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평화를 다짐하는 교회

Sunday, June 25th, 2017
james-ensor-entry-of-christ-into-brussels-18881.jpg
(제임스 엔서, “1889년 예수님의 브뤼셀 입성” – 1888년)

하느님의 평화를 다짐하는 교회 (마태 10:24-39)

우리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6.25’라는 그늘과 상처는 어둡고 쓰라립니다. 마음의 그늘은 우리 마음에 어두운 눈을 만들어 걸핏하면 미움의 시선을 주고받게 합니다. 육체가 겪은 상처와 흔적은 쓰라린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성난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감정의 상흔은 냉철하게 역사를 보는 눈을 가립니다.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자와 피해자였던 역사의 사실은 종종 잊혀집니다. 이 잔혹한 전쟁놀음을 만들었던 소수의 정치 권력자들의 책임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가리려고 아직도 불화를 부추기고 긴장감과 적대감을 조성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러 오십니다. 자기 멋대로 부리는 세상 정치권력의 역사를 그치고, 하느님의 평화를 선사하시려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세상이 만든 ‘거짓 평화’를 이겨내어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로 바꾸려는 행동입니다. 세상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선택은 현실성이 없고 힘도 없고 희망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과 ‘주인’으로서 희망의 길을 몸소 걸으며 보여주십니다.

‘스승만해지고 주인만해지는 삶’은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 충실히 배우지 않고, 다른 종교에서 유행하는 사조와 방식을 함부로 끌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전통에서 깊이 길어 올리지 않고, 지금 성공을 과시하는 다른 일들에 성급하게 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교회 전통에서 배우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보기에 탐스러운 유혹은 강렬하지만, 짧고 허망합니다. 묵고 바랜 듯한 진실은 고되고 오랜 인내의 훈련으로만 빛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남을 빌어 자기 스승을 금세 넘을 요량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그대로 본떠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그리스도를 닮아 만든 몸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교회 전통이 마련한 훈련법에 따라, 동료 신앙인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겹쳐 사는 삶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의 삶을 마련해 줍니다(로마서 6:1-11). 이 신앙이 세상의 권력자가 만든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이 펼치시는 역사의 진실을 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훈련한 눈과 손길만이 권력자가 만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줍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평화’를 물리치고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려고 분투합니다. 생명을 빼앗는 권력의 칼에 맞서, 썩고 병든 곳을 도려내어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칼을 사용합니다. 그 모습이 종종 거칠고 서로 맞서는 일이더라도,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려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역사는 어느 길을 걷고 있나요? 역사의 상흔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힘은 세상인가요, 하느님인가요? 우리는 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평화를 선택하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이니까요.

성 목요일 – 더럽고 배고프고 발가벗겨지는 신앙

Thursday, April 13th, 2017

Maundy-Thursday.jpg

부활-성삼일 성 목요일 전례 강론

요한 13:1-17, 31b-35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성목요일 세족례 및 성체제정 기념 성찬례
2017년 4월 13일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인생아 기억하라, 흙에서 돌아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지난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되새겨 보면,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사순절의 발원이요 본뜻입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옛 수도자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인사하면서, 우리가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는 사실을 늘 되새겼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옛것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이 새로 태어나려고 환영해야 할 죽음입니다. 나아가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을 새롭게 살리려는 죽음입니다. ‘나와 우리’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그 기쁨으로 이제는 다른 사람까지 새롭게 살리는 일이 오늘 성 목요일의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성목요일부터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열어주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간을 다 모아 수렵하고,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운 일을 싹틔우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왔던 모든 땀과 수고의 사건이 오늘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 인생의 온갖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 우리 삶의 시간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노동과 수고의 세월 속에서 두터워진 우리의 손등 위에, 조금씩 늘어지고 피부와 깊어지는 주름살 사이에, 종종 피곤함에 말라서 갈라지고 터지며 딱딱해지고 일그러진 우리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우리 삶의 웃음과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쌓인 세월의 시간을 모두 껴안으시며, 우리를 새로운 삶의 공간과 시간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피곤하다 못하여 더럽고 뭉툭한 발을 씻어주시는 세족례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한낮의 분주한 노동과 수고, 갈등과 방황에 지치고 목마른 우리 앞에 가장 귀한 저녁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초대받은 세족과 마지막 만찬 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혁명적인 변화를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이 하던 일을 주인의 일로 바꾸셨습니다. 말로만 그리하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당신의 행동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행동의 바통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시며, 이처럼 살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겸손한 섬김을 향한 단단한 분부가 성 목요일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성목요일에 해당하는 영어 “몬디 서스데이” Maundy Thursday는 ‘분부와 명령’ mandatum 의 목요일이라는 뜻입니다.이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삶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요한 13:8).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세상을 섬기러 온 사명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며 이를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하시며 분부하십니다.

여기 눈여겨 살피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은 “이 일을 행하라”하신 말씀입니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성찬례를 두고 논쟁이 격하였고, 그 해석에 따라 서로 정죄하고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이다”하는 말에만 사로잡혀 교리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떻게 떡이나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웁니다. 자기 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기네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고 법으로 못 박아 두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말뜻을 제멋대로 듣고, 보고 들어야 할 부분은 허투루 생각한 처사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깊이 하신 말씀,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러면 성 목요일의 정신을 배신하고 맙니다.

성 목요일의 전례는 주님의 삶 마지막 단계에서 보여주신 섬김과 나눔의 행동을, 우리 신자들이 우리 삶과 생활로 옮기라는 부탁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달라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여 모인 우리는 겸손히 섬기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행동을 오늘 전례에서 몸으로 훈련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전례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 섬김과 나눔의 뜻과 삶을 몸으로 익히는 일입니다. 전례는 이 신앙을 몸에 배도록 수련하는 일입니다. 그 수련에서 마음과 행동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질 때, 이를 영성이라고 합니다. 성삼일은 전례를 통한 영성 수련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성 목요일 전례의 마지막 순서는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입니다. 제대보를 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겼던 알몸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몸이 벗겨진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광경을 목도하는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발가벗겨야 합니다. 우리 몸에도 숨겨진 아픈 상처와 세월의 흉터가 고스란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불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때라야 성 목요일의 분부를 무시하고 살았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제야 화려한 명예와 권력과 욕심으로 가린 우리 마음과 몸에서 예수님의 세족과 성찬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납니다.

이제 여러분의 발을 씻을 터이니, 그 발로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이미 온몸이 깨끗해진 여러분의 발만은 이 세상의 어둠과 더러움을 몸으로 겪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로 다시 더러워져야 합니다. 깨끗한 발을 지키는 일이 신앙이 아닙니다. 다시 씻으시고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신뢰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삶을 따르며, 흙먼지 묻고 땀냄새나고, 갈라지고 비틀리도록 우리 발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성당에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피곤한 발을 다시 어루만지시며 씻어주십니다.

이제 주님의 몸과 피를 여러분의 몸에 모실 터이니, 그 밥의 힘으로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몸을 모신 사람이니, 다시 허기지도록 온 힘을 다하여 세상에서 배고파하는 이들과 우는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들과 삶에 감사하는 이들과 더불어 우리 삶의 선물을 축하하십시오. 여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 창조세계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며, 우리는 다시 배고파하고 목말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제대로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를 먹여주시며 우리의 생기를 회복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발가벗은 몸을 기억하며,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이 입은 옷과 가진 선물과 능력으로 세상의 헐벗은 이들을 입히십시오. 그들과 더불어 풍찬노숙하여 같이 이불을 덮고 옷을 나누고, 감춰둔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 슬픔과 절망을 나누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러다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몸이 되어 다시 이 성당에 돌아오십시오. 하느님의 따뜻하고 깊은 숨결이 여러분을 기다리며 감싸 안고 하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러니 부활 성삼일을 걷는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분부하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일들을 행하십시오.”

경계의 파수꾼 – 세례자 요한

Sunday, December 4th, 2016

John_the_Baptist.png

경계의 파수꾼 – 세례자 요한 (마태 3:1-12)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고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로만 구원자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치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향해 온몸을 돌리라고 외칩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여 다음 세대의 길을 열고 닦아주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늘 이어져 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서로 만나 기뻐 반기던 우정입니다. 요한이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자,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예수님도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결하십니다. 이 대결이 만든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문을 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 보여줍니다. 옛 시대가 그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자연스럽게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려고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자기 다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듭니다.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워버립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는 시대의 경계에 선 파수꾼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신앙의 역사 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어른으로 우뚝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