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 낭만과 현실의 식별

Friday, February 6th, 2015

성소'(聖召)에 관하여 큰 오해가 즐비한 듯하다. 특별히, 그것이 성직 성소, 수도 성소인 경우에 그 오해가 크다. 모든 신자가 나누는 성소는 자기 신앙 체험에 근거한 것일 테다. 세례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부르심의 공개적 징표이다. 그러나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일 때는 ‘구체적인 공동체로 부르심’이라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신앙 체험 안에서 어떤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그것이 곧바로 ‘공동체’ 성소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성직과 수도직을 통해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는 낭만 넘치는 기대는 성직과 수도직 자체에 대한 오해이다. 성직/수도 성소는 현실의 ‘공동체와 그 규칙’ 안으로 들어가는(into) 성소이다. 그 안에서 나눌 책임과 책무까지 따라온다. 그 현실의 제한과 책임 안에서 복음의 전통과 그 실천을 드러내는 일이 ‘공동체 성소’이다.

그러니 이 성소에 좀 더 세심한 식별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성직자나 수도자 ‘개인’으로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자유롭게 내 신앙의 꿈’을 펼쳐보리라는 생각과 의지는 매우 고맙고 가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와 공동체는 물론, 자신의 삶마저도 불행으로 이끌기 일쑤다. 성소와 그 방향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그 기대와 의지는 적어도 성직/수도 성소는 아니다.

구원의 아픔 – 아기 예수 봉헌 축일

Sunday, February 1st, 2015

아기 예수 봉헌 축일 – 구원의 아픔 (루가 2:22~40)1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루가 2:40). 자녀를 향한 세상 부모의 마음을 모두 담은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소망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한 처지인지라 비싼 새끼 양은 엄두가 나지 않아 비둘기 한 쌍을 구하여 제물로 바치려는 마음은 세상 여느 부모처럼 간절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건강하고 지혜롭고 어려움 없이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 소박한 소망을 훼방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아온 시므온이라는 노인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구원을 목격했노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구원이 펼쳐지는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이 아기는 자라서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것이며,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서,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 합니다. 도대체 아기를 성전에 바치는 장면에서 벌어진 이 일은 축복인가요, 저주인가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역설투성이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삶이지만,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실패요 불명예인 삶입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 보면, 그 삶은 하느님과 지상의 부모에게는 크나큰 고통과 아픔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화해를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복음을 따르겠다는 신앙인은 이 역설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 안에 있는 아픔을 살핍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아픔을 우리 것으로 짊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속에서 우리 삶을 헌신한다는 말의 본래 뜻입니다.

피붙이로만 이뤄진 가족으로는 이런 다짐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 교회는 성찬례의 밥상에 둘러 모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롭고 든든한 가족입니다. 아픈 마음을 서로 기대며 소망을 나누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일이 바로 우리의 헌신이며, 교회의 선교입니다. 우리를 조금씩 덜어내어 물질로나 시간으로, 봉사로나 기도로 함께 응원하는 일로 우리는 헌신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여전히 우리는 자녀가 잘 자라고 가족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펼치는 구원에 아로새겨진 아픔, 그와 함께했던 마리아와 요셉이 겪었을 아픔을 함께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녀가,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깊이 느끼며 세상에 구원의 기쁨을 전달하는 아기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우리의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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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2월 1일치 []

씨 뿌리며 대화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Wednesday, January 28th, 2015

히브 10:11~18 / 시편 110:1~4 / 마르 4:1~2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2015년 1월 2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있고 입장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이미 있거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왜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이 생기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의문과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또는 더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궁색한 대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은 답이라기보다는 당장 겪는 시련과 고통에 어떤 위안을 주고 진정 효과를 내려는 진통제와 같은 위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가 치료 약은 아니라면서 처방조차 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문제의 원인과 답을 계속 찾고 그 치료책은 찾아야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을 살필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여러 종교가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종교의 유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여전히 중요한 일은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우리 삶을 멈추지 않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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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늘 복음 말씀은 매일 아침 성찬례에 참여하시는 열심을 지닌 신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태도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와 그 비유에 관한 풀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아 놓고 전하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왔다가 곧바로 말라 죽었고,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자고 씨를 뿌렸는데,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잃어버리는 씨도 많고 실패도 거듭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과 선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작으나마 좋은 땅에서 자라나 잃어버린 다른 씨앗을 보상하고도 남을 수확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 넘쳐나는 수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이제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기 하지 않겠다는 희망이 간절합니다.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겠다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 절망 끝에 나오는 희망의 수확으로 자기만 먹고살지 않고, 풍족하게 나누며 살겠다는 꿈이 다부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많은 분은 어쩌면 원래 비유 이야기인 첫째 부분보다, 하나의 해석인 둘째 부분에 더 익숙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풀어주신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 풀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쓴 마르코와 그 동료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전도와 선교활동의 어려움을 되새기면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땅의 여러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뜻을 붙여 풀어내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의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씨는 복음이고, 여러 가지 조건의 땅은 사람들의 신앙 태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신자가 되었지만 박해나 고생이 생길라치면 곧바로 포기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되 현실의 여러 걱정거리와 재물 욕심과 유혹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듬고 굳세게 하여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태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의 원뜻을 늘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온갖 고생과 절망의 상황이 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희망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확으로 많은 사람을 풍족히 먹이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꿈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뜻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지, 흔들리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해야 어려움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처지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다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일을 통해서 신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고 되돌아보게 하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바로 그런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특히 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가장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12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성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널리 퍼져나가던 설교 수도회 도미니코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머리를 흉하게 깎고 절제와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절제로 바로잡아 기운을 비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했습니다.

귀족이었던 가족은 토마스 수사를 잡아다가 집에 가둬놓고 수도회 생활 포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감옥을 탈출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쾰른과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를 넘나드는 굴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가 없는 교회는 그 기초가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부패와 타락이 스며듭니다. 토마스는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를 시기하며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러 번 교회 당국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당호하고 보호하며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토마스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제대로 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하며,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환히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축일은 성인 태어난 날도 아니요, 세상을 떠난 날도 아닙니다. 바로 <신학대전>이 처음 출간된 날입니다.

서방 교회 신학 전체를 주름잡던 그는 실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묻습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 토마스는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해 교회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뤄낸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교회 공의회에 참여하는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가 경험한 신비 체험을 적었습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이 쓴 것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맛보겠지요. 신앙이 흔들릴 일도 많고, 유혹과 시련이 많겠지요. 그때마다 새롭게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합니다. 온갖 시련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은 끝내 결실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여 반성하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쇄신해 나가는 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영급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감하게 자신 전체를 던지며 살아가다가, 삶 한가운데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수고를 잠시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의 말을 잘 따랐다. 너의 삶으로 나에 관해서 참 잘 썼다.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아무래도 우리는 토마스 성인을 따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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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Crivelli, 토마스 아퀴나스, 15세기)