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 오직 사랑만이

Sunday, October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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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 오직 사랑만이 (마태 22:34-46)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습니다. 여러 개신교에서는 특히, 오늘을 종교개혁 주일로 성대히 지킵니다. 독일의 수사 신부 루터가 중세 서방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신앙 행태를 비판하며 개혁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줄을 잇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회와 교회를 둘러싼 크고 작은 정치적 변화를 겪느라 너무 바빴는지 모릅니다. 마련된 행사들은 많아도 개혁의 뜻과 가치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어디 시대, 어느 사회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가로막히거나, 인간의 자유롭고 정직한 감사의 찬양이 왜곡되고 억압당한다면, 개혁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번역어를 수정해야 합니다. 원래 말이 ‘개혁’(Reformation)이듯, 개혁을 종교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개혁은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새겨진 뜻과 질서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 교회와 공동체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개혁의 기준을 한목소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인간도 거룩하여라’(레위 19:2). 우리는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니 거룩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보살피는 사람’(1데살 2:7)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라”(37-38절). 하느님의 거룩한 존재를 서로 보살피며 사랑하는 일이 개혁의 기준입니다. 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사제입니다. ‘만인 사제’ 혹은 ‘신자의 보편 사제직’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여기에 근거를 둡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만든 논리를 개혁합니다. 고정관념처럼 되뇌는 교리와 신앙생활의 경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막는 걸림돌이기 쉽습니다. 혈연과 지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의 정통성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족보로 판가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선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족보를 넘고 인맥을 넘습니다. 하느님의 가치인 사랑 앞에서 누구든 무엇이든 굴복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개혁을 이끌고 완수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꿈과 미래에 식별의 기준을 둡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숨결이 깃든 인간 존재 자체에 판단의 기준을 둡니다. 이 사랑의 희망 속에서, 얼마 전 우리 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교개혁기념 음악회의 외침과 찬미가 우리 삶에 이어져야 합니다.

“또 다시 미래를 / 통계를 넘어 미래를 / 정치를 넘어 미래를 / 은하수보다 더 큰 미래를 / 그래, 또 다시 미래를 / 숨쉬는 모든 것들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

Wednesday, October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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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1

주낙현 요셉 신부 (전국 GFS 동행사제 ・ 서울주교좌성당)

이번 여름 나는 적잖은 특혜를 누렸다. 한국 GFS 동행사제인 탓에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성공회 GFS 대회에 참가했다. 푹푹 찌는 북반구 여름을 피하여 싸늘한 남반구의 늦겨울로 들어갔다. 허덕이다 풀린 땀구멍이 금세 긴장하여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짜릿한 피서의 특혜였다. 여성 대회인 탓에 우리 무리에서는 나 홀로 청일점이었다. 여성들의 까르르한 웃음에 두 주 동안 둘러싸인 경험은 늘 심각한 남성들 모임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유쾌한 특혜였다. 주요 회의 일정, 워크숍과 문화 체험은 내게는 도리어 나중 순서의 특혜였다.

불편하기도 했다. 남성 봉사자들을 한 데 구겨 넣은 침실은 좁고 추웠다. 예상했지만, 여성 대회인지라 남성인 나는 소수자로 왜소해지고 낯설었다. 남성들은 대체로 내 아버지 뻘 되는 분들이었는데, 여성 대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느라 바빴다. 회의 의제나 진행 방식이 생소하여, 그 어색함이 남성 회의와 여성 회의의 차이인지 잠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게는 꽤 지루한 회의 일정이었으나 너무도 즐거워하는 우리 GFS 회원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였다. ‘이분들이 원래 이런 분들이었나?’

불편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조금씩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 여성의 소소하지만 커다란 기쁨을 알았다. 집을 잠시 떠나, 가족의 세끼 준비 고민 없이, 줄만 서면 맛 좋은 음식이 나오니 여유로움이 넘쳤다. 이 작은 자유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올곧게 활짝 피웠다. 이 작은 해방의 기쁨을 한국 남성인 내가 그동안 잘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체로 나이 칠십이 넘은 다른 나라 배우자 남성들은 봉사자로 참여하여 싸늘한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도록 대회를 도왔다. 내가 한국에서 남성으로서 누리는 권리를 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 주름진 남성들의 얼굴에도 즐거움과 유쾌함이 가득했으니까.

이어지는 배움은 고통스럽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도 여전한 가정폭력의 실태, 이를 벗어난 후에도 후유증으로 여성이 평생 겪는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되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기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와 여성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다시 배워야 했다. 여전히 연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위태로운 생명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배움은 불편하고 낯설수록 더욱 값지고 기쁘다. 자신을 반성하여 고칠수록 보람차다. 신앙은 불편한 배움과 성찰로, 좁고 옅은 자신을 넘어 더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를 꿈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조금씩 우리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세계 GFS 여성 신앙인들은 빡빡한 일정 안에서도 도움의 살림살이를 계획하는 일에 지루한 내색이나 다툼 없이 선의의 협력에만 골몰했다. 교회와 세계 여성의 현실을 곱씹어 배우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에 땀 흘리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 까르르하는 즐거움이 교회와 세상을 바르게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 배움과 도전이 세계 GFS 여성 회원들이 내게 선사한 불편하고 아름다운 특혜였다.

  1. 한국 GFS 소식지 <우물가> 2017년 가을호(↩)

신앙의 덫, 닻, 돛

Sunday, October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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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덫, 닻, 돛 (마태 22:15-22)

마음에서는 하늘과 이상을 꿈꾸더라도 몸담은 현실의 유혹과 갈등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늘과 땅의 경계 안에서 항상 흔들리며 삽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하늘의 신앙을 확신하며 세상을 초탈했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풍파에 흔들리는 마음의 연약함을 악용하여 신앙의 덫을 놓는 협잡꾼이 세상에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종교 공동체에도 교묘한 논리와 산뜻한 입발림으로 함정을 파거나 근거 없는 뒷말로 신뢰를 흩어버리는 행태가 적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안녕을 미끼로 친 덫을 식별하고,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하느님께 붙들어 매는 신앙의 닻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바람을 따라 돛을 올려 신앙의 순례를 계속합니다. 말과 발음처럼 혼동하기 쉬운 신앙의 덫과 닻과 돛을 식별하는 신앙이 간절합니다.

– 한 사람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이 위선의 야합을 만듭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주의자 바리사이파와 로마 제국의 앞잡이인 헤로데 당원이 협잡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공동의 적이 생기면 그동안 적이었던 사람도 친구로 변합니다. 적과 친구를 정의의 잣대로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바꿉니다. 이들의 합동작전이 아침에는 잠시 성공할지 몰라도, 저녁에는 서로 배신하여 물고 뜯고 맙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나 정치 행태가 이와 같아 안타깝습니다. 트집을 잡고 덫을 놓으려는 행태는 머지않아 자중지란에 빠집니다. 신앙인은 이 애처로운 일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 신앙인은 세상 풍파의 출렁임에 의연합니다. 우리 삶이 흔들린다 해도 깊고 굳건한 바닥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풍파를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이 표류하지 않게 하는 근거입니다. 신앙인은 흔들리는 삶을 오히려 더 큰 파도를 넘는 훈련과 준비로 삼습니다. 더 깊고 큰 하느님에 기댄 사람은 세상이 유혹하려고 뿌리는 거짓 선전과 선동에 귀와 입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분명히 식별하여, 처세와 지위로 위장한 거짓 권력마저도 끝내는 하느님의 더 크신 권위 아래 복종한다는 진실을 확인합니다.

– 풍파를 넘은 항해로만 우리 신앙은 성숙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례는 그리스도의 삶이 역사에 불어넣은 바람을 타고 전진합니다. 모함을 이기고 정의를 세우며 사랑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바람을 온몸에 받는 돛을 높이 세웁니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바람 방향에 돛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 안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신앙의 배움과 전례로 단련된 근육으로 노를 저어나갑니다. 이 풍파의 바다를 피하거나 우리의 수고를 다하지 않고서는 전진은 없습니다. 신앙인은 카이사르라는 세상의 풍파 위에 하느님의 항로를 그려내며 살아갑니다. 교회의 임무이며 신앙인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