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 사랑의 가정, 평화의 교회

Sunday, May 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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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 사랑의 가정, 평화의 교회 (요한 10:1~10)


유혹은 늘 달콤합니다. 나쁜 소문은 귀에 더 솔깃합니다. 진실을 가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거짓 뉴스는 달콤하고 솔깃합니다. 보통 사람은 기존의 생각과 주장에 도전받기보다는 지지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새로운 도전 속에서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진실한 목소리를 찾습니다. 거친 주장과 혼란한 잡음에 묻힌 희미한 진실에 귀 기울이고, 숨은 듯한 작은 싹을 눈여겨 발견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작고 허름해도 그가 참된 목자이면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목자를 따릅니다. 목자는 온 힘을 다하여 양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진실한 사랑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훈련의 공간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사랑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너무나 가까운 탓에 오히려 가정에서 서로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넘치는 사랑에서 나온 기대와 욕심으로 부모 자녀 사이에서 서로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사랑이 오해에 자리를 넘겨주어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가족이 서로 멀어진 후에야, 오해 아닌 사랑을 깨달을라치면 이미 시간이 늦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기대에 사랑을 묻어버리지 말고, 순간마다 작고 따뜻한 음성으로 서로 길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거친 소음 속에서도 그 작은 사랑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알아듣도록 우리의 마음과 귀를 매일 훈련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목소리를 더 큰 가족 안에서 나누는 평화의 공간입니다.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저마다 지닌 생명의 가치와 선물을 함께 축하하고 격려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니 갈등과 불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는 자신의 주장과 식견이 아니라,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모습에 눈을 돌려서 우리의 길을 걷습니다. 자신과 자기주장을 기준으로 서로 맞서지 않고, 자기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에 눈을 돌려 서로 맞선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 맞춥니다. 참된 목자를 따르는 참된 양의 신앙입니다.

오래 전에 온갖 땀과 수고로 이곳에 세워진 서울주교좌성당은 사랑의 가정이고 평화의 성전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으신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움을 닮으려는 공동체입니다. 니콜라 성인처럼 미래세대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과 세상의 힘없는 사람들을 껴안아 보살피고 선물을 듬뿍 나누려는 손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성인의 염려와 기도와 사랑의 음성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에 더 넘쳐나야 합니다. 보살피며 이끄는 목자 니콜라 성인의 기도와 베풂의 손길이 세상에 더 널리 펼쳐져야 합니다.

126년 전에 설립하여 축성 91년을 맞은 서울주교좌성당은 삭막한 도심에서 꽃과 나무의 생명을 보존하며 겸손하고 너른 품으로 지친 사람을 초대하는 쉼터입니다.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는 세상의 거짓을 넘어 진실을 알아듣고, 미움을 넘어 사랑으로 감싸고, 갈등을 넘어 평화를 만드는 성전입니다.

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Sunday, April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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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루가 24:13-35)

그들은 힘없는 마음을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이야기해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벽은 단단하고 움찔하지 않으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일들이 무너지자 세상이 싫고 사람도 싫고 자기 처지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두 제자는 꿈에 부풀어 올랐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이제 낙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듯이 걸었습니다.

인생을 헤매는 미로에서 새로운 만남이 일어납니다. 길에 동행한 어느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며 과거의 희망과 현재의 절망을 나눕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같이 읽다가 서로 위로 삼아 ‘함께 묵자’고 초대합니다. 같이 빵을 떼고, 잔을 마시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인생에 즐비한 슬픔과 절망의 미로를 헤매는 시간은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하느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정체와 행동을 알았고, 그분이 처형당했다가 살아났다는 증언도 들었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의 체험과 경륜이 길다 해도,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일이 숱합니다. ‘내가 안다, 내가 경험해 봤다’고 너무 자신하면 신앙의 성장을 멉춥니다.

예수님의 동행이 흥미롭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서를 다시 해석하여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방향을 얻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은 눈을 가리는 책더미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성찰과 기도, 열린 대화와 배움으로 마련한 신학이 없는 교회는 신앙의 길을 잃습니다.

제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붙듭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교정받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성서를 다시 가르칠 때 깊이 귀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낯선 사람의 도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곁에 두어 함께 지내고자 합니다. 이 도전과 배움에서 신앙이 열립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환대와 사귐에서 새로운 만남과 깨달음이 열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눕니다. 이 익숙한 광경은 가나의 혼인 잔치, 오천 명을 먹이신 음식 기적과 함께 성 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나눔은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친히 아침상을 마련하신 식사와도 겹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례는 이처럼 서로 기쁨을 주고, 주린 배를 채우며, 사랑과 섬김을 나누며 축하하라는 당부입니다. 절망과 실패, 수고와 땀으로 젖어 지친 이들을 초대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부활의 성찬례 안에서 낯선 이와 대화하고 배울 때 가려진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환대하여 빵을 떼어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닫히고 막힌 가슴이 찢어지고 열립니다. 이 동행의 성찬례의 사귐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이 되살아 납니다.

[전례력 연재] 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Saturday, April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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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공회는 전례적 교회로서 교회력(전례력)을 성실하게 지킨다. 교회력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우리 일상의 시간에 고스란히 겹치려는 장치이다. 몸과 마음, 시간과 생활의 리듬이 되도록 하라는 부탁이다. 전례의 여러 상징도 새로운 삶을 돕는다.

부활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하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열렸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분기점,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 신앙 식별의 잣대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이 새로운 시간을 강조하려고 고대 신앙인들은 흥미로운 숫자 놀이를 했다. 창조의 시간인 ‘칠’(7)에 하나를 덧붙여 ‘팔’(8)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옛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새 창조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부활일은 단지 안식일 다음 날이 아니다. 새로운 제8요일이다.

새로운 시간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표현이 예배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예배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간의 제8요일인 ‘부활하신 주님의 날’(주일)에 성찬례를 드렸다. 그리스도인들을 이후 일어난 모진 박해 아래서도 목숨을 걸고 새 시간에 모였다. 부활일은 일 년 중 가장 큰 주일이며, 매 주일은 모두 작은 부활일이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여기에도 같은 숫자 놀이가 있다. 옛 창조 시간의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나서 새로 얻은 시간이 ‘오십일’이다 (7*7+1=50). 구약성서의 희년 사상과도 겹친다.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로서 통째로 하나인 희년의 시간이다. 부활절기는 부활밤에서 시작하여 부활일과 부활 후 팔일부, 그리고 사십 일째 되는 승천일을 거쳐 50일째 되는 성령강림일을 아우른다. 4세기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절기 동안에 무릎을 꿇지 않도록 정했을 정도로 부활의 기쁨을 강조했다.

부활절기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축하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부활은 오늘과 미래에도 살아계시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확인하고 되새기며 찬양하고 기뻐하는 영원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단 하루의 종교적 의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서 나날이 변화하고 성숙하며, 주님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세상에 전하는 ‘기쁨의 50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절기의 중심적인 상징 두 가지는 부활초와 세례대이다. 부활초는 부활밤 새로 축복한 불에서 붙여서 세상의 어둠을 이긴 하느님의 빛, 즉 부활의 생명이 만든 빛을 드러낸다. 부활밤 세례식에서 부활초로 물을 축복하고 그 물로 세례를 베푼다. 세례를 베푸는 곳은 성천(聖泉:거룩한 샘)이라 불리는 세례대이다.

교회 전통에서 세례대는 성당 동쪽의 제대와 마주 보는 서쪽의 입구 중앙에 부활초와 함께 있다. 신앙은 세례를 받고 제대로 나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순례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성당 입구에서 우리는 죄를 씻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례의 경험과 언약을 되새기며 그 물로 십자 성호를 긋고 성당에 들어온다. 전통적인 성당 배치에서는 제대와 성천이 마주하며 복음의 성사인 성찬례와 세례를 되새겨 준다. 종종 세례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서울주교좌성당의 세례대는 영국에서 가져와 1892년부터 사용하던 정교한 대리석 팔각형 성천이다. 숫자 ‘팔’(8)이 다시 적용됐다.

신앙인은 부활밤의 새 빛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간을 걷는다. 신앙인은 과거를 씻는 세례를 통과하여 새로운 ‘생각과 말과 행실로’ 새로운 시간을 사는 ‘제8요일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