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Friday, August 15th, 2014

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8월 15일)1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이 기쁘고 즐거운 날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모 마리아 안식 축일과 겹쳐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송가’(루가 1:46~55)는 광복절을 되새기기에 좋은 해방의 복음이요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51~53).

성모 마리아의 삶은 이 ‘마리아 송가’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양 중세처럼 성모 마리아에 관한 잘못된 신심과 미신적인 숭배를 낳기에 십상입니다. 마리아는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녀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작고 가녀린 몸을 당신께서 몸소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뚜렷합니다.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천주교만 유독 이날을 ‘성모 승천’ 축일로 지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인데, 중세기에 생겨난 생각입니다. 1950년 천주교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무리한 주장을 펴며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가르침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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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정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의 ‘안식’(dormition) 축일로 지킵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잠들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신자는 모두 잠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쉴 뿐입니다.

정교회의 ‘성모 안식’ 이콘은 이 신학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아기 예수를 낳았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로 예수님 품 안에 안깁니다. 지상의 성모님이 천상에서 아기가 되고, 지상의 아기 예수님이 천상에서 마리아를 안은 ‘어머니’가 됩니다. 이 역전이야말로 성모 안식 축일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뒤바꾼다는 뜻입니다. 낮은 이들을 들어 올려서 하느님께 함께하도록 위치를 바꾸는 사건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가난하고 힘없는 종을 도우셨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10일 치 []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Wednesday, August 6th, 2014

빛의 신학 – 예수 변모 축일 (8월 6일)1

공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모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고 산 위에서 빛을 감싸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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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산에서 일어납니다. 이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덧없고 유한한 인생이 영원한 차원과 만나는 곳입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이 두 경계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뚝 서십니다. 이 경계에서 예수님은 환한 빛으로 변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하여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늘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건 등장인물의 만남이 뚜렷합니다. 모세는 가녀린 떨기나무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불을 품었던 순간에 하느님을 만났고, 이집트 노예 탈출을 이끌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악행을 거듭하는 권력과 싸우다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올랐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예수님과 만나 구원 행동의 전통을 나누고 함께 이어가는 만남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세상 속에서 계속 이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사건에 담긴 말들이 이채롭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논의했습니다. 이때 ‘죽음’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엑소더스’, 곧 ‘해방의 탈출’입니다. 이를 위해서 애써야 할 터인데 제자들은 초막을 지어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세상의 억누르는 사슬을 끊으며 해방하는 일에 귀 기울여 참여해야 합니다.

서방교회 영성과 신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몰두하여 참회의 신학으로 깊어졌다면, 동방교회 영성과 신심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바라보며 빛의 신학으로 펼쳐졌습니다. 우리 인간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자유롭게 되어서 빛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일이 신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 사건에서 우리 인간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 자체이며, 참된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3일 치 []

생명과 구원의 기억 – 성 이레네우스 축일

Saturday, June 28th, 2014

애가 2:2, 10~14, 18~19 / 시편 74:1~3, 22~23 / 마태 8:5~171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는 잊혀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잊어야 살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뇌의 작용이 얽혀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해로운 기억이든 이로운 기억이든, 자기 멋대로, 혹은 자신이 감당할 능력에 따라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우리 마음대로 제어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우리 생에서 살았던 여러 사건과 경험도 잊혀지는 일이 많은데, 2천 년 전, 그것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잊었던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202년경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레네우스 성인을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도서는 이분의 기념일을 5월 28일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실수입니다. 다행히 그 실수를 바로 잡아서 6월 28일 오늘, 그분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이 우연한 실수를 통해서 성 이레네우스 축일을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레네우스 성인을 잘 알거나 기억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의 제자였던 폴리캅 성인의 제자였으니까,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 족보에서 손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인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니케아 신경의 여러 문장이 이분의 글에서 따온 것인데도 이 성인의 이름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분의 생소한 이름뿐만 아니라, 이분의 가르침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일까요? 이 성인이 그토록 싸웠던 이단들,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세합니다.

세상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나누고, 모든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삶의 미래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는 일이 횡행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 불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상은 실제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불완전하고 악이 가득하고 육적인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내적인 세계의 평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있고,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 자처합니다.

우리의 삶에 담긴 갖가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은 그저 모두 허상일 뿐이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지식과 진리만을 깨달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횡행하니, 이런 사고방식을 철저히 반대했던 이레네우스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는 잊고 산 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옹의 교부 성 이레네우스는 이처럼 개인적이고 영적 지혜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았던 영지주의자들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영적 지혜와 일상의 경험, 영과 육, 그리고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오늘 우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드리며 떡과 잔을 나누는 일을 두고 ‘세상의 썩어질 물질을 먹는 헛된 짓’이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수련하여 얻은 영적 지식이 영원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 성인은 성찬례가 육과 영의 결합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성체’의 사건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며, 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희망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만남과 변화의 신비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성찬례이며, 이 성찬례 신비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리와 선언을 세운다고 반박했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구원은 이미 창조 때에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참 좋다”하며 던지신 감탄사에 이미 담겨있노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그 창조 안에서 조금씩 유아기를 벗어나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진화의 과정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우리의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기억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우리의 영혼도,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살다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나누고 마시고,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결국에는 고통을 당하다 죽었던 이유도, 우리의 생로병사 그 자체가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창조 때의 아름다운 모습, 참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키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성인은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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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희 작, 침묵: Shin-hee Chin, Silence)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2001년 6월 28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 딸 아이보다 넉 달 먼저 세상에 선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희’입니다. 그 생명이 한 가족에게, 특히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주어졌을 때 경험한 기쁨을 우리는 간단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나며 우리에게 보여준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는 말과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1년을 지상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이 홀연히 엄마와 아빠 곁을 떠났을 때 닥쳤던 슬픔과 절망감을 우리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사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의 시편 기자가 되어 이렇게 외칠 뿐입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 오늘의 예언자마저도, 비탄에 잠겨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나 너를 어디다 비겨 위로해 주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벌어졌거늘, 어느 누가 다스려줄 것인가? 주님께 울부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같이 흘려라.”

우리는 눈물을 마시며, 눈물에 비추며, 우리의 모든 삶을 기억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존재가 결정된다”고 어거스틴 성인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사랑들 전체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만지고 느끼고 먹고 마셨던 모든 것들을 통해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되살려 기억할 때, 아니, 우리와 11년을 살다가 홀연히 꽃처럼 떠난 아이들의 숨결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지난 4월, 속절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우리를 떠나야 했던 300여 명의 꽃 같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제대로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풍요로운 기억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기억과 세계를 껴안으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인간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기억 속에 잠긴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은 우리의 약함이요, 아픔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라야 그 생명들은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으로 남아 살아 숨 쉽니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고,” “그분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도, 한 명도 잃지 않고, 그분의 품 안에서 있다는 것을 늘 되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1. 한국 기도서는 성인 축일 해당 본문을 제시하지 않아 연중주간 본문을 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