니면, 2주 후 다가올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라는 뜻이었을까? 실제로 옛 성서정과에서는 사순 4주일에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사람을 넉넉히 먹이신 기적의 복음을 읽었다. 배고픈 이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일이다. 이런 뜻을 다 모아서 잠시 숨 돌리는 시간을 마련했으리라.

교회력의 역사를 보면,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이 먼저 있었고, 이를 본떠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주제도 비슷했다. 그 참에 장미주일도 같이 생겼다. 원래 이름은 조금 다르다. 사순 4주일(레타레)은 그날의 미사 입당송 ‘즐거워하라(Laetare), 예루살렘아’의 라틴말에서 따왔다. 비슷하게, 대림 3주일(가우데테)도 입당송 ‘기뻐하라(Gaudete), 주님 안에서’에서 따왔다. 다만, 20세기 들어 개정한 성서정과와 전례에서는 이 입당송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주일들에는 성가 선곡에서 기쁨의 주제를 고려하면 좋겠다.

이 두 주일에 ‘장미’를 덧붙인 연유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지배자 신들은 장미를 엮어 화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배자들의 신화를 뒤집었다. 장미를 억압당하고 박해받은 순교자의 관으로 바꾸었다.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자도 가시 찔리는 고난이 있었으나, 그 신앙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뜻이었다.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의 상징은 백합과 장미였다. 장미의 가시는 예수를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리라’는 시므온의 예언과 들어맞았다. 중세에 변형되어 발전한 성모 묵주 기도(로사리오-장미)도 이런 연관이 있다. 11세기에는 로마의 주교(교종)가 장미를 축복하여 지역 교회에 선물했다. 자애로운 신앙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영국 지방에서는 사순 4주일에 ‘어머니 교회’인 주교좌성당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다. 나중에 이 관습이 실제 ‘어머니’를 기리고 감사하는 ‘어머니 주일’로 발전했다.

사순절은 혹독한 절제 가운데서 어둠 속 참회와 빛의 기쁨이 밀고 당기는 체험의 시간이다. 사순 여정 가운데 주일은 뺀다. 절제의 기간이더라도 주일은 늘 작은 부활절인 탓이다. 6세기부터는 사순절 주일 전례에서도 ‘알렐루야’를 생략했으나, 여전히 성찬기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영광송이다. 생략한 ‘알렐루야’는 성목요일에 다시 등장했다가 멈추고, 부활밤에 더욱 큰 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축소된 부활 직전 2주 동안의 ‘고난 주간’에는 성당의 모든 성화와 성상을 천으로 가리거나 얼굴을 돌려 놓았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재를 느끼고 목격하며, 우리 삶의 어둠을 비출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갈망하라는 뜻이다.

역사처럼 신앙도 이리저리 굽이치고 겹쳐 흐른다.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단칼에 정리할 수는 없다. 혹독한 신앙의 수련도 있지만, 그 안에는 신앙인의 연약함을 향한 너그러운 배려도 있다. 배고픔과 갈증, 인간 내면의 어둠 속에서 헐벗은 외로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훈련인가 하면, 기쁨을 향한 희망과 감각을 잊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전례는 이처럼 여러 뜻이 겹쳐져 서로 모순되듯이 존재하고 관계할 때 신앙의 신비를 드러낸다.

[전례력 연재] 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

Saturday, February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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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의 말이다.

신앙인의 삶도 기대와 예상처럼 평탄하지 않다. 신앙이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다. 누구도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신앙인은 이 ‘슬픔’의 세계에 발을 디뎌, 그 길에서 만난 다른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손잡고 함께 걸을 뿐이다. 그 끝에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있다. 신앙생활은 이 ‘밝은 슬픔’을 걷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순절은 ‘사십 일’과는 관계없이 시작됐다. 그 기원은 부활절을 기다리며 금식하는 관습이었다. 부활 잔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고 실제 몸이 목마르고 배고프게 했다. 몸이 그러하듯 마음도 그렇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되새길수록, 우리 삶에 사랑과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깊이 실감한다. 자기 욕망을 비우면,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들 자리가 그만큼 넓어진다.

사순절은 곧 부활밤의 세례 준비 기간으로 발전했다. 신앙은 배움과 훈련에서 나온다. 초능력자의 도움과 복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종교 ‘신심’일지언정, 신앙에는 못 미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 담긴 뜻을 배우고 익혀야 신앙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유아세례가 성인세례를 교체하면서 신앙교육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를 겪으면서, 4세기 즈음에 ‘사십 일’ 사순절이 정착했다. 예수의 광야 ‘사십’ 일 금식 기간을 모방하는가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도 의미를 따다 붙였다. 이때부터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다. 역사 안에서 사순절은 자기 절제와 비움, 신앙의 준비와 교육, 그리고 참회의 의미가 겹치고 두꺼워졌다.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동방교회에는 없는 서방교회만의 전통이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한 사순절 기간을 40일로 확실히 정하고, 부활일까지 주일은 제외하면서 ‘수요일’이 사순절 시작이 되었다. 1091년의 첫 기록이 선명하고, 12세기부터 서방교회 전체에 퍼졌다.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흙을 빚어 숨결을 넣어서 우리 생명이 나왔으니, 그 숨결이 없이는 우리 인간이 흙 먼지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되새겨주는 말이요, 다 같이 먼지인 처지에 서로 경쟁하여 지배할 심산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이를 깊이 새기고 뉘우치려고, 성공회 전통에서는 시편 51편을 읽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재를 이마에 바른 뒤 참회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이날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말이다.

우리가 걷는 삶이 ‘밝은 슬픔’인 것을 기억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참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자. 이마에 재를 받고 우리 운명의 본질을 되새기자. 성당에는 잘 보이는 곳에 재와 돌과 십자가를 설치하여 사순절 여정을 되새기자. 가정 어느 한쪽에는 모래와 돌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옆에 재를 담아 두도록 하자. 이제 사순절 순례의 기도처가 마련됐다!

  1.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25일치 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