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성찬례 – 죽음의 권력과 생명의 힘 사이

Wednesday, May 11th, 2011

종교개혁은 간단히 말해서 두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16세기에는 평화기가 10년이 채 안 됐고, 17세기 중반까지 고작 2-3년이 평화기였다… 종교개혁은 이미 자라나고 있던 국가라는 권력 기계를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의 옷을 입혀 그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개신교 종교개혁과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이어진 전쟁 속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교회사학자 디어메드 맥컬로흐가 그의 저작 <<종교개혁>> 막바지에서 종교개혁기의 사회적 갈등에 관하여 내린 평가 한 부분이다. 거의 두 세기에 걸친 무참한 희생을 겪고 나서야 유럽은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지혜에 다다랐다.

‘교리’를 내세운 진리 소유 여부로 복잡다단한 삶의 결을 잘라내려는 무모함이 늘 문제였다.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의 한 장을 덮으려 할 때, 그 무모함이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함부로 누구를 발길질하고 억누르고 목숨을 빼앗는 소식을 듣는다. 강제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역사를 마주한 여러 시선에서 나온 그림과 사진을 본다. 특히 성찬례는 이 진리를 둘러싼 갈등 한가운데 있기 일쑤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전례인 성찬례가 어찌하여 그 죽음에만 집착해 있었을까?

이단자 화형 Burning of a Heretic – Sassetta (약 1430-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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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제대에서는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다. 축성된 성체 거양의 순간이다. 중세 성찬례 신학의 절정이다. 신앙은 거양된 성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단자’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발밑에서 불이 붙었건만 그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 아래서 얼굴 없는 이는 죽음을 지핀다.

죽음을 끝장내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선사하는 성찬례가 교리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진리 판정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타인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중세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기 내내 지속한 일이다.

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 Caravaggio
(약 159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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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이자 복음서 기자로 알려진 성 마태오의 최후를 그린 그림이다. 그는 성찬례를 집전하는 도중에 에티오피아 왕의 명령으로 살해 당한다. 제대 앞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진 마태오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고, 곁에서 복사를 서던 아이의 입은 그 광경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살인자는 천사를 향한 마태오의 간절한 손은 저지하고, 그 오른손은 이제 마지막 철퇴를 준비하고 있다. 화가는 십 수세기를 넘어 그 사건을 당대의 미사 장면으로 재현했다. 그 안에서 카라바지오 자신은 멀리서 그 참혹한 장면을 무심하게 목격한다.

화가의 목격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그림(Sassetta)에 비추면, 두 제대(altar)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나는 권력자들이 소유한 제대이며 죽임을 행사하는 힘의 제대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사제와 어린 복사가 모인 조촐하고 힘 없는 제대이다. 카라바지오는 이단 화형의 중심이 되었던 제대를,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의 제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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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의 “성 마태오의 순교”는 1980년 봄에 있었던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겹친다. 16/7세기라는 당대의 눈으로 1세기 순교 현장을 돌아봤던 화가는 현대에 살아 카메라 렌즈로 로메로의 죽음을 잡아내는 것일까. 화가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할까?

엠마오 만찬 Supper at Emmaus – Caravaggio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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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대속'(atonement)으로 보면서, 죽음 자체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를 의식이나 한 듯, 카라바지오는 이제 성찬례를 친히 세우신 예수를 그려낸다. 이 성찬례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엠마오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와 나눈 식사이다. 죽음이 아닌, 부활의 생명이 더욱 선연하다. 낯선 나그네를 만나 허물 없이 대화하고, 한사코 묵고 가라고 초대해서 마련된 식사이다. 이 대화와 초대가 마련한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깨달음으로 놀란다. 그 식탁은 기름지고 풍성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손은 캔버스를 튀어나와 우리에게 닿으려 한다.

오늘 성찬례는 무엇인가?

별난 “성찬기도”

Monday, March 21st, 2011

힘없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 별난 이들을 위한 성찬기도

Eucharistic Prayer for the Powerless, the Oppressed, the Unusual

매릴린 맥코드 애덤스 (영국 성공회 사제, 신학자)

(대화)

+ 우리 하느님께서 여기 계시니
#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그대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마음을 엽니다.
+ 우리의 벗이요 우리의 사랑인 하느님을 만나러 여기에 모였으니
#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좋은 일입니다.
+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벗 된 이들과 하느님을 먹였던 이들과 하느님과 논쟁했던 이들과 하느님을 어루만진 이들과 하느님에게 화난 이들과 하느님의 얼굴을 본 이들과 오직 자기 방식대로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느님을 떠났던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다함께)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며, 연약하신 하느님
사랑과 기쁨의 하느님
하늘과 땅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니,
우리와 늘 함께 하소서
우리 하느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집전자)

힘없는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과 별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에 우리가 찬미하나이다.

주님의 성령꼐서는 깊은 곳을 뒤엎으시는 바람을 내시고
주님의 말씀은 혼동을 창조 세계로 만드셨으니,
주님께서 이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주님 백성으로 만드시고 하느님 백성이라는 이름을 주시어
이름 없는 이들을 특별한 이들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도 살 수 있도록 가르치셨으며,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만나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바위를 깨뜨려 물을 내시어 우리의 목마름을 축이시고
놀랍게도 주님의 지극한 신뢰를 우리에게 거듭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땅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그 공간 속에서 모든 이들이 함께 성장하고 펼쳐서 창조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아버지 같은 이끄심과 어머니 같은 가르침을
포로가 된 이들과 낯선 이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시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병든 이들과 노인들을 찾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사실을 잊고
다른 나라들처럼 모진 마음을 품고
우리 자신의 편의만을 위하여 세계를 조직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 위에 군림했으며
부족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더러운 이들이라며 배척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배신자로 배척당했습니다.
포로가 되고 고생할 때는 잠시 깨달았으나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역은 주님의 꿈을 이길 수 없었으니
주님께서는 배척당한 자로, 불법체류자로, 쫓겨난 자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와 피 흘리는 여인을 어루만지셨으며,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창녀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치시고, 절망에 싸인 이들을 가르치셨으며
불안하도록 부족한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고.
동서남북의 모든 이들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주님의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드십시오. 이는 그대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실천하십시오.
식사 후에, 주님께서는 잔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 모두는 이를 받아 드십시오. 이는 새로운 언약의 내 피이니,
그대들과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것입니다.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실천하십시오.

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 속에서,
주님의 벗인 우리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담대한 새 삶인 주님의 부활을 소리 높여 외치니,
고우신 예수님, 오시어 우리 얼굴을 마주하며 껴안아 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난 선물인 이 빵과 포도주로 식탁을 마련하니
이것은 모두 우리와 살다가 에이즈로 죽어간 우리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만들어낸 실망과 실패이며,
우리가 고통받은 상처들이며, 우리가 만들어낸 슬픔입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이것들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이며,
주님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세계 안에 있는 주님의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거룩한 가족을 기억하시며, 특별히 이 교회를 기억하소서.
영사기가 멈춘 이곳을 주님을 향한 찬미로 채운 그 설립자들입니다.
용감한 필리핀 사람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이 새로운 땅을 시작했으며,
게이와 레즈비언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으며,
교회에서 상처받고 쫓겨난 별난 이들이
주님의 입맞춤이 주는 힘과 주님 사랑의 힘을 찾았습니다.

우리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성인과 연대하게 하시고
우리를 내보내시어
다른 사람들을 도와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와 도시와 이 지구를 변화시키시어
주님의 사랑처럼 넓고 깊은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아멘.

Marilyn McCord Adams, “Eucharistic Prayer for the Powerless, the Oppressed, the Unusual” [Eucharistic prayer] —Equal Rites: Lesbian and Gay Worship, Ceremonies, and Celebrations, ed. Kittredge Cherry and Zalmon Sherwoo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5), 111–113.

(번역: 주낙현 신부)

성사: 나눔으로 거룩한 일, 혹은 생명의 상상력

Monday, February 21st, 2011

1. 십몇 년 전 신학교의 교실 풍경 하나

교수 신부님은 뜬금없이 “성사(聖事: sacrament)란 무엇이오?”하고 물으셨다. 무슨 맥락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단답형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들에 혀를 차시던 그분은 옆자리로 연이어 한사람씩 물으셨다. 어느 동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거룩한(聖) 일(事)’입니다.” 신부님은 한숨을 몰아 쉬셨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광경에 나 자신도 당황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작정하신 듯 차례로 물어보시던 신부님은 내 차례가 되자 건너뛰어서 다른 학생에게 물으셨다. 아직도 그때 왜 나를 건너뛰셨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국 유학 중이던 외국인 부제님이 대답했다. “성사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수 신부님이 바라던 모범 답안이었다. 너무나 쉬운 개념 정의를 모르던 학생들을 탓해야 했을까? 실제로 이 답을 모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맥락을 설명하지 않았던 문제는 없었을까? 여러 생각을 모아서 개념과 정의로 이끌어줘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마저 그때 스스로 겪었던 당황을 변명하는 것일까?

2. 성사는 나눔으로써 ‘거룩한 일’

오늘 주일 성서 정과의 말씀에는 기쁘도록 복된 말씀이 넘친다.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레위 19:1-2,9-18). 놀랍게도, 하느님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었던 뱀의 속임수가 아니었던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늘 레위기 본문과 창세기 해당 본문의 큰 차이는 ‘독점’과 ‘공유’에 있다고 보인다. 에덴동산 타락 사건은 하느님의 ‘위치와 능력’을 탐내어, 손대지 말아야 할 공유의 영역을 사유화한 문제이다. 반면, 레위기에 나온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한 보호와 배려, 그리고 힘있는 이들을 향한 공정한 재판이라는 실천 목록과 잇닿아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좀 더 확장하신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38-48). 이 말씀 역시 보복이 아닌 용서, 보호가 필요한 이들과 동행, 형편이 궁한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과 잇닿아 있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펼치신 구원 사건의 목표였다.

성찬례는 이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당신 몸까지 내어주신다. 이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 먹는다. 4세기의 성찬례 집전 사제는 영성체에 신자들을 이렇게 초대했다. “거룩한 사람을 위한 거룩한 것입니다.”

3. ‘어머니인 교회’ – 생명을 위한 상상력

중세의 마리아 숭배가 한 극단이었다면, 종교개혁의 마리아 배척은 또 다른 극단이었다. 교부들의 신앙 속에서 마리아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표상된다. 이 표상은 교리적인 ‘동정녀’나 ‘어머니’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낳아 기르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tokos)라 과감히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만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것은 거룩한 변화의 과정이며, ‘거룩한 일’이다.

성 어거스틴의 강론 한 대목을 듣는다.

거룩하신 마리아, 복되신 마리아. 그러나 교회는 그분보다 더 큽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지체입니다. 다만, 고귀하고 탁월한 –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 지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전체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몸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지체인 그분보다 큽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머리와 몸이 함께 전체 그리스도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역시, 제가 말하고 있는 그대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누가 그대들을 낳았습니까?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마리아처럼, 교회는 어머니요, 동정녀입니다. 교회가 어머니인 증거는 바로 그대들입니다. 그대들을 낳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 몸에서 낳은 이를 그들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그 사건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이미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됩니다… 이 세례의 목욕탕에 있는 그대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St. Augustine, Sermon 25

4. 거룩한 실천

여기에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을 넘어선 구원 사건이 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우리는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 성찬례는 그 거룩한 변화(성변화, transubstantiation)의 본질을 말해준다(이 용어를 교리적 논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부름받은 교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 여기에 성사인 교회가 있고, 교회의 선교가 있다. 그 실천 속에서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대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 세상의 질서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이 있다. 이 실천이 ‘거룩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