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Sunday, October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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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마태 22:1-14)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와 그 생명을 함께 축하하고 즐기라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와 경제는 이 초대를 자주 위태롭게 합니다. 울타리를 치고 몇몇이 독식하거나 갖가지 인맥과 이권이 만든 차별의 벽을 높이 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맞서 하느님의 잔치를 이어가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흥을 이어가시려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시고, 배고픈 이들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 배부르게 먹고 남도록 풍성히 차려 주십니다. 세상 기준으로 손가락질받는 이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는 일로 기꺼이 그들의 동료가 되십니다. 그 잔칫상은 자신의 몸을 제자와 친구에게 내어주는 일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축하하는 부활 잔치의 성찬례로 완성됩니다. 난해한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는 이 맥락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초대하려는 의지마저 돋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참여하여 누릴 잔치의 흥을 깨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사적인 성취와 손익 계산에 따라 참여를 거부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초대가 사적인 이익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판단하여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앙은 손익계산을 넘어설 때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최근 세계의 정치경제, 그리고 우리 주변 상황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새로운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꿀 때 희망이 열립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할 것 없이, 모두 생명 잔치의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하느님의 단비가 차별 없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참여했다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을 벗어나 신앙의 길에 초대받는 은총을 누렸다면, 자신에게 친숙한 세상의 관습을 버리고 신앙과 은총의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에 둘러 모인 사람은 나이와 성별, 학력과 재력, 오래된 이와 새로운 이의 구분을 넘습니다. 사람따라 존대하거나 친근하다는 빌미를 대며 반말로 하대하지 않습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며, 서로 좋은 것을 권하고 보살피는 예법을 따릅니다.

신앙 공동체는 성찬례로 하느님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나눕니다. 세상의 삶이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의 공간과 시간에서만은 새로운 행동과 예법으로 살며 훈련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손님인 사람이기에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예법을 무시하는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는 한탄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생명의 기쁨을 서로 축하하고 서로 드높이며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 생명 존중의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 공동체입니다.

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Sunday, August 2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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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마태 15:21-28)

테러와 전쟁의 위기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예외가 아니어서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의 마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함께 어울려 서로 돕고 사는 일이 참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동시에, 이 같은 극단적 대결과 공격이 어디서 나오는지 헤아려서 신앙인의 태도와 행동을 바로 잡아야 할 사명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마침 오늘 복음은 테러와 전쟁의 명분이 되는 종교적 배타성, 이념적 대결과 차별주의가 예수님과 한 이방인 여인의 만남 안에서 무너지고 새로운 신뢰와 신앙으로 확장되는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여행은 익숙한 유대 땅을 훌쩍 넘어 이방인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전통에 머물러 우쭐대는 위선을 질타하신 참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자기 신앙에 눈이 멀어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남들도 잘못 이끌고 마는 세태를 크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 가나안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가나안 여인’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눈에 그는 상종하지 못할 이방인입니다. 우상 숭배자이며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여자’입니다. 현대 세계의 잣대로 보면, 종교와 이념, 지위와 성에 관련한 모든 차별이 다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하셨건만 유대인 남자들인 제자들과 예수님은 그 차별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상종 못 할 ‘이방인 여인’이 다가와 건네는 요청을 거부하는 쩨쩨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들’과 전혀 다릅니다. 한 생명을 보살피고 건지려는 간절함에는 종교의 벽이 없다고 확신하여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여인의 품 넓은 환대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모멸감을 주는 언사를 견디며, 높은 사람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깨우쳐 줍니다. 경계가 환하게 넓어집니다. 이로써 소위 ‘갑질’하려는 남자는 ‘을’의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거둡니다. 역할이 역전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현실에 도전받으며 다시 배우고 자신 생각과 행동을 고쳐나가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도전과 배움에 열려 스스로 깨지며 새롭게 깨달으시는 마당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득권과 관습에 안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자기 생각과 경험만이 잣대일 수 없다는 일갈입니다. 온갖 분리와 차별의 벽을 넘어서 오직 생명이라는 가치에 신뢰를 두어 겸손하게 자신을 맡기는 일이 신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테러와 전쟁은 종교의 탈을 쓴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순혈주의에서 비롯합니다. 자기주장과 신념만이 옳다는 이념의 노예가 된 탓입니다. 자기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안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득권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허위와 노예근성의 기득권을 훌쩍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도전으로 예수님마저 바꿔 놓았습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새로운 배움과 변화를 신뢰할 때, 예수님의 선교는 더 넓고 풍요롭게 확장합니다. 교회는 이렇게만 성장하고, 갈등과 대결의 세상에 평화와 신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하느님 나라 – 땅의 생명에 깃든 보물

Sunday, July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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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땅의 생명에 깃든 보물 (마태 13:31-33, 44-52)

‘비유의 장’ 마태오 복음 13장 전체는 하느님 나라를 비춥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좀 더 넓고 깊게 펼쳐주며, 동시에 우리의 고정관념을 수정하라고 요청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비유를 따로따로 살폈다면, 오늘 비유들은 그 전체의 벼리를 잡아당기는 대단원입니다. 이미 나눈 바와 같이, 비유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목적 말고도, 쉽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더 깊은 뜻이 왜곡되거나 좁아지는 일을 막는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 전체를 활용하여 더 깊이 느끼고 더 높이 상상하도록 우리의 머리와 몸을 이끕니다.

오늘 이야기를 포함하여 마태오 복음 13장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리고 보물이 묻힌 밭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비유의 공통점이 눈에 띕니다. 씨는 땅에 뿌려집니다. 밀과 가라지는 땅에서 자라납니다. 겨자씨는 흙에서 자라납니다. 누룩은 무엇인가에 들어가서 작용합니다. 밭은 이 모든 것이 작용하는 흙입니다. 이 뜻은 분명합니다. 천상에나 있을 법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흙과 땅’에 들어가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 땅과 세상과 깊은 관련을 맺습니다. 죽어서 간다는 ‘저승’이나, 허공의 ‘하늘’과 연결짓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뿌려지고 심겨서, 자라나고 부풀어 올라야 할 현실입니다. 성서의 하느님 나라는 저승과 허공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 미약하더라도, 흩날려서 잃는 씨앗이 많더라도, 가라지 때문에 생육이 좋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현실에서 기어이 많은 수확을 내고 큰 나무로 자라나며, 빵처럼 부풀어 올라 커지리라는 희망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확과 큰 나무, 커다란 빵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제대로 쓰일 때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많은 수확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겨자씨에서 자라난 큰 나무는 새들이 집을 짓고, 사람이 쉴 그늘을 만드는 곳이어야 합니다. 밤사이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빵은 아침의 허기를 달래고,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소중한 양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풍요롭게 먹이고, 사람을 품어서 그들이 쉬며 사랑을 나누게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깃든 생명을 우리가 키워내고 먹이며 지친 삶을 쉬게 할 때 비로소 발견하는 보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목적을 깨달은 신앙인은 이제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값진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니, 신앙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기꺼이 바꾸어 붙잡습니다. 우리 재산과 시간, 재능과 수고를 이 땅에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우선 봉헌하며 헌신합니다. 이 땅에 깃든 생명을 키워내고 지친 이들의 삶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행동에 참여할 때 신앙과 교회가 바로 섭니다. 이때라야 풍성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삶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