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Saturday, December 26th, 2015

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루가 2:41~52)1

가족! 입에 올려 듣고 생각만 하여도 만감이 교차합니다. 온갖 애틋한 추억과 행복이 넘실대는가 하면, 한 꺼풀만 들춰도 아픈 기억과 슬픈 상처가 고스란합니다. 사랑의 온기가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긴장과 갈등이 서린 가정입니다. 교회는 성탄 첫 주일을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룬 ‘성 가정 축일’로 지키곤 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을 충분히 기뻐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과 아무 죄 없이 살해된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축일을 지킵니다. 도대체 이 얄궂은 교회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유년기의 예수님과 부모님을 만납니다. 열두 살은 당시로는 사춘기를 넘어 성인이 되는 전환기입니다. 부모는 신앙의 전통을 자식 세대에게 애정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려 해마다 성전에 데려갑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을 제대로 못 챙기고 하루가 지나서야 허둥대며 찾습니다. 겨우 찾은 어머니의 염려는 아들을 나무라고, 아들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합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가족이 꼭 거룩하여 온전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갈등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서는 ‘성 가족’조차도 미화하지 않고 그 내막을 그대로 들춰냅니다.

신앙과 인생을 가르치려는 어른의 노력은 종종 종교의 타성에 젖기도 합니다. 성전이 상징하는 종교와 신앙에 자기 식대로 왔다 갔다 할 뿐 심각하게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젊은이가 성전을 알게 되어 그 안에 머물며 신앙의 대화와 배움에 열심이면 당돌하고 무례하게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전에서 기도와 대화에 힘을 쏟습니다. 종교와 신앙이 삶에 자명한 대답을 준다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잘 안다고 인생의 답이 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말씀과 해석, 성찬례의 신비를 경험하는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고 풀리지 않은 의문을 붙잡고 대화할 때, 신앙이 발돋움합니다. 신앙의 의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으면 신앙은 멈추고 맙니다. 그렇다고 신앙은 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일만도 아닙니다. 어린 예수님은 다시 어른의 지혜와 경험 앞에 순종합니다. 불완전한 가족과 함께 더 배우고 나누고 아파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남녀노소 모두 아픔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더 껴안을 때, 우리의 지식과 마음이 자랍니다. 모든 세대가 갈등을 무릅쓰고 서로 겸손하게 배울 때, 가족이든 사회든 새로운 화해의 길이 열립니다.

이 새로운 가족의 길은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머지않아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늘 따라다녀 지켜보는 마음에 애가 타지만, 그 길을 억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늙은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으로 젊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지켜볼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찢어진 가슴의 아픔이 우리 가족과 교회, 사회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갈등하고 상처 입은 가족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탄생의 기쁨과 더불어 상실과 실패, 절망의 상처가 우리 사회 깊은 곳에서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울음 속에서 세상의 여러 슬픔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 안에 품으신 꿈과 아픔의 눈물을 섞어 함께 잔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새롭고 거룩한 가족이 태어납니다.

Holy_Family.pn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27일 성탄 1주일 주보 [↩]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Sunday, October 25th, 2015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마르 10:46~52)1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변을 얻으려면 먼저 성서가 전하는 구원에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구원의 핵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일어나 새 힘을 얻는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구원은 신앙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나누는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사는 일이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정의로운 신앙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나 권력자들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고 절망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희망과 구원을 세우십니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안에 갇혀 절망과 눈물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불러내시어, 서로 섞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세상이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동체에서 구원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고통은 이제 구원을 꽃피우는 거름이 됩니다. 더 아프고 슬펐던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더 고생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더 큰 찬양을 바칩니다. 성서가 굳이 여러모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와 경험을 교회의 밑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사제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에 바빴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작은 이들과 함께 스스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더는 되풀이되지 않는 “단 한 번”으로 희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움켜잡을 때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뚫고 낯선 이처럼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때, 상처로 불구가 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자기 안위와 보호의 마지막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새로운 삶의 시선이 열립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과 기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사업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작은 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처럼, 낯설고 작은 사람들의 울음과 아픔을 둘러보며 바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슬픔을 건너고 낯선 이를 환대하며, 함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어 구원을 누리며 축하하는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Healing_Blind_Man.pn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25일 연중30주일 주보 [↩]

영광의 공동체 – 평등한 세례로 나누는 슬픔의 잔

Sunday, October 18th, 2015

영광의 공동체 – 평등한 세례로 나누는 슬픔의 잔 (마르 10:35~45)1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마르 10:35). 신앙인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누구나 드리는 부탁이며 기도입니다. 저마다 어려운 처지에서 바치는 절박한 간구는 듣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도울 방법을 함께 찾는 일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같은 부탁이라도 사정이 다릅니다. 제자 형제 둘이 예수님께 ‘영광스러운’ 자리를 청탁하는 장면을 읽자니 입이 씁니다. 예수님께서 곧 수난을 당하시라는 비장한 말씀을 꺼낸 직후에 나온 행동이라, 사람의 뻔뻔함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십가가의 길을 들어서신 예수님의 고뇌는 정작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익과 입장에 가려져 버립니다.

청탁하는 제자 형제들의 혈연관계는 우리 사회 곳곳에 드러나는 지연, 학연, 인맥과 같은 ‘이익의 끈’ 문제입니다. 본래는 가까운 신뢰와 배려에서 나왔을지라도 종내에는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영광의 경쟁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익의 끈에 들지 않은 사람은 쉽사리 배척합니다.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한 관심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배제당한 사람의 질투와 ‘화’를 돋굽니다. 불필요한 시기와 경쟁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꼬리를 무는 원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기도는 “큰소리와 눈물”의 청원이었습니다(히브 5:7). 삶의 고난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나누는 기도였습니다. 이익과 신분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고난의 세례를 받아서 쓰디쓴 잔을 나누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사 생활의 핵심인 세례와 성찬례의 뜻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세례는 인간사의 고통과 슬픔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가장 깊은 밑에까지 들어가서 자기애(自己愛)가 익사(溺死)하는 경험입니다. 삶의 물밑에 닿는 절망을 통해서 우리는 평등해지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세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로 태어납니다. 교회는 이처럼 평등하게 세례받은 이들이 이루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성찬례는 세례로 맺은 형제자매가 함께 밥상에 둘러 모여 삶의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한 잔’에 담아 나누며 성장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광이요, 하느님 백성이 누릴 영광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절망의 세례를 통과하여 기쁨과 슬픔의 잔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나눕니다. 신앙인은 이제 새로운 삶을 다짐합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고난받은 종’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 낯선 사람을 위하여 어려움을 “대신” 지는 일을 예수님께만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함께 삶의 짐을 ‘대신’ 짊어져서, ‘굴욕 당하며 외로움에 방치되고, 인간사회에서 끊기고 매장당하여 잊혀진 이들을 일으킵니다’(이사야). 그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또다시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가 겪던 “극심한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이사 53:11).

Nolde-last-supper-1909.jp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18일 연중29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