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아픔 – 아기 예수 봉헌 축일

Sunday, February 1st, 2015

아기 예수 봉헌 축일 – 구원의 아픔 (루가 2:22~40)1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루가 2:40). 자녀를 향한 세상 부모의 마음을 모두 담은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소망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한 처지인지라 비싼 새끼 양은 엄두가 나지 않아 비둘기 한 쌍을 구하여 제물로 바치려는 마음은 세상 여느 부모처럼 간절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건강하고 지혜롭고 어려움 없이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 소박한 소망을 훼방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아온 시므온이라는 노인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구원을 목격했노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구원이 펼쳐지는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이 아기는 자라서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것이며,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서,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 합니다. 도대체 아기를 성전에 바치는 장면에서 벌어진 이 일은 축복인가요, 저주인가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역설투성이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삶이지만,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실패요 불명예인 삶입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 보면, 그 삶은 하느님과 지상의 부모에게는 크나큰 고통과 아픔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화해를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복음을 따르겠다는 신앙인은 이 역설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 안에 있는 아픔을 살핍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아픔을 우리 것으로 짊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속에서 우리 삶을 헌신한다는 말의 본래 뜻입니다.

피붙이로만 이뤄진 가족으로는 이런 다짐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 교회는 성찬례의 밥상에 둘러 모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롭고 든든한 가족입니다. 아픈 마음을 서로 기대며 소망을 나누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일이 바로 우리의 헌신이며, 교회의 선교입니다. 우리를 조금씩 덜어내어 물질로나 시간으로, 봉사로나 기도로 함께 응원하는 일로 우리는 헌신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여전히 우리는 자녀가 잘 자라고 가족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펼치는 구원에 아로새겨진 아픔, 그와 함께했던 마리아와 요셉이 겪었을 아픔을 함께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녀가,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깊이 느끼며 세상에 구원의 기쁨을 전달하는 아기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우리의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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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2월 1일치 []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 – 마르틴 루터 축일

Friday, October 31st, 2014

마르틴 루터 축일1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전야. 독일 성 어거스틴 수도회 수사 신부이자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95개 조항으로 정리한 교회 개혁의 글을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붙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서막이 열린 순간이었습니다.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분열하여 현재의 천주교와 여러 개신교회로 나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자로서 엄격한 규율을 따르며 죄의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얻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해 괴로웠습니다. 더 깊은 기도와 공부를 통해서 그는 마침내 용서와 구원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온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은총이 그 선물입니다. 앞선 여러 학자와 성직자들의 노력과 성과에 기댄 이 깨달음은 중세 교회와 근대 교회 사이를 잇는 다리이자, 교회 안에서 신앙의 본연을 회복한 분기점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느님과 관계가 깨졌지만,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어떤 조건 없이 몸소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은총을 깊이 성찰하여 사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성찰은 한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예배와 인간의 선행은 바로 이 은총에 응답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과 은총의 신학’을 바탕으로 루터는 당시 타락하고 엇나간 교회와 신학을 95개 항으로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특히, 별세한 조상의 구원을 미끼로 교회가 팔아먹던 면벌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인지 밝혔습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과 신학을 잃으면 장사꾼이 되다 못해 사기꾼으로 전락한다는 현실을 고발하고 경고한 일이었습니다.

루터가 가르친 ‘모든 신앙인은 사제’라는 ‘만인 사제직’ 교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큰 오해를 낳았습니다. 이는 ‘너나 나나 사제, 그러니 특별한 사제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서로 기도를 바치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산다는 말입니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만인사제직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제가 되어 함께 모인 교회는 세상에 구원을 펼치는 곳입니다.

서로 갈등하는 시대를 살았고 자신도 병고에 시달린 탓인지, 루터의 논리적이고 분명한 주장은 때로 거칠고 사납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 교회는 루터의 깊고 성실한 자기 성찰의 신앙과 신학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오히려 그 사나움과 배타성만 배워서 중세 교회의 타락을 되풀이하여 이제는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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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4년 10년 26일치 []

역사와 신학 사이 – 성 십자가 축일

Sunday, September 14th, 2014

역사와 신학 사이 – 성 십자가 축일 (9월 14일)1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 가장 중심에 우뚝 선 역사의 현실과 신학이며, 오늘 우리 삶의 이정표입니다. 십자가 축일은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십자가를 통해 기억하는 날입니다. 십자가라는 죽임의 도구가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마련하는 구원의 도구로 변했는지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역사와 신학을 잊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도 변질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날입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는 강대한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 권력은 자국민이 아닌 식민지의 ‘타인’을 압제하고 처형하는 힘입니다. 로마는 자국민에게는 고통이 덜한 참수형을 적용하고, 식민지 지역 사람들에게는 훨씬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적용했습니다. 로마 권력이 예수님께 들씌운 죄목은 십자가 위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I.N.R.I.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예수님의 언행이 어떤 권력에는 불온하고 위험한 정치적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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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는 폭력과 죽임의 상징을 용서와 화해, 생명의 상징으로 바꿉니다. 역사의 현실에서 거듭되던 폭력과 죽임의 악순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멈춥니다. 이 지점에서 죽은 십자나무가 생명을 품은 십자나무가 되어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열매를 맺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걸려 있네.” 여기서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생명 행렬에 참여하여 기꺼이 세상의 질서에 거슬러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역사는 역설의 반복입니다. 십자가 축일도 이 역설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십자가를 찾아 나섭니다.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진짜 십자가’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가가 섰던 자리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자리에 ‘예수의 거룩한 무덤 성당’을 지어 봉헌합니다. 326년 9월 14일의 일입니다. 이후에 십자가 경배를 성 금요일에 거행하는 관습도 생겨났습니다.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는 그 참혹한 역사를 잊고, 종교적 의미만 남긴 십자가 신학으로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여 역사를 사셨던 예수님을 잊거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서는 신앙과 신학은 제대로 서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한 개인의 내면적 종교심과 신심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하면 중세 교회의 폐해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성당과 예배당 안팎, 장신구나 기도 묵주의 십자가에서 여전히 ‘타인’의 아픔과 눈물과 피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멈춥니다. 그러니 십자가 축일에 우리는 다시 사도 바울로 성인의 고백을 되뇌며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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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9월 14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