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오해와 오역 사이 –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Saturday, June 1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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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오역 사이 –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삼위일체주일 후 목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다. 간단히 말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한편, 교리는 복음을 역사와 문화, 언어와 사고방식에 따라 풀어보려는 신앙의 노력이다. 교리가 없으면 진리를 제멋대로 오해하기 쉽다. 진리를 종교 체험과 혼동하고 대화와 배움이 불가능한 처지에 빠진다. 반대로, 교리에만 집착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억누르고 만다. 자유를 선사하려는 은총의 복음은 간데없고, 사람의 생각을 조작하고 판단하는 도구이기 십상이다.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도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교리 사이에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성체 축일은 13세기에 만들어졌다. 리에지(유럽 벨기에)의 율리아나 성인(12세기)의 체험이 바탕이었다. 수녀였던 성인의 희망은 단순했다. ‘성목요일 만찬으로 세워진 성체성사’를 성주간을 벗어나서 기쁘게 축하하고 싶었다. 성주간에 흐르는 무거운 주제와 빠른 전개 때문에 ‘성체’를 향한 깊고 신앙을 나눌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환시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제정을 탄원하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20년 후 그의 바람이 이뤄졌고 중세 서방교회에 빠르게 퍼졌다. 날짜는 ‘위대한 50일’의 부활절에서 열흘 뒤였다. 지금으로는 삼위일체 주일 후 목요일이다.

성체 축일의 핵심은 성찬례 자체이다. 성찬례의 뜻과 신학을 우리 삶에 되새기는 특별한 기회이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의 교리는 다른 길로 빠졌다. 성찬례로 함께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라지고, 신비하게 변했다는 ‘성체’에만 관심을 두었다. 성찬례 전체가 아니라 ‘영성체’ 만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신심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된 성찬례보다는, 직접 보고 먹는 ‘성체’의 효험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축일 미사가 끝나면, 성체를 담은 ‘성광’을 들고 마을을 도는 성체 순행이 생겨났다. 이 성광으로 ‘성체 강복’을 했다. 교회를 만드는 성찬례의 진리는 신자 개인의 영성체 교리와 신심에 자리를 내주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 성체 축일과 성체 순행은 큰 공격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의 역겨운 관습이며, 수치스러운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성공회는 1548년에 성체 축일과 관습을 폐지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소수파가 다시 되살렸다. 한국 성공회도 그 전통 아래 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찍부터 이 상황을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그리스도의 성체’에 관한 성가(탄툼 에르고)에는 성체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실제로 목격하고 찬양하는 마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 성공회 1970년 성가 184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민과 신앙을 잘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비길 데 없는 성사를 경배하옵나이다. /
구약제사 다 지나고 신약성사 가운데 /
눈으로 못보는 예수 계신 줄 아나이다.

전능하신 주 성부께 존귀를 돌리오며 /
성부로 좇아 나오신 성자께 찬송 돌려 /
일체되신 성신에게 같이 찬미할지라. 아멘.

애석하게도, 이후 1990년과 2015년 성가(208장)는 오해와 오역으로 성체와 성체 축일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깊은 고민과 신앙이 가려지고 말았다. 개정판에서 다시 그 뜻이 드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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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신문] 2017년 6월 10일치 7면 []

성령 – 교회의 영

Sunday, May 2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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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교회의 영 (요한 14:15-21)

최근에야 널리 쓰이기 시작한 ‘영성’은 오용하기 쉬운 말입니다. 신앙 ‘체험’이라는 말도 비슷하게 그 앞에 ‘개인’이나 ‘내면’과 같은 꾸밈말이 덧붙으면 신앙의 오해로도 이어집니다. 다른 종교들과 교류가 활발하여 영성과 신앙 체험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기도 했지만, 분별이 성글어서 생기는 혼란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체험’은 저마다 개별화하고 파편화한 ‘나 – 인간’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우리 – 그리스도’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을 교회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따르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홀로 동떨어진 ‘개인’이 없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인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오해하기 쉬운 책입니다. 다른 종교와 대화하려는 선한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거짓 교리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기도 합니다. 난해한 탓에 제멋대로 해석하기 십상입니다. 그참에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보다는 신학적 이해를 펼치는 요한복음서를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부활 사건에 기반을 두고 ‘교회’라는 새로운 ‘우리-그리스도’를 펼치는 새로운 신학이라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삶에서 늘 배우고 기대며 따랐던 어떤 이가 떠났을 때, 특히 그가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던 이였을 때, 우리는 깊은 상실과 혼란에 빠집니다. 삶은 불확실하고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외롭게 개별화한 눈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흩어져 파편화한 손길로는 자신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서 홀로 절망하는 이들을 하나로 붙드는 힘을 약속합니다. 새로운 몸을 만드는 가치와 행동을 선물하십니다. 삶을 새롭게 보는 눈길, 세상을 껴안아 보살피는 손길을 약속하십니다. 생명의 숨결인 하느님의 영, 동행하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협조자 성령입니다. 이 영이 성찬례 안에서 작은 밀떡과 값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으로 변화하는 신비를 마련합니다. 교회 안에서 작고 모자란 인간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적을 선사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듭니다. 교회는 다시 세상의 삶 속에서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를 ‘영적인 실체’와 ‘제도적 도구’로 나누어 대결시키려는 이분법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관련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숨결과 그리스도의 동행과 성령의 힘이 만든 영적이고 역사적인 실체입니다. 교회로만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호흡하고 삽니다. 그 호흡 속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성이며 체험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합니다. 일치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체험합니다. 여기서 교회의 생명인 선교가 일어납니다.

[전례력 연재] 불꽃 논쟁 – 승천일과 성령강림일 사이

Saturday, May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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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논쟁 – 승천일과 성령강림일 사이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예수께서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가 24:50-51, 사도 1:9). 예수의 승천 사건은 루가복음의 결말과 사도행전의 시작을 연결한다. 그러니 예수의 승천 사건만 똑 떼어 풀이할라치면 그 깊은 뜻이 밋밋해진다. 부활 사십일 째 일어난 승천은 부활의 기쁨이 사십 일의 고난(사순절)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기쁨은 더 확장된다. 열흘을 더해 성령강림절(오순절)이 부활절의 완성이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위대한 오십일’로 읽으며 한 절기로 지켰다. 승천 축일을 따로 지키는 관습은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야 정착했다. 승천에 관한 성서 기록이 명백한데도 교회 전통에서는 애초에 부활절기를 워낙 강조했기 때문이다. 승천을 부활절 전체 맥락에서 풀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승천일은 부활 사십 일 셈법에 따라 늘 목요일이 된다. 그래서 ‘승천일’이라는 말보다는 ‘거룩한 목요일’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오래 쓰였다.

승천은 부활의 구원 사건에 담긴 새로운 역사의 운동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하시러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께서 다시 하늘에 오르셔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신다. 인간의 잘못으로 부서져 내려앉은 창조세계를 회복하여, 끌어올리고 확장하는 부활의 뜻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에 걸쳐 여전히 계속 일어난다. 그분은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로 내려오신다. 열흘 후 성령강림 사건이다. 하강과 상승의 예수 운동에 우리 삶을 맡기고 포개는 일이 승천 사건이 보여주는 부활 신앙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문화와 종교 생활의 핵심이었던 탓에 여러 주요 축일과 마찬가지로 승천일도 휴일이었다. 그러나 근세기에 선교지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고 사회의 세속화도 빨라져서 축일을 휴일로 지내기 쉽지 않게 됐다. 천주교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축일 당일을 고집하지 않고 다음에 오는 주일을 해당 축일로 지키는 지침을 제정했다. 성공회와 다른 전례적 교회는 획일적 지침을 정하지 않았으나, 이런 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인다.

승천일은 부활밤에 밝힌 부활초를 끄는 날로도 유명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으니 예수의 지상 생활을 청산하는 뜻에서 부활초를 끄고 보이지 않도록 치운다는 해석이다. 당일 축일 미사에서 복음을 읽은 직후에 부활초를 끄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단순하고 명백한 상징이어서 교육 효과가 상당히 컸다.

그러나 부활의 위대한 오십일 전통을 회복하면서, 이 관습에 변화가 생겼다. 부활초는 지상을 걷는 예수의 몸만이 아니라 부활 사건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승천을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통치자로 등극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떠나지 않고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에 부활초를 끄고, 부활초를 세례대 옆으로 옮긴다. 세례와 장례 때에는 부활초를 밝혀서 사용한다.

오랫동안 보고 익힌 관습의 힘은 여전히 세다. 부활초 끄는 시점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다. 나름대로 이유와 전통이 있으니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면서 배척할 일은 아니다. 공동체가 그 여러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되새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다만, 새롭지만 실은 더 오래된 신학을 되살려서 성령강림절에 끄면 좋겠다. 영성체 후나 파송 선언 직후에 부활초에서 저마다 작은 초를 밝혀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퇴당 때, 부활초를 들고 세례대로 순행하여 불을 끈 뒤에, 순행을 뒤따른 신자들이 개인 촛불을 세례대 근처에 놓고 떠난다. 자신의 세례로 시작한 부활의 생명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뜻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