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서평: 디아메드 맥컬로흐, 그리스도교 역사: 그 첫 3천년

Tuesday, February 9th, 2010


Book Review: Diamaird MacCulloch, A History of Christianity: 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2009.

By Dr. Rowan Williams, Archbishop of Canterbury

이 책에 붙은 자극적인 부제목은 이 책이 한권의 교재를 넘어서리라는 걸 알려준다. 디어메드 맥클로흐는 많은 역작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유대교 세계와 아울러 고전의 세계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교의 지적, 사회적 배경을 요약하면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놀랍고 새로운 응답을 제공했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로마 종교는 황제 숭배(황제가 군사적인 독재자가 되어 피비린내나는 갈등 뒤에 계속 손을 대면서 더욱 이상해진)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했던 지방의 의식들과 신화들이 쉽지 않은 혼합을 이루게 되었다. 유대교 세계는 유대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생생한 긴장으로 점철됐다.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져 온 것은 새롭게 열린 유대교의 정체성으로서, 어떤 특정한 국가적 장치에서도 독립된 인간의 정체성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정치적인 충성심에 기대지 않고, 서로에게 소속된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상을 창조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재빠르게 정치적 힘을 이용하는 쪽으로 나갔고, 그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맥컬로흐는 회의적인 교회사가를 늘 유혹하는 쇠퇴와 타락이라는 구색만 맞춘 진술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리스도교적인 삶과 신앙의 기본 형태들이 구성된 지극히 다양한 방법들을 추적한다. 엄격한 역사가인 저자는 무성하게 피어나는 음모 이론 – 영지주의자, 막달레나 마리아, 템플 기사단과 같은 환상의 세계 – 를 말끔히 털어낸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시대의 소수파나 분리파가 나름대로 깨인 근대인과 같았다는 요즘의 대중적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자면, 원죄 문제로 어거스틴에 반대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그리 밝고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나온게 아니라, 인간의 경험의 빛과 어둠에 대해서 별 여지를 두지 않았던 극히 혹독한 도덕성에 기초한 것으로, 우리가 부르는 자유와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맥컬로흐가 어거스틴을 다룬 부분은 이 책의 탁월함을 말해주는 한 예일 뿐이다. 저자는 공정하고, 놀랍도록 넓은 식견을 드러내지만, 무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게다가 저자는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전문적인 문헌에 아주 정통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동진 확장과 중앙 아시아 교회들의 비참한 역사에 관한 부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가 되지 않은 처지를 생각할 때,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하다. 그 밖에 뛰어난 부분이 여럿이다. 유럽 그리스도교의 선교(저자는 인도에서 그 정치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실행한 개신교의 선교적 노력은 “최대의 실패”라고 기술한다)가 이룬 성과와 한계를 다루는 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 제국 경계 지역에 있었던 개신교, 천주교, 정교회의,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 그리고 칼빈의 독보적인 유산, 즉 기존 제도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황 교회를 옹호했던 이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성서적, 전통적인 자료에 기반하여 보편적(Catholic) 신앙을 새롭게 상상하려 했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잃어버린 세계와, 반짝했다 사라진 가능성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13세기 중국의 그리스도교 제국, 16세기 폴란드의 유니테리안 공국뿐만 아니라, 중앙 아메리카 이슬람 공화국(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기 튜더 왕조와 모로코 사이에 마련된 협력안으로 단명으로 끝난 제안) 등이 그 예이다. 맥컬로흐는 지적이면서도 당연히 필연적으로 일어난 발전을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돕는 역사학자의 몫을 해내고 있다 (특히 이 점에서 교황제를 다룬 부분이 뛰어나다). 저자는 또 이렇게 상실된 가능성들이 필연이었었음을 명백히 한다. 그 사라진 이유는 교회 내의 갈등과 식민주의 그리스도교 권력의 개입이었다. 저자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용할 줄 알지만, 어떤 신학적인 제안도 없이 이에 집착하는 여느 역사가들과는 다르다.

세부적인 면에서 몇가지 실수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주교가 쓴 주교관(mitre)은 로마의 공적인 예복에서 나온 게 아니라, 중세 교황이 머리에 쓰던 것들을 변용한 것이다. 흑사병이란 명칭 자체는 언급한 때보다 몇 세기 후에 사용되었다. 또 어쩔 수 없이 몇가지 틈도 보인다. 폭군 이반 대제(Ivan the Terrible) 재임기에 관한 아주 훌륭한 설명 속에서도, 짜르의 포악함을 비판했다가 죽임을 당한 모스크바의 필립 총대주교에 대한 언급과, 흔히들 이야기하는 바와는 달리 동방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늘 무관심하지만은 않았던 여러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렘브란트를 최고의 개신교 성서 주석가라 말한다면, 저자의 방향에 좀더 머리를 끄덕일 만한 여지가 있을 뻔했다. 다시 말해, 단테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많지 않지만 상투적인 교재 냄새가 나는 부분도 있다. 맥컬로흐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가 말하는 “자기 충만한 신적 존재”와 프란시스 성인의 인격적인 하느님을 비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철학적이면서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면을 함께 추구하려고 했으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은 상상력과 영성을 통하여 신앙의 이러한 면모들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성공적인 성과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 분야의 획기적인 저작이다. 그 범위의 섭렵이 놀랍고, 읽기 쉽거니와, 물릴대로 물린 전문가에게는 통찰을,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에게는 해명을 제공할 것이다. 영어권에는 이에 맞설 만한 책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분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풀려 나간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도 그리 광범위하지도 않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이 책은 놀랍도록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활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중대한 증언이다. 그 첫 삼천년은 또한 마지막이 될 것 같지 않다.

저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Guardian, 23th September, 2009

번역 교정: 2009년 9월 24일 / 26일
위치: http://liturgy.skhcafe.org

캔터베리 대주교, 교회 일치 강연 전문 – 일러두기

Saturday, November 21st, 2009

지난 10월 천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그리고 [사도 헌장] 본문 발표 이후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의 전문을 번역했다. 그 참에 그와 관련해서 적거나 번역했던 내용을 취합해서 교회에 돌렸다.

아래 내용은 첨부한 내용의 일러두기 내용이다. 간단한 배경 설명과 강연 요약, 그리고 번역문에 대한 몇가지 유의 사항을 적었다. 첨부 파일에는 이전에 올렸던 글들도 모아서 전반적인 이해를 높히도록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강연은 교회 일치의 교회론적 토대를 매우 아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그에 바탕하여 교회 일치에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 일러두기 내용 (아래 본문)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 강연 내용 요약

  • 번역에 대하여

  • 용어 해설
  • 인용 및 배포

@ 첨부 문서 내용 (아래에서 pdf 다운로드)

  • 캔터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 주낙현 신부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논평 –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2009년 10월 19일 천주교 교황청 신앙과 교리 성성은,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들이 천주교로 들어오고자 할 때,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특별 관리 교구를 만들도록 하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 전례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번 조처는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이 지난 몇년 동안 요청해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조처를 담은 [사도 헌장]은 근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고, 2009년 11월 4일 “ANGLICANORUM COETIBUS”라는 제목의 교황령 [사도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이 조처를 발표하기 2주 전에야 이와 관련 사실을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 전달했습니다. 발표 당일인 10월 19일 영국 천주교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발표에 관한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 기자 회견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발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갑작스러운 발표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기자 회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조치가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처 발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이미 제가 10월 21일 관구 게시판에 올린 글과, 11월 1일자 [성공회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제 개인 블로그인 http://viamedia.or.kr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 첨부)

한편,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는 이 교황청 조처에 대한 논평을 짧게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이 조처가 양 교회 간에 있었던 교회 일치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 성과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조처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주교 신자일 뿐이고, 이 조처가 교회 일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평은 관구게시판과 서울교구 성직자 카페, 그리고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게시했습니다. http://liturgy.skhcafe.org (이 문서에 첨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한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미 계획에 잡혀 있던 대로, 로마에 방문하고 강연을 했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와도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 앞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요한네스 빌레브란트 추기경(교황청 교회 일치 평의회 초대 의장, 1909-2006)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11월 20일)에 초대받아, 교회 일치의 신학적 주제와 도전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여기서 교황청 [사도 헌장]의 파장에 즈음하여, 교회 일치 대화의 방법론을 재정리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주제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은 성공회의 주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 동안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교회 일치 대화 문서의 정신과 그 신학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최근 천주교의 행태들과 조처들이 그간 스스로 참여했던 교회 일치 대화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최소한 이와는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강연 내용 요약

위에 말한대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강연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등이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와 그 문서들을 되짚으며, 교회 일치 대화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발전시켰던 교회론(Ecumenical Ecclesiology)을 되새긴 다음, 교회 일치 대화에서 논란이 되는 몇가지 주제들,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교회론에 바탕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난 40여년 동안 그리스도교계는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어떤 수렴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교회는 하나인 이중적인 선교적 전망,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communion), 그리고 이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친교를 지니고 있다. 교회 일치 대화와 실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교회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2. 특히, 선교를 위해 일치된 교회를 향한 지난 40여 년의 대화 속에서 볼 때, 이 교회 일치의 선교적 교회론에 따라서,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식별해야 한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합의해 놓고서, 부차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타당한 일인가?

3. 이 점에서 세가지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권위의 문제(교도권, magisterium)), 수위권(primacy), 그리고 지역 교회(local church)와 보편 교회(universal/catholic Church)의 관계이다. 거듭하거니와, 이 신학적 주제들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가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의 어떤 합의 원칙에 바탕하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4. 권위의 문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를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적인 친교를 지탱하기 위한 책임이 바로 권위의 근간이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상호 협력으로서만 권위가 설 수 있다. 규율적, 위계주의는 권위가 아니다.

5. 수위권 문제: 수위권 문제는 교회 일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나 함께 친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룰 때, 수위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열린다. 한편 교황청의 [사도 헌장]에 말한 조치는,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배려한 사목적인 조치일 뿐, 교회론적인 근거는 없다.

6.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 교회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거룩함 속에서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를 나누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자체로 보편 교회를 담고 있다. 지역 교회의 어떤 결정, 예를 들어 여성 성직에 관한 결정은 바로 이 세례받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의 거룩함이라는 전망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역적 결정이지만, 역시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다. 최소한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은 교회론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의 성과와 원칙을 지역적으로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성 주교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를 훼손한 적이 있는가?

7. 불일치 속에서 갖는 일치에 대한 전망: 지난 40여 년 일치 대화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신학적 원칙을 되새기며 여기에 자신을 내어 놓고 성찰해야 한다. 다시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원칙들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모순된 일이다. 그간의 대화에서 확인한 영적이고 성사적인 전망이 가져다 주는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번역에 대하여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들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영어가 평이하지 않으니 우리말 번역이 힘겹습니다. 이번 강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의 한계도 분명한 터라, 옮기는 과정에서 곤란이 겹쳤습니다. 몇가지를 머리에 담아 번역했습니다.

우선 직역을 강조했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경계는 없고, 정확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만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자체에 담긴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우리말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능력의 한계(우리말/영어)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들은 풀어쓰거나 의역했습니다. 또한 이미 통용되는 번역어 가운데 잘못 번역되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썼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깊은 뜻들이 왜곡되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우선은 독자들에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오역이나 잘못된 표현은 지적해 주십시오.

용어 해설

번역어로 사용된 몇가지 용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입니다.

천주교: Roman Catholic Church 에 대한 우리말은 ‘천주교’이니 모든 “Roman 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단어는 ‘천주교’로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이라는 용어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우리말 음차로 쓰는 ‘가톨릭’은 catholic 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디에서든 ‘catholic church’는 “(Roman) Catholic Church”와 대비되어, ‘보편 교회’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은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쓸 말이 아닙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뜻으로 쓰입니다. 이 표기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서 한 적이 있으니 참조할 수 있습니다.

자녀됨을 통한 공동의 거룩함: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거듭되는 말입니다. filial and communal holiness 등의 표현을 우선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친교 / 친교적 공동체: 이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친교’라는 말은 ‘communion’의 번역말입니다. 그저 ‘코뮤니온’ 혹은 원어를 따서 ‘코뮤니오’로 쓸까 했지만, 친교로 정했습니다. 좀더 설명이 깃든 번역어라면 ‘친교의 공동체’ 혹은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면 좋겠으나, 어수선해 보여서 그리 했으니, ‘친교의 공동체’ 쯤으로 읽어 주십시오.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교회론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라는 말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와 함께 쓰여, 삶의 맥락에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지역 교회’는 개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혹은 관구 같은 개별 교회의 지역적 연합을 가리킵니다.

인용 및 배포

이 번역문은 주낙현 신부의 사적인 공부와 성공회 성직자 및 신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원저자 및 번역자의 허락 없이 내용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인용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또한 번역문 위치 링크 이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배포하지 말아 주십시오.

PDF 다운로드 연결: 
http://bit.ly/8hHPxj
ABC_R_Williams_on_Ecumenism_Rome_2009.pdf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Wednesday,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