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신학자 –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Friday, March 16th, 2012

남의 글을 내 블로그에 그대로 퍼오는 일이 거의 없으나(번역 제외), 기사 원문이 신문사 웹페이지에서 사라진 듯하여, 글쓴이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놓는다. 2008년 국민일보에 난 “21세기의 신학자들 36: 로완 윌리엄스 세계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기사 전문 게재에 관련하여 기사를 쓴 국민일보 신상목 기자에게 연락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기사의 배경과 사적인 인연을 밝히면 이렇다. 2008년 어느날 국민일보 신상목 기자가 전화를 했다. 성공회에서 글을 써줄 이를 찾지 못하던 참에, 당시 한국에 잠시 방문하던 내게 연락이 닿아 글을 요청했던 전화로 기억한다.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부탁인지라, 할 수 없이 긴 통화와 더불어 내 블로그의 여러 글을 알려 주었다. 그때 나눈 대화를 충실히 반영한 글이라 생각한다. 이 기사의 로완 윌리암스 주교 인용은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에서 나온 것이다.

21세기의 신학자들 36: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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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성공회의 대표인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57)는 대주교이기에 앞서 세계적인 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200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기 전까지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영국 남부 웨일스에서 가톨릭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성장하면서 성공회 신자가 되었고,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자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26세의 젊은 나이로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세계적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일찌감치 발휘했다. 박사논문은 20세기 러시아정교회 신학자인 블라디미르 로스키를 연구하면서 삼위일체 신학을 주제로 썼다.

그는 영국 학계를 통틀어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에서 동시에 정교수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사람으로 기록됐다. 학문적 안목이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영성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의 강의와 저서를 접한 사람들은 “빈 자리 없이 꽉꽉 채워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평한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영성입문(The wound of knowledge)’을 통해 기독교 영성사를 정리했을 정도로 조예가 깊고, 매일 30분씩 기도 시간을 따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옥스퍼드대학 교수 시절 헨리 나우웬처럼 삶 속에서 신학을 실현하고 싶다고 피력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또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신학자이자 저술가이다. 수많은 신학적 분야와 교회일치 문제 등에 깊이 관여해 왔고, 철학과 신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연구를 거듭해왔다. 특히 초대교회와 교부신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교회사 연구를 통해 교부신학과 이에 따른 신학적 논의를 전개해왔다. 또 정교회와의 인연으로 현대 러시아정교회 신학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개혁신학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기독교신학'(On Christian Theology – 사진)은 신학적 입장을 잘 정리한 대표서로 조직신학에 대한 다양한 이슈와 논쟁에 대한 답변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이후는 다양한 사회 윤리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신학자이자 사제이기도 한 그는 영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제직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의 통찰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성공회 주낙현 신부는 “사제직에 대한 윌리엄스 대주교의 시각에 자신의 사제직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윌리엄스 대주교는 ‘현대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사제직’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나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다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부인인 제인 윌리엄스 역시 신학자로서 인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런던의 킹스칼리지, 세인트폴신학센터 등에서 방문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신상목 기자

국민일보 2008년 6월 4일치


회고: 10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 지명 특집 기사

Friday, March 16th, 2012

로완 윌리암스 제104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올 2012년 12월까지 대주교직을 수행하고 사임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작년 초부터 이미 떠돌던 풍문이었다. 지난여름 회의차 영국에 방문했을 때, 그 사안을 잘 아는 지인도 확인해 주었는데, 그때 그의 말과도 일치하는 발표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성공회 성직자가 된 이후로 가장 흥분하며 그의 지명을 지켜봤고 환호했다. 뛰어난 교회사학자요, 영성신학 전문가요, 성공회 전통과 정교회 전통을 접목하여 성공회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전해준 전형적인 학자였다. 사임 후 다시 학교로 가서 가르치신다 하니, 지난 10년의 대주교직 활동을 생각할 때, 훨씬 나은 일이고, 성공회에도 훨씬 이바지할 일인 듯싶다.

지명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넘쳐, 당시 내가 관리하던(1997년 시작부터 2002년 말까지) 한국 성공회 웹페이지에 특집란을 만들고 여러 자료를 번역해서 올렸었다. 시간이 흘러 관리자가 바뀐 뒤 웹페이지 백업도 없었고, 나 자신도 그 자료를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본 archive.org 역시 대단하다. – 10년 전 한국 성공회 웹페이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때는 모두 텍스트 에디터로 html 문법 써가며 작업했는데, 감회가 새롭다.

우선 당시(2002년) 자료를 archive.org 백업 자료를 이용하여 연결한다(발뺌: 몇몇 이미지는 깨진다). 나중에 로완 대주교에 대한 사적인 ‘잡감’을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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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공장’의 정화 –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절 설교

Thursday, March 15th, 2012

세계 성공회의 맏 어른이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로마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전하신 설교를 번역하여 올린다. 로완 대주교께서는 베네딕트 전통의 갈마돌리 수도회 설립 1천 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받은 참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강론, 설교를 펼치셨다.

한편, 천주교의 한복판 로마에 성공회라니? 로마에는 성공회 두 개 교회와 교회 일치 대화 연구소인 성공회 로마 센터가 있다. 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유럽 교구 소속이고, 다른 한 교회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 유럽 교구 소속이다. 이 두 교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을 맞아 사순 3주일 미사를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미국 성공회 소속)에 모여 함께 드렸다.

대주교께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고금의 우상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개인의 안위와 위로를 위한 ‘종교 공장’이 되어버린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 풀어내셨다. 하느님과 인간이 아니라, 그 형색만 갖추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지니스로 전락한 종교의 행태, 특히 그 비지니스(business)에 바빠(busyness) 정작 헤아리고 살펴야 할 것은 돌아보지 못하고 대량 생산 공장이 되어가는 종교 비지니스에 대한 성서의 경고를 되새겨 주셨다. 원래 신앙이 가진 이 대안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이 여전히 절실하다. 그뜻을 널리 나누려고 동영상을 링크하고 설교 전문을 졸역하여 올린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설교

사순 3주일
로마,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 St. Paul’s ‘Within the Walls”
2012년 3월 11일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요한 2:13-2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시 한번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성공회의 형제자매들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도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전해주길 바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들의 연대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주교로 있던 남부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철강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큰 공장에 들어가면 귀를 먹게 하는 소음이 감쌌습니다. 실제로 공장 어느 부분에서는 꼭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써야 했습니다. 소음과 활력, 그것도 귀를 먹게 하는 강한 것들이죠.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랬다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철강 공장에 들어가는 것과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철강 공장에서 철을 만들 듯이, 성전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아주 강하고 바쁜 활동을 온종일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큰 명절이 되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희생제의에 바칠 동물들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적절하게 표현할 상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 세 본문의 주제는 실제로 우리가 종교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종교’와 참 하느님, 즉 참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시작부터 우리는 참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것도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하느님을 가장한 ‘우상’, 우리를 만족하게 할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기도를 채우곤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선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채웁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틈을 막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참 하느님께 깃든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 대신에,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천국의 화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지상에 끌어내려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공장’입니다.

똑같은 경고를 제2독서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과는 너무도 낯설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만족한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적을 찾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이 마술처럼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철학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참 하느님의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사랑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성서 독서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우상이냐, 진리냐? ‘종교 공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우리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여 늘 종교 공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은 아마도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느라 바쁘고, 좋으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가져온 그림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요,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을 치우라고 합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세계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들로도,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으로도 절망하게 하거나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을 묵묵히 보여 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느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사순절기 동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종교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도전에도, 그리스도인은 꽤나 잘 이 종교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십자가 자체는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삶의 쇄신에 대한 부르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종교인이 그저 장식처럼 걸고 다니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순절기는 어쩌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력의 성주간 동안 교회의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그 시기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년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치웠다가,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안녕에 대한 모든 것들을 뒤엎으십니다. 멋진 레저 활동이 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그리고는 종교 공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어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고, 누구도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신뢰가 우리를 움직여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전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교 공장을 나와 섬김으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섬김과 사랑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향한 활동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후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기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신을 우리 안에 짜맞추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살펴 봐야 합니다. 사순절기는 우상숭배를 넘어서 한 발짝 더 나가는 시간입니다. 우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죄수로 묶어놓고 옛 세상으로 끌어당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 공장에 연루된 이들을 내치시고, 당신의 벗들과 더불어 거대한 침묵과 거대한 공간에 우뚝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여길 곳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넉넉한 공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이곳이 모든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예배하러 모일 때, 성찬례라는 성사를 거행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그 거대한 공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쁘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과 성취해야 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서서, 가만히, 듣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밉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우리 생각대로 쥐어짜서 만들려는 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생명과 사랑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사 속에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리하셔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만드신 공간입니다. 크고도 경건한 철강 공장 같은 ‘성전 종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21세기 어느 곳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동안 ‘종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마음을 열어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봄날의 대청소를 시도해 봅시다. 조금이나마 정적과 열림을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때야 비로소 생명의 기적, 하느님의 생명이 그 열린 빈손에 다가올 것입니다. 신비와 경외,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