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고 분명한 부활의 증언 – 캔터베리 대주교 부활절 서신

Wednesday, March 31st, 2010

다가오는 부활절을 맞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부활절 서신을 발표하셨다.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폭력과 불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담대하고 분명하게 저항하며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다(전문 번역은 아래에).

그런데 언론은 이 서신의 정황에 주목한다. 얼마 전 영국의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영국 내 그리스도인 역차별에 대한 불만을 담아서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반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직전 캔터베리 대주교인 조오지 캐리 경과 다른 보수적인 영국 교회 지도자들이 낸 성명서는, 영국 정부가 종교 자유 명목으로 영국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차별한다고 볼 멘 소리를 낸 바 있다. (텔레그래프, 가디언, 에클레시아 UK)

몇몇 종교 관련 언론은 이 정황에서 윌리암스 대주교의 부활절 서신은 이러한 보수파 교회 지도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공한 폭력에 비하면, 교회 지도자들이 편안한 처지에서 걱정하고 불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영국 내 보수파들의 엄살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니 그리 깊이 연결지을 일은 아니다 싶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부활절 서신

복음서 기자 성 요한이 들려주는 바로는, 부활 첫날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요한 20:19). 성 요한은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결코 쉽거나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다양한 상황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가공할 집단적 폭력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몇 주간에 걸쳐서 나이지리아 모술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대량 살육과 위협, 이집트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공격, 그리고 짐바브웨 정권이 계속 자행하는 성공회 여러 교회에 대한 탄압 등이 그 사례입니다. 엘 살바도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30주기를 맞는 이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와 공포의 세계 속에서 결코 안전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로메로 대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는 권력자들이 그 특권을 내려놓고 자신이 세상을 섬기는 종에 불과한 것을 깨달아야 하고, 가난한 자들이 들어 올려져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주님이신 예수의 부활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가 일어선 것은 그 세계에서는 죽음이 그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죽음, 안전의 죽음, 그리고 육체적 죽음 마저도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부활 첫날, 새로운 창조의 첫날,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에덴 동산을 걸으시며, 우리의 새로운 경험과 가능성이 담긴 세계 전체를 새롭게 짓기 시작하십니다. 이 제 2의 아담은 십자가라는 나무와 새로운 삶, 자유, 용서에 대한 약속 아래서 깨어나 전체 인류 세계로 나갑니다.

어떤 두려움이 팽만한 곳에서는 이러한 약속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기꺼이 그리스도인으로 확신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 사건이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권력과 폭력을 넘어섬을 드러내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예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증언하다가 고통당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변화시키며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힘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순교자는 이를 알고 자신의 눈을 이 기쁜 전망에 맞춥니다.

좀 더 편안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두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 매일의 삶 속에서 생명의 위협과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기도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직접 연락하면서 우리의 정부 기관과 언론들에 이러한 사실을 되새겨 주는 일들로 계속해서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이 결코 외롭지 않으며 잊지 않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안하고 상대적으로 평온한 사회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에만 신경 쓰기 쉽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고도 분명하게, 그러나 분노와 두려움이 없이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분이 구원하시러 오신 이 그분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믿는 바를 그대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세계는 두려움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희망과 기쁨으로 구원받습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고백자들이 보여준 이 기쁨의 기적은 예수의 복음에 대한 확고한 증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이 기쁨을 서로 주고받고 나누어야 합니다. 하늘은 어둡고 불확실한 것만 같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권위는 예수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미래는 바로 그의 상처 난 손에 자리합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04

“화해를 위한 기도 요청”

Tuesday, March 10th, 2009

일전에 교회에서 내는 최소한의 성명서에 대해 운운했는데, 때마침 이메일로 “기도 요청”을 호소하는 글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 교회가 냈던 여느 성명서들과는 다른 시각과 맛과 호소력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언급하면서도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거니와, 단문들에, 넘치지 않는 은유와 수사가 적절해 보인다.

참으로 다행이라 보는 건, 남북 화해에 대한 응시가 예전의 낭만적인 통일 운동의 시각을 많이 벗어났다는 인상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화해의 문제가 여전히 큰 화두다. 남과 북이 한 혈육이요, 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은 이 통일지상주의의 “뒷구녕”에서 남과 북은 독재를 일삼았다. 압제자는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정치의 거름으로 삼으니, 최근의 남북 대결 양상은 양쪽에 있는 두 사회가 한줌 밖에 안되는 지배 세력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뻔한 책략에서 비롯했다. (이런 점에서 반목과 질시를 에너지로 삼아 분열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의 화해는 더이상 어떤 압제의 핑계를 만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요 출발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이 화해의 문제는 우리 “남한” 사회, 그리고 우리 교계 안에 더 큰 화두로 남아 있다.)

스스로 참회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며, 좀더 너그러운 신앙과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자는 주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생각을 깊이하자는 이 호소는 아직 성글지만, 이 사순절에 참 반가운 격문이다.

그런데, 이 격문을 어디에다 붙였나? 유통의 방법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성직자들에게만 이메일 “한방”으로 던지고는 말았다. 교회 주보에 싣든지, 웹사이트에 싣든지, 아니면 미사 때마다 드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의 형식을 빌도록, 좀 친절했었으면 싶다. 고마운 마음에 던지는 투정이다.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안 좋아서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했는데, 그게 좋아질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맘몬적 경제 논리로만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 보니, 그것과 맞물려 있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 주권 재민의 문제, 생존권, 역사, 교육, 인권, 언론의 문제, 공정성, 국가폭력, 생명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개발독재의 야만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야만의 잔재들을 문신으로 새긴 천박한 폭력적 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개발독재의 망령이 국토 개조란 허망한 이름으로 이 강토와 생명을 향해 폭행을 가하고 있습니다. 맘몬에게 얼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와 생명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는 멀어지고 갈등이 깊어갑니다. 한때 개선되었던 남북관계가 대결 상황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암울했던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일그러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생애 처음 광야에서 맘몬의 손짓을 물리친 서른 살 청년 예수를 생각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교회)는 그 맘몬의 손짓을 현실론과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의 삶의 자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맘몬이 던져놓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현실론의 올가미에 걸려들자마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뒷전으로 밀쳐놓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원죄이며, 우리(교회)가 안고 가야 할 시대의 고통입니다.

맘몬주의가 세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곧바로 평화의 문제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평화가 한없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었던 화해의 분위기가 와해되는 상황을 목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를 위해 부르셨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도의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지금까지의 죄책에 대한 고백과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 자유의 근본적인 가치를 불편해 했던 이기심과 안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에 기초한 맘몬주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먼저 남쪽 내부에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화해 이전에 남쪽 내부에 오래도록 얽힌 증오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남쪽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귀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생각의 차이를 담아 들을 수 있는 신학, 신앙적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편향도 담아내는 큰 그릇(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넷째, 생명의 문제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상에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2009년 3월 10일

TOPIK

대한성공회 평화통일선교특별위원회

두려워 말라… 마리아, 예수, 머튼, 본회퍼

Wednesday, December 31st, 2008

“두려워 하지 마라.”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전하며 그렇게 말을 뗐다. 마리아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태어난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첫 아침에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마라.”

이 전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핵심 사건인 성육신과 부활에 자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일에서 시작되어 완성되고, 다시 시작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다시 그의 자궁에 품은 예수에게서 다시 제자에게로 돌아가는 일은, 제자된 우리가 이제 우리의 몸 속에 예수를 담는 마리아인 것을 상기시킨다. 제자된 우리는 현재를 사는 마리아이다.

가끔씩 잊고 살거나, 아니 이를 아예 잊고 싶어할 때, 신앙의 위인들은 자신이 겪은 두려움 속에서 이 전언을 다시 새겨듣고는, 우리에게 합장하며 그 겸손한 죽비를 내려치곤 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맞는 이 시간에 두 분의 글을 떠올려 옮겨 놓는다. 토마스 머튼의 기도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시이다. 어깨 시큰하도록 맞고 싶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기도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 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제 자신을 알 수 없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제가 그리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갈망이 실제로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걸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그 갈망을 갖길 희망합니다. 그 갈망에서 벗어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스스로 희망합니다. 그리할 때, 제 비록 아무 것도 알지 못해도, 주님께서 옳은 길로 이끄실 것을 압니다.

그러니 죽음의 어둠 속에서 갈 곳을 잃어 헤맬 지라도 주님을 항상 신뢰하렵니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험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테니까요.

in Thoughts in Solitude

본회퍼(Dietrich Bonheoffer, 1906-1945)의 기도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게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갇힌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침착하고 활기있고 단호하다고 한다.
자기 집을 나서는 주인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간수들에게 말할 때
자유롭고, 친절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한 말하기를
내가 불운의 날들을 견디어 내면서도
한결같이 웃음을 짓고, 당당하다고 한다.
늘 승리하는 사람처럼.

글쎄,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쉬지 않고 갈망하며 병든,
누군가의 손이 내 목을 조르는 듯이 숨 가빠하는,
다채로운 색깔과 꽃과 새 소리를 그리워하는,
친절한 말들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목말라 하는,
큰 사건에 대한 기대로 몸부림치는,
멀리 떨어진 친구들에 대한 염려로 힘없이 마음 졸이는,
기도와 생각과 일마저도 지치고 공허해진,
약해져서 그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할 준비가 된,
(그런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

(1944년 옥중 어느날 – 1946년 3월 4일 발표)

* 역주: 원 독일어의 영역에서 중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