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교회 일치 강연 전문 – 일러두기

Saturday, November 21st, 2009

지난 10월 천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그리고 [사도 헌장] 본문 발표 이후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의 전문을 번역했다. 그 참에 그와 관련해서 적거나 번역했던 내용을 취합해서 교회에 돌렸다.

아래 내용은 첨부한 내용의 일러두기 내용이다. 간단한 배경 설명과 강연 요약, 그리고 번역문에 대한 몇가지 유의 사항을 적었다. 첨부 파일에는 이전에 올렸던 글들도 모아서 전반적인 이해를 높히도록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강연은 교회 일치의 교회론적 토대를 매우 아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그에 바탕하여 교회 일치에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 일러두기 내용 (아래 본문)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 강연 내용 요약

  • 번역에 대하여

  • 용어 해설
  • 인용 및 배포

@ 첨부 문서 내용 (아래에서 pdf 다운로드)

  • 캔터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 주낙현 신부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논평 –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2009년 10월 19일 천주교 교황청 신앙과 교리 성성은,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들이 천주교로 들어오고자 할 때,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특별 관리 교구를 만들도록 하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 전례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번 조처는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이 지난 몇년 동안 요청해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조처를 담은 [사도 헌장]은 근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고, 2009년 11월 4일 “ANGLICANORUM COETIBUS”라는 제목의 교황령 [사도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이 조처를 발표하기 2주 전에야 이와 관련 사실을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 전달했습니다. 발표 당일인 10월 19일 영국 천주교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발표에 관한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 기자 회견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발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갑작스러운 발표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기자 회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조치가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처 발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이미 제가 10월 21일 관구 게시판에 올린 글과, 11월 1일자 [성공회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제 개인 블로그인 http://viamedia.or.kr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 첨부)

한편,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는 이 교황청 조처에 대한 논평을 짧게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이 조처가 양 교회 간에 있었던 교회 일치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 성과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조처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주교 신자일 뿐이고, 이 조처가 교회 일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평은 관구게시판과 서울교구 성직자 카페, 그리고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게시했습니다. http://liturgy.skhcafe.org (이 문서에 첨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한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미 계획에 잡혀 있던 대로, 로마에 방문하고 강연을 했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와도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 앞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요한네스 빌레브란트 추기경(교황청 교회 일치 평의회 초대 의장, 1909-2006)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11월 20일)에 초대받아, 교회 일치의 신학적 주제와 도전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여기서 교황청 [사도 헌장]의 파장에 즈음하여, 교회 일치 대화의 방법론을 재정리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주제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은 성공회의 주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 동안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교회 일치 대화 문서의 정신과 그 신학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최근 천주교의 행태들과 조처들이 그간 스스로 참여했던 교회 일치 대화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최소한 이와는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강연 내용 요약

위에 말한대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강연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등이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와 그 문서들을 되짚으며, 교회 일치 대화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발전시켰던 교회론(Ecumenical Ecclesiology)을 되새긴 다음, 교회 일치 대화에서 논란이 되는 몇가지 주제들,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교회론에 바탕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난 40여년 동안 그리스도교계는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어떤 수렴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교회는 하나인 이중적인 선교적 전망,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communion), 그리고 이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친교를 지니고 있다. 교회 일치 대화와 실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교회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2. 특히, 선교를 위해 일치된 교회를 향한 지난 40여 년의 대화 속에서 볼 때, 이 교회 일치의 선교적 교회론에 따라서,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식별해야 한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합의해 놓고서, 부차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타당한 일인가?

3. 이 점에서 세가지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권위의 문제(교도권, magisterium)), 수위권(primacy), 그리고 지역 교회(local church)와 보편 교회(universal/catholic Church)의 관계이다. 거듭하거니와, 이 신학적 주제들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가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의 어떤 합의 원칙에 바탕하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4. 권위의 문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를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적인 친교를 지탱하기 위한 책임이 바로 권위의 근간이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상호 협력으로서만 권위가 설 수 있다. 규율적, 위계주의는 권위가 아니다.

5. 수위권 문제: 수위권 문제는 교회 일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나 함께 친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룰 때, 수위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열린다. 한편 교황청의 [사도 헌장]에 말한 조치는,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배려한 사목적인 조치일 뿐, 교회론적인 근거는 없다.

6.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 교회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거룩함 속에서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를 나누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자체로 보편 교회를 담고 있다. 지역 교회의 어떤 결정, 예를 들어 여성 성직에 관한 결정은 바로 이 세례받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의 거룩함이라는 전망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역적 결정이지만, 역시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다. 최소한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은 교회론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의 성과와 원칙을 지역적으로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성 주교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를 훼손한 적이 있는가?

7. 불일치 속에서 갖는 일치에 대한 전망: 지난 40여 년 일치 대화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신학적 원칙을 되새기며 여기에 자신을 내어 놓고 성찰해야 한다. 다시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원칙들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모순된 일이다. 그간의 대화에서 확인한 영적이고 성사적인 전망이 가져다 주는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번역에 대하여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들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영어가 평이하지 않으니 우리말 번역이 힘겹습니다. 이번 강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의 한계도 분명한 터라, 옮기는 과정에서 곤란이 겹쳤습니다. 몇가지를 머리에 담아 번역했습니다.

우선 직역을 강조했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경계는 없고, 정확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만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자체에 담긴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우리말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능력의 한계(우리말/영어)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들은 풀어쓰거나 의역했습니다. 또한 이미 통용되는 번역어 가운데 잘못 번역되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썼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깊은 뜻들이 왜곡되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우선은 독자들에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오역이나 잘못된 표현은 지적해 주십시오.

용어 해설

번역어로 사용된 몇가지 용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입니다.

천주교: Roman Catholic Church 에 대한 우리말은 ‘천주교’이니 모든 “Roman 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단어는 ‘천주교’로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이라는 용어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우리말 음차로 쓰는 ‘가톨릭’은 catholic 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디에서든 ‘catholic church’는 “(Roman) Catholic Church”와 대비되어, ‘보편 교회’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은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쓸 말이 아닙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뜻으로 쓰입니다. 이 표기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서 한 적이 있으니 참조할 수 있습니다.

자녀됨을 통한 공동의 거룩함: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거듭되는 말입니다. filial and communal holiness 등의 표현을 우선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친교 / 친교적 공동체: 이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친교’라는 말은 ‘communion’의 번역말입니다. 그저 ‘코뮤니온’ 혹은 원어를 따서 ‘코뮤니오’로 쓸까 했지만, 친교로 정했습니다. 좀더 설명이 깃든 번역어라면 ‘친교의 공동체’ 혹은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면 좋겠으나, 어수선해 보여서 그리 했으니, ‘친교의 공동체’ 쯤으로 읽어 주십시오.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교회론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라는 말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와 함께 쓰여, 삶의 맥락에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지역 교회’는 개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혹은 관구 같은 개별 교회의 지역적 연합을 가리킵니다.

인용 및 배포

이 번역문은 주낙현 신부의 사적인 공부와 성공회 성직자 및 신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원저자 및 번역자의 허락 없이 내용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인용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또한 번역문 위치 링크 이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배포하지 말아 주십시오.

PDF 다운로드 연결: 
http://bit.ly/8hHPxj
ABC_R_Williams_on_Ecumenism_Rome_2009.pdf

낙관과 비관 사이

Wednesday, May 13th, 2009

내용 없이 징징거리는 듯한 블로깅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돌이켜야겠다. 한 주 전 쯤 교회 내에 있는 어떤 분의 긴 편지에 교회의 여러 일들에 대해 답장하면서, 결국에는 ‘잡감’에 대한 또다른 소회를 적는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올해 들어 잡감들이 더욱 밀려 옵니다. 블로그에도 적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잡스러운 생각들은 성직자들과의 관계, 교회의 문제, 그리고 성직 자체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옵니다. 남을 두고 비판하는 시점에서 나온 고민도 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잡감들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서로들 스스로의 도마를 마련해 보기를 권유하려고 미욱한 고민이나마 공개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내 무의식에 흐르는 것들을 들춰서 어떤 너머를 지향하고 살아가보자는 심산입니다. 그런 일이 쉽지 않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너머라는 초월을 종교인들 마저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면 누가 생각한단 말입니까? 신자 아닌, 성직자 아닌 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깊이 보고, 식별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뒤틀린 자의식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신자로서, 성직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뒤틀린, 혹은 가려진 무의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약한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공방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그냥 멈추는게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한편, 그렇게 쉬이 상하는 감정을 갖고 성직자 할 일은 아니라는게 제 최근의 결심입니다. 오해를 하더라도 창조적으로 하자는게 또 다른 결심입니다. 그런 창조적인 오해는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복합감정에 사로잡혀 오해를 양산하는 무의식의 구조가 밝히 드러나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아직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이렇게 긴 답장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제 한계를 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한계가 다른 이들과의 공명을 통해서 낙관을 비추지 못한다면, 아마도 저는 비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대로 제게서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소망을 없애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면, 그 비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돌이키는 시점의 마지막 푸념이길 스스로 바란다.

‘성직자’ 잡감

Monday, January 12th, 2009

1.
성직자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위계를 전통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는 그 질서의 압박감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각양각색의 신자들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무엇보다 고민 많은 한 신앙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이는 이를 잘 피해나가는 것이 경륜이자 지혜라고들 하나, 여럿을 보건데 자기 합리화로 들리곤 했다. 그 말들에 사실 행복한 얼굴이 묻어나지 않은 탓이다. 자기 검열에 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나 역시 자유롭노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몇 번이나 그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거니와, 하루에도 몇번씩 다짐과 생각을 고쳐 먹는다. 도전을 객기로 여기고, 슬픈 자포자기를 도통으로 여기라는 충고가 앵앵거린다. 철 들라는 소리와 함께.

2.
그러나 성직자는 혼자가 아니어서 사제들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새로운 도전을 일깨운다. 저마다 부족한 것들이지만, 사금파리로 모여 듬성듬성 삶의 빈 곳을 매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가 이 희망을 저버리거나, 무관심하면?

아마 조급증이었으리라. 이런 절망과 무관심이 우리 교회 안에서 독버섯 피어나듯 하여 우리 그늘을 좀먹고 있다는 생각. 햇볕을 피하는 그늘이 되어 지친 삶을 서로 기대어 쉬는 자리가 아니라, 축축하고 써늘하게 습진 동네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 이 조급증이 사람살이의 복잡한 일을 내밀하게 살피지 않고 간섭하도록 나를 떠밀었는지 모른다.

3.
몸이 이 공동체에서 멀어져 있는 탓도 있겠다. 첨단 테크놀로지로도 몸이 함께 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그 간극을 좁히고 싶고, 내 깐에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보고, 그 사이에 어떤 소통이 마련된다면 족할 일이라서 해서 블로그니, 포럼이니,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니 하는 것에 기운을 주고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대문에 걸어 놓았다. “성공회 카페는 신앙과 지식과 성찰이 어우러져 새로운 지혜와 실천을 열고자 하는 공감의 목소리와 공명의 메아리를 담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게 빈수레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4.
유혹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피하고 싶었을 게다. 그도 아니면 나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동안에, 길동무[道伴]인 신부님은, 같은 물음을 하느님께 물어 그 음성을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내공의 차이다.

네가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많이 얻어
교회의 세력을 이루었다면
그 어울림과 권력의 맛에 취하여
반드시 하느님도 사람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네 외로움, 네 모자람, 네 어리석음 때문에
너는 나를 향하여 나의 길을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5.
어디에다 적었던 글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배운 바 없지 않으니, 다른 식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대화와 나눔이 없으면, 자랄 수도 풍요로워질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검열을 넘어, 좀더 넓고 깊은 자기(‘우리’) 수련과 도전으로 이끌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를 몸으로 살지 않고서야, 미사에서든,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몸”을 운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